<P><a target="_blank" href="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9408&s_no=9408&page=1">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9408&s_no=9408&page=1</A></P> <P> </P> <P>나주의 전방 후원분에 대해서 위의 글에 이어서 씁니다..</P> <P> </P> <P>한국 강단 사학계가 (라고쓰고 신식민주의 사학계라고 읽는다) 마한의 유물이라고 서기 5세기까지 마한이 반도 남부에 있었다고 하는..</P> <P>황당한 가설 위에서 억지를 부리고 있고..</P> <P> </P> <P>그에 호응하듯 일본 학자들은 송서 倭 5 왕이 마한의 영유권을 주장했다는 사료와 연결시키며 반도 남부에 있던 </P> <P>왜인의 흔적 운운하고 있습니다만..</P> <P> </P> <P>만일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위에 이덕일씨가 쓴 것처럼 일제 시대에 이것을 발굴한 일인 학자들이 </P> <P>도굴을 방조했을까요? </P> <P> </P> <P>일제시대 식민사학자들은 점제현 신사비 같은 것들을 조작해서라도 식민사관..즉 조선은 고대에도 일본의 지배하에 </P> <P>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했는데 .. 만일에 위의 주장들이 맞다고 한다면 말입니다.. 위의 이덕일씨 주장처럼 </P> <P>도굴을 방조했을까요? 필사적으로 보존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P> <P> </P> <P>이덕일씨는 도굴을 방치했다고 적었지만 내 느낌에는 도굴을 빙자해서 유물을 빼돌렸다. 라고까지 생각이 됩니다만 </P> <P>그런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은 접어두고 주어진 사료를 가지고 저 고분 주인의 정체를 고민해보면 </P> <P> </P> <P>역시 백제 동성왕이 제일 가능성이 높지 않나 싶습니다. </P> <P> </P> <P>동국여지승람에는 이 고분이 발굴된 지역에 말통대왕(末通大王) 릉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P> <P>백제 동성왕은 이름이 모대( 牟大) 였고 일본서기에는 末多王으로 기록되어 있어 동국 여지승람의 말통대왕과 </P> <P>동일인물로 추정할 수 있는데요 </P> <P> </P> <P>도굴당한 유물의 목록을 보면 금동관 금동신발 곡옥 등.. 백제계 고분의 부장품들을 연상하게 됩니다. </P> <P>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은 남습니다. 백제계열 고분에서 옹관을 사용했다..? 라고 하는 의문입니다. </P> <P>백제의 여러 고분들이 있지만 옹관을 사용한 예는 없으니까요</P> <P> </P> <P>그것은 백제 동성왕이 순수하게 백제 내부에서 왕위를 승계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백제 왕위를 </P> <P>승계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고민해야 풀 수 있는 의문이 아닐까 합니다. </P> <P> </P> <P>1. 백제왕들이 중국 남조와 외교할 때에 부여의 후손이라는 의미의 여(餘)씨 성을 사용한 것에 반해서 </P> <P> 모(牟) 씨 성을 사용했다는 점 </P> <P> </P> <P>2. 백제 개로왕이 478년 왕과 왕자 왕비 모두 장수왕에게 척살당할 정도로 실질적으로 왕조가 멸망했는데도 </P> <P> 동성왕은 484~ 488 년에 북위와 전쟁해서 승리할 정도의 국력을 유지하였다는 점은 한반도 백제 이외에 </P> <P> 예를 들어 열도와 같은 곳에 외부의 기반이 있었던 세력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 </P> <P> </P> <P>3. 백제왕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신라 왕족과 혼인을 했고 동성왕이 사망시 신라에서는 마치 종족의 어른이 돌아가신 것 </P> <P> 처럼 예를 표했다..</P> <P> </P> <P>기타등등...</P> <P> </P> <P>일본 신식민주의 사학자들과 한국 강단사학계에서는 단지 고분의 형태가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P> <P>니혼 반자이를 외치지만 글쎄요..</P> <P> </P> <P>일본에게 유리한 실증만 선택하고 그 이외는 무시한다는 일본식 실증주의(라고 쓰고 신식민주의 사관이라고 읽는다)</P> <P>를 벗어나려면 이 당시 열도에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봐야겠지요 </P> <P> </P> <P>백제 동성왕이 백제를 다스리던 시기 그러니까 5세기 말 그리고 6세기초까지 열도에서는 한반도의 횡혈식 석실분.. </P> <P>즉 돌방 무덤이라고 하는 것이 열도 전체로 확산이 됩니다. 흔히들 백제의 문화가 열도로 건너갔다고 표현하는데 글쎄요 ? </P> <P>장례나 매장 풍습은 그 집단의 종교하고도 관련이 있는데 저게 무슨 유행처럼 급격히 바뀌었을까요 예를 들어 </P> <P> </P> <P>백제인들은 무덤에 돌방을 만들어서 고인이 죽은 후에도 계속 제사를 지내는데 우리 왜인도 저렇게 하면 좋을 것 같아.. </P> <P>하면서 단기간에 열도 전체로 확산이 되었을까요.. 한국에도 기독교가 전파된지 150년이 넘어가고 있지만 매장이나 </P> <P>장례 풍습은 잘 변하지 않고 있고..여전히 제사 이런 문제로 싸우지 않나요.. </P> <P> </P> <P>현실적인 이야기는 이 시기에 열도 안에서 백제 세력이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P> <P>열도에서 반도로 건너왔을 가능성이 높은 백제 동성왕은 그러한 열도의 변화를 기반으로 한 세력을 기초로 백제의 </P> <P>왕을 이었다고 보는데요. </P> <P> </P> <P>열도안의 신라 세력과 백제 세력의 중간혹은 양쪽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동성왕의 친 신라적인 </P> <P>정책은 그런 것을 배경으로 했겠지요. 실제로 혈통 자체도 순수한 백제 왕족이 아니라 신라와 백제의 혼혈..</P> <P>하지만 본인은 신라인이라는 의식이 더 강하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P> <P> </P> <P>( 일본서기에는 백제 동성왕의 아들인 마나가 백제왕의 골족이 아니다.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일본서기의 </P> <P> 사료 성격을 파악하면 어째서 이런 표현이 나오는지 알게 됩니다만 ) </P> <P> </P> <P> </P> <P>한반도 남부의 전방후원분이라고 하는 것은 저런 것이라고 봅니다..</P> <P> </P> <P>그리고 여기부터는 제 추측입니다만.. 일제시대 초기 일인 학자들이 임나 일본부의 결정적 증거라고 </P> <P>열심히 발굴했던 나주 고분군.. 어째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 혹시 거기에는 백제 동성대왕이 열도 백제의 </P> <P>통치자의 후손이었다라고 기록된 금석문 같은 것이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없어진 유물... 참 꿀꿀하네요 </P> <P> </P> <P> </P> <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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