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일단 한국의 <SPAN class=highlight>이덕일</SPAN>씨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도록 하지요. </P> <P>----------------------------------------------------------------------------------<BR><STRONG><SPAN style="COLOR: #670000">반남</SPAN><SPAN style="COLOR: #670000" class=highlight>고분</SPAN><SPAN style="COLOR: #670000">군을 최초로 조사한 기관은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古蹟調査委員會)다. 1917∼18년</SPAN><BR><SPAN style="COLOR: #670000">곡정제일(谷井濟一)·소장항길(小場恒吉)·소천경길(小川敬吉)·야수건(野守健) 등 4명의 위원이 </SPAN><SPAN style="COLOR: #670000" class=highlight>나주</SPAN><SPAN style="COLOR: #670000">군 </SPAN><BR><SPAN style="COLOR: #670000">반남면 신촌·덕산·대안리 일대 </SPAN><SPAN style="COLOR: #670000" class=highlight>고분</SPAN><SPAN style="COLOR: #670000">들 가운데 신촌리 9호분, 덕산리 1호·4호분과 대안리 8호·9호분</SPAN><BR><SPAN style="COLOR: #670000">등을 발굴·조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대대적인 발굴 조사와 달리 곡정제일이 단 한쪽짜리 보고서만세상에 내놓는 것으로 발표를 갈음했다. 다음은 당시 내놓은 보고서 전문이다. </SPAN></STRONG></P> <P><SPAN style="COLOR: #670000"><STRONG> </STRONG></SPAN></P> <P><STRONG><SPAN style="COLOR: #670000">‘반남면 자미산 주위 신촌·덕산리 및 대안리 대지 위에 수십 기의 </SPAN><SPAN style="COLOR: #670000" class=highlight>고분</SPAN><SPAN style="COLOR: #670000">이 산재하고 있다. 이들 </SPAN><SPAN style="COLOR: #670000" class=highlight>고분</SPAN><SPAN style="COLOR: #670000">의 </SPAN><BR><SPAN style="COLOR: #670000">겉모양은 원형(圓形) 또는 방대형(方臺形)이며 한 봉토 내에 1개 또는 여러 개의 도제 옹관(陶製甕棺)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 조사결과를 대략 말하면 먼저 지반 위에 흙을 쌓고 그 위에 도제의 큰 항아리를 가로놓은 뒤 이에 성장(盛裝)한 시체를 오늘날에도 한반도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처럼 천으로 감아서 판자에 얹은 뒤 머리쪽부터 큰 항아리 속에 끼워 넣고 큰 항아리의 입에서 낮거나, </SPAN></STRONG></P> <P><STRONG><SPAN style="COLOR: #670000">또는 입을 깨서 낮게 한 작은 단지를 가진 판자를 아래로부터 받친 뒤 약간 작은 항아리를 큰 </SPAN><BR><SPAN style="COLOR: #670000">항아리 안에 끼워 넣어서 시체의 다리 부분을 덮고 크고 작은 항아리가 맞닿은 곳에 점토(粘土)를 </SPAN><BR><SPAN style="COLOR: #670000">발라 옹관 밖의 발이 있는 쪽에 제물(祭物)을 넣은 단지를 안치하여 흙을 덮는다. 여기에서 발견된 </SPAN><BR><SPAN style="COLOR: #670000">유물 중에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칼(大刀·刀子)과 도끼·창·화살·톱이 있고, 귀고리· 곡옥(曲玉)· </SPAN><BR><SPAN style="COLOR: #670000">관옥(管玉)·다면옥(多面玉)·작은 구슬 등 낱낱이 열거할 겨를이 없을 정도다. </SPAN><BR><SPAN style="COLOR: #670000">이들 </SPAN><SPAN style="COLOR: #670000" class=highlight>고분</SPAN><SPAN style="COLOR: #670000">은 그 장법(葬法)과 관계 유물 등으로 미뤄 아마 왜인(倭-人)의 것일 것이다. </SPAN><BR><SPAN style="COLOR: #670000">그 자세한 보고는 후일 ‘</SPAN><SPAN style="COLOR: #670000" class=highlight>나주</SPAN><SPAN style="COLOR: #670000"> 반남면의 왜인의 유적’이라는 제목으로 특별 보고로서 제출하게 될 것이다.’</SPAN></STRONG></P> <P><BR><FONT size=3><STRONG><U><SPAN style="COLOR: #670000">이들은 훗날 내놓겠다던 ‘</SPAN><SPAN style="COLOR: #670000" class=highlight>나주</SPAN><SPAN style="COLOR: #670000"> 반남면의 왜인의 유적’이란 보고서를 끝내 내놓지 못했다.</SPAN></U><SPAN style="COLOR: #670000"> </SPAN></STRONG></FONT></P> <P><SPAN style="COLOR: #670000"><STRONG> </STRONG></SPAN></P> <P><STRONG><SPAN style="COLOR: #670000">그러나 이 간단한 한쪽짜리 보고서의 내용도 당시 고고학계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SPAN><BR><SPAN style="COLOR: #670000">그런데 이 보고서를 보고 먼저 움직인 것은 고고학계가 아니라 도굴꾼들이었다. </SPAN><BR><SPAN style="COLOR: #670000">보고서 내용 중 ‘금동관·금동신발, 칼과 도끼’ ‘귀고리· 곡옥(曲玉)· 관옥(管玉)· 다면옥(多面玉)’ 등은 </SPAN><BR><SPAN style="COLOR: #670000">이들의 모험심에 불을 붙이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SPAN></STRONG></P> <P><STRONG><SPAN style="COLOR: #670000">1차 발굴조사 20여년 후인 38년 일제는 다시 신촌리 6호·7호분과 덕산리 2호·3호·5호분 등 옹관</SPAN><SPAN style="COLOR: #670000" class=highlight>고분</SPAN><SPAN style="COLOR: #670000"> </SPAN><BR><SPAN style="COLOR: #670000">5기와 흥덕리 석실분(石室墳)을 발굴·조사했는데, 조사에 참여했던 유광교일(有光敎一)과 택준일(澤俊一)이 “도굴의 횡액(橫厄)으로 이처럼 유례가 드문 유적이 원래 상태를 거의 잃어버리게 됐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SPAN><BR><SPAN style="COLOR: #670000">이들은 “거의 대부분의 </SPAN><SPAN style="COLOR: #670000" class=highlight>고분</SPAN><SPAN style="COLOR: #670000">이 도굴당해 완전한 봉토가 거의 없었다”면서, </SPAN><BR><SPAN style="COLOR: #670000">“신촌리 6호분에서 겨우 2개의 옹관을 수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SPAN></STRONG></P> <P><STRONG><SPAN style="COLOR: #670000">그러나 이런 도굴은 사실상 일제가 조장한 셈이었다. 일제는 1차 조사 후 한쪽짜리 </SPAN><BR><SPAN style="COLOR: #670000">보고서에서 ‘금동관·금동신발’ 등의 유물이 나왔음을 발표하고도 이 지역에 대한 아무런 보호조치를 </SPAN><BR><SPAN style="COLOR: #670000">취하지 않았다. 이는 도굴꾼들에게 도굴 장소를 안내한 격이었다. </SPAN></STRONG></P> <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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