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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몇 년 만에 생각해낸 그녀의 모습은 그런 것이었다. 마침 눈도 내리고 있었고 이제 막 집을 나선 골목풍경은 그때만큼 노곤했기 때문에, 왼발 다음에 오른발을 내딛는 것처럼 그녀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떠오르는 것은 열일곱 살이었던 그녀와 그녀 위로 떨어지는 가랑눈과 그때의 흐릿한 감정, 바다의 이미지 따위들뿐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을 세월이 지났다는 생각에 감회가 새로웠다. 언제나 그렇듯 생생했던 모습은 독단적 기억이 되었다가 시간이 지나 희미한 이미지로 남는다. 가끔은 변질되기도 한다.
약속 장소로 가는 버스 의자에 앉은 채로 나는 이미지들을 떠올렸다. 김이 서린 버스 창문처럼 지금은 희미한 이미지들이 생생한 모습들로 처음 다가왔을 때마다 나는 머뭇거렸다.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은 것들, 머리로는 알지만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하나 둘씩 내게 다가왔다. 그때마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러나 겸허하게 익숙한 것으로 만들어내었다. 세상 모든 것이 배울거리였다. 빨강은 따뜻하고 파랑은 차갑고 돈은 좋은 것, 사랑은 더더욱 좋은 것.
그때는 어렸다. 내게 처음 다가온 사랑은 그 동안 만들어놓은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었다. 모든 경험이 새로웠다. 겨울에 내리는 눈이 따뜻하다거나, 나보다도 소중한 것이 있다거나, 빨간색에 파란색을 섞으면 보라색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전혀 다른 색이 되듯이, 말하자면 은색이 되었던 것이다. 본래 있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새로운 내가 그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녀를 만났던 세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오래고 먼 여행을 떠났다가 본래 색으로 돌아왔다. 가끔 은색의 나를 그리워했다.
버스는 그녀가 다녔던 대학교를 지나고 있었다. 창문에 서린 김을 닦아냈다. 졸업을 했는지 휴학을 했는지 미국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에는 들은 것이 없었다. 가끔씩 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한 번쯤 마주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런 일은 여태 없었다. 다행도 불행도 아니었다. 뭐, 각자의 삶이 있는 거니까. 나는 다른 대학에 다녔고, 군대를 다녀왔고, 밥을 먹었고, 물을 마시니까 많이 변해있었다. 그녀도 많이 변했겠지.
그녀 이후에도 몇몇의 여자를 사귀었다. 두 달 정도 되면 다들 알아서 떠났다. 다른 기분이나 감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잘 모르겠으나, 내가 매번 느낀 것은 내가 시큰둥하다는 것을 상대가 감지한다는 것이다. 설레지 않았다. 빨간색은 파란색과 합쳐 다시는 은색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마다 보라색이었다. 나는 점점 이성적인 사람이 되어갔다. 언제나 뭔가 붙들고 있었다. 마치 잠을 자야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있을 땐 오히려 잠이 더 오지 않는 것처럼.
쓸쓸히 지내는 나를 보고 안쓰러웠는지 극단 선배 하나가 소개팅을 주선하겠다고 했다. 나와 비슷하게 쓸쓸해 보이는 여자가 하나 있다며 소개 시켜준다는 걸 내가 미루고 미뤘지만 결국엔 날짜가 다가오고 말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글을 쓴답시고 극단에 들어온 지도 1년이 되어 가는데 이렇다 할 작품이나 변변찮은 비전도 없는 나를 좋아나 해줄까 하는 계산이 앞섰다. 그래도 평소에 잘해주던 선배가 주선한 소개팅이고, 상대도 기본적인 예의를 가지고 나타날 것이므로 나도 격식을 차리고 나가야했다.
“체구는 좀 작은 편인데 예뻐. 예쁘고, 공부도 되게 잘했어.”
함께 술을 마시던 선배는 자기 자랑하듯 떠벌렸다. 나는 키 작은 여자가 좋다느니 똑똑한 여자가 좋다느니 하며 신난 척 맞장구를 쳤지만, 닳을 대로 닳아버린 감정으로 큰 기대를 않고 있었다. 나와 할 얘기 못할 얘기 다 나누었던 선배는 그런 내 표정을 쉽게 읽어내고 진지하게 말했다.
“사랑도 열심히 해야 돼. 자꾸 뻗대지 말고 열심히. 알겠어?”
알겠다고 거듭하는 내 말에 마지못해 그럼 나도 알겠다며 잔소리를 거두는 선배였다. 뻗대지 말고 열심히. 정말 열심히 하면 되는 걸까. 나는 선배가 밉다는 생각을 잠깐 하며 소주잔을 들이켰다. 우리는 그날 새벽 첫 차를 탔다.
수능을 치르고 다시 만나자는 말을 먼저 꺼낸 것은 그녀였다. 그 해의 마지막 비가 내린 날, 우산을 들고 학원으로 마중 나갔을 때였다. 고2였던 우리에게 수능은 1년이 남아 있었고, 어려서 1년은 막막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끝내 자세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그 대신 바다를 보러 가자고 했다. 언젠가 꼭 함께 바다를 보러가자고 약속했던 것을 그녀는 잊지 않고 있었다. 며칠 후로 날짜를 잡고 2시간정도 떨어진 바다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했다. 식당도 알아보고, 날씨는 또 어떤지, 그때는 어렸으니까 아마도 많이 모자랐을 테지만 그래도 열심히,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정작 그녀가 제시간에 오지 못했다. <미안해. 못 갈 것 같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가>라는 문자가 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꼭 나오겠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기차는 이미 가고 없는데 역 광장 벤치에 한참동안 가만히 앉아 무심코 기차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기차표 뒷면에는 몇 십분 지나도 금액의 몇 퍼센트는 환불해준다고 적혀있었다. 그녀도 내게 몇 퍼센트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 즈음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나는 그것을 맞고 있는 것이 왠지 청승스러워서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이듬해에도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선배가 소개해준 여자는 선배 말대로 좋은 여자였다. 그녀는 눈이 내려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이런 날에는 눈을 맞고 돌아다녀도 좋고 집에서 가만히 책을 읽어도 좋다며,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그녀도 좋아한다고 했다. 「보라색 거리」라는 작품 아세요? 최근에 읽은 책인데 제가 엄청 좋아해요. 거기 나오는 여자가 이런 말을 하잖아요. 추억을 버리려고 하지 마. 간직하고 있어도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사랑은 사랑으로 잊을 수 있다고.
그녀는 내가 쓴 작품을 하루 빨리 보고 싶다며 옆에서 응원하겠다고 했다. 나는 열심히, 뻗대지 말고 열심히 그녀를 대했다. 근처에서 가볍게 식사를 하고 나서 천안 집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그녀를 마침 서울역이 근처이기도 해서 바래다주었다.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진 후에 광장으로 나왔다. 가랑눈이 오랜만에 포근하게 느껴졌다. 버스 하나가 지나쳤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눈을 조금 더 맞았다.
저만치에 눈을 맞으며 서 있는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아직 어렸다. 그곳에 금방 도착한 듯 가쁜 숨을 골랐다. 그녀는 누군가를 찾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휴대폰을 꺼내들어 문자를 작성했다. 그러나 선뜻 전송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녀의 입에서 입김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휴대폰을 쥔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그녀는 앞에 놓인 빈 벤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동안 필사적으로, 그러나 겸허하게 은색 가랑눈을 맞으며 그녀는 서 있었다.
나는 잠시 더 있다가 발걸음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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