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늦긴 했지만 예전에 올린 첫번째 이야기입니다.<br><a target="_blank" href="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panic&no=94642&s_no=94642&kind=search&page=5&keyfield=subject&keyword=%EC%83%A4%EC%9B%8C" target="_blank">샤워 중 사라지는 시간 (1/3)</a><br>그럼 두번째 이야기 시작합니다.<br><br><br>==<br>그날 화장실에서 일이 있고 보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br><br>그동안 현정과 나 사이에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다행히 우리는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다. <br><br>현정은 그날 일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지만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했다. <br><br>현정은 종종 나의 원룸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날 나와 함께 출근하곤 했는데, <br><br>내가 샤워를 하러 화장실에 들어갈 때면 항상 머리는 적시지 말라는 부탁을 했다.<br><br><br>==<br>하루는 현정과 사랑을 나누고 침대에 나란히 누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br><br>현정은 나를 보고 돌아 눕더니 팔을 뻗어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br><br>“자기 내일 머리 안감고 출근하면 머리에서 냄새나지 않을까?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싫어할 텐데...”<br><br>“머리가 짧아서 하루 안감았다고 냄새나지는 않을꺼야.”<br><br>“그런데... 요즘에도 계속 그래? 머리 감을 때 기억이 사라지는 거?”<br><br>“응... 계속 그렇네. 그런데 누나, 너무 신경쓰지마.”<br><br>현정은 한참을 말없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다 말했다.<br><br>“한번 메세지를 남겨보는게 어떨까?”<br><br>“메세지? 누구한테?”<br><br>“자기 머리 감겨주는 사람.”<br><br>“아—그런데 무슨 메세지?”<br><br>“글쎄… 자기는 걱정되지 않아? 왜 그런일이 생기는지?”<br><br>나는 웃으며 말했다.<br><br>“누나가 이렇게 걱정해 주니까 좋다. 하하.”<br><br>현정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br><br>“말은 안 했어도 더 나빠지지 않을까 신경쓰여. 자기 병원 안가봤지?”<br><br><br>==<br>다중인격 또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 <br><br>한 사람의 안에 둘 이상의 자아가 존재하는 일종의 정신질환이다. <br><br>극도의 스트레스나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고,<br><br>어린 시절 받은 학대가 원인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br><br>다른 자아가 의식을 지배하는 동안 자신의 행동을 보고 기억하는 환자도 있다.<br><br>하지만 다른 자아가 발현한 시간 동안 기억의 공백을 보이는 환자도 있다고 한다. <br><br>나는 후자의 경우다. <br><br><br>==<br>“누나. 걱정 하지마. 나도 신경써서 보고 있는데 늘 그대로야. 상태가 안좋아지면 병원도 가볼꺼고.”<br><br>현정은 똑바로 눕더니 한참을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br><br>“자기 상처 받을까봐 조심스러운데... 뭐 하나 궁금하긴 해.”<br><br>“뭔데? 난 괜찮아.”<br><br>“그 암으로 죽었다던... 지연이라는 여자...” <br><br>현정이 말끝을 흐렸다.<br><br>현정의 표정이 심각해지는 것을 느낀 나는 상체를 일으켜 현정의 얼굴 위로 나의 얼굴을 들이밀었다.<br><br>“하하. 누나, 지금 질투하는거 맞지?” <br><br>현정은 나의 얼굴을 밀어냈고, 시선은 여전히 천장을 향한 채 말했다.<br><br>“질투하는게 아니라. 그 여자 죽고서... 자기 상처 받아서... 그런 건 아닐까 해서...”<br><br>“누나.”<br><br>“누나.”<br><br>“이봐요, 김현정 대리님.”<br><br>현정은 나의 시선을 피하다가 그제서야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br><br>“누나. 나 좀 억울한데, 나 그 지연이라는 여자 몰라. 나 결혼한 적도 당연히 없고.”<br><br>현정의 표정에 살짝 안도감이 느껴졌다. <br><br>“그 사람이 암으로 죽었다는 건?”<br><br>“나도 모르지.”<br><br>“그럼... 지연이라는 이름은 전혀 몰라?”<br><br>“전혀 모르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안다고 하기도 좀 그렇네.”<br><br>“그게 무슨 말이야?”<br><br>“흠—누나가 그날 많이 놀라서 이야기 안 했는데, 내가 그날 밤에 좀 이상한 꿈을 꿨어.”<br><br>“자기 울던 꿈?”<br><br>“누나 기억하는구나.”<br><br><br>==<br>나는 그날 밤 꿈 이야기를 현정에게 해줬다. <br><br>내가 지연이라는 여자였고, <br><br>암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고, <br><br>한 남자가 나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던 꿈 이야기를 해주었다.<br><br><br>==<br>현정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는 나에게 물었다.<br><br>“그럼… 그 꿈 속의 남자가 자기 머리 감겨주는 거라고 생각해?”<br><br>“난 솔직히 꿈은 꿈이라고 생각해. 머리 감겨주는 사람도 나라고 생각하고. 단지 기억을 못할 뿐이지.”<br><br>“그런데 우연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잖아. 지연이라는 이름...”<br><br>“나도 처음엔 누나가 그 이름을 말해서 많이 놀랐어. 그런데 그날 꿈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서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한게 아닐까?”<br><br>“자기는 꿈에서 죽는 여자였다며, 임종을 지키던 남자가 아니라.”<br><br>“아마도 그 꿈에서 나는 죽는 여자였고, 내 안에 다른 자아는 그 남자가 아니었을까? 마치 1인 2역 같은거? 하하.”<br><br>“장난치지마. 난 심각한데... 이렇게 우리끼리 따져보는 것보다 병원에서 상담 한번 받는게 어떨까?”<br><br>“솔직히... 누나가 처음 다중인격 말해줬을때, 나도 많이 알아봤어. 병원이랑, 의사랑, 어떻게 치료하는 지도...”<br><br>“어떻게 치료하는데?”<br><br>“다중인격이 생기는 게 마음의 상처가 원인인 경우가 많데. 그래서 그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으로 상담 치료를 하나봐.”<br><br>현정은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br><br>“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나는 치료나 상담을 받을 만한 정신적 상처가 없는거야. 집에서 사랑받고 자랐고. 학창시절도 무난했고. 군생활도 몸이 힘들었지 마음은 편한 편이었고. 그래서 의사 만나봐야 특별히 할 이야기가 없겠구나 싶더라구.”<br><br>“그럼 상처는 아니라도 나쁜 기억이나 뭐 집히는 이유도 없어? 뭐, 사소한 거라도.”<br><br>“글쎄… 잘 모르겠네.”<br><br>걱정어린 현정의 얼굴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br><br>나는 현정의 몸 위로 덮쳐 안으며 그녀를 애무하기 시작했다.<br><br>“누나와 한번 더 천국을 경험하면 생각날 것 같기도 한데...”<br><br>현정도 싫지 않은 듯 나의 머리를 끌어안았다.<br><br><br>==<br>병원에 가더라도 의사에게 해 줄 이야기가 있어야 상담 치료를 받을 것이 아닌가...<br><br>정보 수집을 위해 나는 머리 감겨주는 자아와 대화를 시도하기로 했다.<br><br>작은 화이트 보드와 펜을 준비했다. <br><br>‘묻고 싶은게 많아요. 당신은 누구죠? 왜 내 머리를 감겨주는 거죠?’<br><br>화이트보드를 샤워기 아래에 걸어놓고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br><br>정신을 차렸을 때 군데군데 물이 번진 메세지가 적혀있었다.<br><br>‘우리는 여러 관계로 얽혀있지만 저는 이전 생 당신의 남편으로서 당신에게 왔습니다. 당신에겐 별 의미가 없겠지만 저는 전생의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당신을 찾아오고 있어요. 하지만 오래가지 않을 듯 하네요. 저 때문에 많이 힘드나요? 미안합니다.’<br><br>첫째로 무섭다거나 공격적인 내용이 아니어서 안도했다.<br><br>둘째로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말이 무척 반가웠다. <br><br>그리고 작은 글씨로 쓰여진 메세지의 필체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br><br><br>==<br>다음날 나는 다시 메세지를 남겼다.<br><br>‘힘들지는 않아요. 몇가지만 더 물어볼께요. 여러 관계로 얽혀있다는 말—우리 서로 알고 있나요? 그리고 오래가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요?’<br><br>답변이 돌아왔다.<br><br>‘저는 지금 제 육신을 떠난 상태여서 온전히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현생의 당신과 가까운 사이라고 느껴지네요. 내일을 마지막으로 저는 이제 제 육신으로 돌아가려 합니다.’<br><br><br>==<br>다음날 샤워를 하면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욕조 안이 아닌 세면대 거울 앞에 서 있었다.<br><br>거울 속 나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물기가 닦인 머리는 반듯이 빗질이 되어있었다.<br><br>그 이후로는 샤워를 하며 기억을 잃는 일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았다.<br><br><br>-----------------<br>완결인 세번째 이야기는 늦지 않게 올리도록 하겠습니다.<br>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br><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