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그냥 평범한 학교 생활이었어요. 당연히 여고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남녀공학으로 배정 받았을 땐 내 인생에도 봄이 오나 싶기도 했고요. 제 입으로 얘기하긴 쑥쓰럽지만 전 모범생입니다. 그 탓인지 몰라도 아직 새 친구를 제대로 사귀지 못했어요. 여자애들이란 대개 무리를 지어 놀잖아요? 전 아직 소속된 그룹이 없어요.
요새 반장 그룹에서 묘한 놀이를 만들었어요. 반장은 소위 말하는 일진이고, 그 무리들도 비슷한 아이들이에요. 그렇다고 걔들이 누굴 괴롭힌다든지 그런 건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그 편이 나았겠네요. 아무튼 반장은 좀 이상한 규칙이나 설정 따위를 만들고 그걸 그룹 아이들과 공유하기 시작했지요. 어찌보면 설정놀이의 연장선 같이 보였죠. 반장이 그 단체의 리더였고, 아이들은 추종자쯤 되는 듯했어요. 반장 그룹은 마치 예수와 열두 제자처럼 그 놀이를 반 다른 아이들에게 전파해 나갔어요.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모든 반 아이들은 반장의 사이비 종교 놀이에 심취해버렸습니다. 그 와중에도 그룹이 없는 저는 소외되었지만요.
쉬는 시간이면 모두 반장 자리로 몰려가서 그녀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어요. 반장의 목소리는 작고 빨라서 제 자리에선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모인 아이들은 하나 같이 멍한 얼굴로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그저 새로운 환경에서 서로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놀이를 만들었구나 생각했는데, 갈 수록 반 자체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말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반장이 갑자기 방과 후에 모두 집합하라고 하더군요.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저는 정말로 그대로 믿었어요. 곧 치뤄질 중간고사에 대비한 특별 강습이나 족보라도 있는 걸까 기대까지 하면서요. 아무래도 걔는 일단 반장이었으니까요.
반장이 지정한 장소는 학교 옆 건물의 4층에 있는 작은 컴퓨터 학원 강의실이었습니다. 좁은 복도를 줄지어 가는 아이들 표정엔 생기가 없어 어딘가 꺼림칙했죠. 전 평소 습관처럼 교탁과 가장 가까운 앞자리에 앉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장은 단상에 올라가 연설을 시작했어요. 설정놀이에 참여하지 못한 저로선 연설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이것은 정해진 운명이고, 거역할 수 없는 순리야."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반장은 단상에서 내려왔고, 반장 그룹 아이들이 도시락을 나눠주기 시작했어요. 오므라이스와 된장국이었어요. 맛은 없었답니다. 사실 전 오므라이스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부드러운 계란 지단과 잘 볶은 밥알의 조화는 안정적이잖아요. 문득 어머니가 해주시는 오므라이스가 먹고 싶어졌어요.
그 때였어요.
"그대로 움직이지 마."
억양 없는 무미건조한 반장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반장은 권총을 쥐고 있었고, 총구는 제 관자놀이를 향해 있었습니다.
"일렬로 맞춰야 하거든."
찰칵하고 잠금 장치를 푸는 반장의 눈빛은 진심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여고생이 총을 대체 어디서 구했냐든지, 일렬로 맞춰도 대여섯 명을 한 번에 죽일 순 없을 거라든지 하는 이성적인 생각은 그 당시엔 나지 않았어요. 당장 눈 앞에서 진짜 총을 보면 그저 살고 싶단 생각 밖에 안 들더라고요. 대체 왜 이 미친 짓거리를 하는지 그딴 것도 하나도 안 궁금하더라고요. 죽게 생겼다니까요, 정말.
저는 나름대로 기지를 발휘해서 힘껏 밝은 목소리로 소리 질렀어요.
"생애 마지막 식사라면 좀 더 맛있게 먹고 싶어! 난 울 엄마 오므라이스가 좋단 말야!"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실 안을 둘러보며 입에서 나오는대로 아무 말이나 계속 떠들어댔어요. 시험이 얼마 안 남았는데 여기서 이러지 말고 공부하러 가자는 둥, 오늘 모임에 담임 선생님은 안 오시냐는 둥, 그나저나 오므라이스 정말 맛없지 않냐? 그치이-? 난동을 피워서 이 상황을 중단시키고 싶었거든요. 반장과 그룹 애들은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딱히 저를 강제로 자리에 앉히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더 소름 끼쳤던 건 반 아이들의 태도였어요. 걔들은 소란 따위야 어떻게 되든 알 바 없다는 양, 그저 죽기만 하면 뭐가 어쨌든 상관 없다는 듯한 얼굴로 저를 일제히 쳐다보고 있었어요. 그 흐리멍텅한 눈동자를 보니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 계속 있다간 저까지 미칠 것만 같았어요.
"그럼 나 집에서 오므라이스 먹고 올게!!"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악을 쓰고 강의실 밖을 향해 전력질주 했습니다. 엘레베이터를 기다릴 여유조차 없어 계단을 세 칸씩 뛰어 내려가고 있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반장의 오른팔인 연주였어요. 연주는 긴 생머리를 나부끼며 긴 다리로 성큼성큼 저를 쫓아왔습니다. 저도 죽을 힘을 다해 건물을 벗어나 횡단보도를 건너려던 참이었어요. 갑자기 연주가 추격을 멈추고 주춤거리고 있었어요. 연주의 시선을 따라가니 거기엔 덩치가 무척 큰, 다른 학교의 여자 일진 패거리가 있었습니다. 연주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데, 패거리들은 히죽히죽 웃으며 걔한테 말을 걸었어요.
"얼굴 보기 힘들다, 황연주?"
마치 닭 쫓던 개가 호랑이라도 만난 것처럼, 연주는 창백한 얼굴로 덜덜 떨며 우물거렸어요.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 당시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저는 연주에게로 다가가 친근한 척 손목을 붙잡았어요.
"연주야, 뭐해? 어서 가자. 쟤들은 네 친구들이야?"
양아치들은 위아래로 저를 째려보더니,
"씨이발… 존나 꼰지르게 생긴 년이네."
하고는 저희 앞에 침을 퉤 뱉고는 다른 방향으로 가버렸어요. 연주는 다리가 풀린 건지 휘청거리며 이쪽으로 기대었고, 전 그걸 놓치지 않고 물었습니다.
"너, 사실 죽고 싶지 않지?"
정곡이라도 찔린 모양입니다. 연주의 어깨가 움찔했어요.
"아까 학원에서 너만 유일하게 눈빛이 살아있었거든. 반장이랑 다른 애들은 다 뭐라도 홀린 애들마냥 넋이 나가있었는데… 넌 아니었어."
"……"
"그리고 방금도 연주 너 쟤들한테 겁먹고 도망치고 싶었던 거잖아. 살고 싶은 거지? 아직 사는 데 미련이 남은 거지, 그렇지?"
연주는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어금니를 꽉 깨물고 낮게 으르렁거렸어요.
"우리는 운명을 거스를 수 없어. 죽어야만 해. 그게 순리고 정해진 일이야."
그 말은 저에게 하는 것이라기보단 꼭 그녀 자신에게 되새기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치만 전 그게 무슨 뜻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걔네들의 사이비 종교 놀이에 동참한 적 없었으니까요. 지금도 어떻게 아이들이 그 미친 짓에 감화되고 동조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안되요.
"대체 우리가 왜 죽어야만 하는 건데? 그게 왜 운명이야?"
연주는 눈을 내리깔고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어요.
"그렇게 정해진 거니까…"
그 아이의 자신 없는 태도를 보니 아직 희망은 있는 것 같았어요. 저는 틈새를 파고 들며 더 강하게 몰아붙였어요.
"사실 난 중학생 때부터 심하게 우울증을 앓았어. 그리고 성격장애도 있어서 사람도 잘 못 사귀고… 매일매일 자살할 궁리만 했었지. 사는 게 괴로웠거든. 그러다가 정신과에 다니면서 상담 치료를 시작했어. 처음엔 힘들었지만 점차 상담 선생님 얘길 듣고 여러 모로 깨달음을 얻어서 이젠 버틸 수 있게 됐어. 덕분에 지금은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어. 살아서 하고 싶은 게 많아."
여기까지 얘기했을 때 이미 연주의 경계심이나 완강함은 거의 녹아 있었어요.
"너도 힘든 일이 있으면 얘기해줘. 내가 들어줄게. 응?"
연주는 결심이 선 듯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자기 얘길 하기 시작했어요. 내용이 뭐였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땐 정말 진지하게 듣고 열심히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었어요. 119에 신고해야 한다고 연주를 설득했습니다. 너처럼 아직 살고 싶은 애들이 더 있을 거라고. 신호음이 울리는 사이가 마치 천 년 같이 길게 느껴졌어요. 소방관 아저씨가 전화를 받았고, 저는 일단 건물 위치부터 얘기했어요. 난데없이 여고생이 총을 들고 설친다는 얘길하면 믿어줄 것 같지 않았거든요. 여긴 미국이 아닌 한국이잖아요.
그런데 옆에 선 연주의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았습니다. 불안감과 죄책감 같은 오묘한 표정으로 울기 일보 직전이었어요. 그 순간 제 머릿속엔 탈북자가 떠올랐어요. 남한을 옹호하면서도 내일 아침이면 다시 북한으로 끌려가 아오지 탄광이나 요덕 수용소에 쳐박히진 않을까 하는…
"연주야, 거기 학원 이름이 뭔지 알…"
그 아이는 제 휴대폰을 날카롭게 채가더니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저는 당황함보다 분노가 앞서서 쏘아붙였어요.
"뭔데 너? 그런다고 출동 안하는 거 아니거든? 이렇게 막무가내로 끊어버리면 오히려 위기 상황인 줄 알고 더 빨리 올걸?"
"이미…"
푹 숙인 고개를 든 연주는 그새 다른 아이들처럼 생기를 잃은 얼굴이 되어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상관 없어."
그리곤 다시 학원 건물을 향해 뛰어들어 가 버렸습니다.
망연자실해진 저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그저 학원이 있는 건물 4층을 쳐다보고 있었어요.
이윽고 몇 발의 총성이 울렸습니다.
오늘 이런 내용의 꿈을 꾸었어요!
굉장히 자세해서 더 묘한 느낌이 드는 내용이었습니다.
죽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반장 그룹이 만든 교리가 무엇인지
그런 건 맥거핀처럼 전혀 나오질 않더라고요ㄷㄷㄷ
(저도 한국 사람이라 그게 제일 굼금ㅋㅋㅋ;;)
공게에 그냥 꿈 얘길 올리면 안 되는 거 같기에...
소설 형식으로 약간 각색해서 써보았는데 이건 괜찮나요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