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 즐거운 일이 있을 땐 세상이 희극처럼 느껴진다.</div> <div>선엽도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황홀감에 빠져있었다.</div> <div> </div> <div>" 하하하 "</div> <div> </div> <div>계속 웃음이 나왔다. 드디어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div> <div> </div> <div>- '지선엽 씨인가요, 보내주신 시놉시스 읽어봤는데 아주 참신했어요, 혹시 써놓은 원고가 있다면</div> <div>한 번 보여주시겠어요,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div> <div> </div> <div>보여주기만 한다면야 자신있지, 손에 들린 서류봉투가 그 자신감만큼이나 두툼했다.</div> <div>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div> <div> </div> <div>'처음이라 계약금 같은 건 기대 못 하겠지만 인세를 받는다면, 하하..'</div> <div> </div> <div> 자신을 남들에게 '소설가'로 소개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선엽은 발걸음을 서둘렀다.</div> <div>어서 출판사에 가서 담당자에게 원고를 전달하고 싶었다.</div> <div>3류 대필작가로 남의 펑크나 막아주던 프리랜서 글쟁이 생활은 청산이다,</div> <div>선엽은 씨익 웃었다. </div> <div>늘 멍청한 표정으로 거니던 이 빌딩숲이 오늘은 선엽 자신을 위해 세워진 궁전처럼 느껴졌다.</div> <div> </div> <div align="center">ㅡ</div> <div align="center"> </div> <div align="left">" 독특해요, 문체가 흡입력이 있는걸요, 소재도 발상도 뛰어나요. </div> <div align="left">꼭 이렇게 글을 분석하고 말고를 떠나서, 무엇보다도 재밌어요. 다음 편이 궁금해지네요.</div> <div align="left">지선엽 씨, 출판합시다. 이 원고 받아둬도 되겠죠.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아..! "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선엽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통과되다니,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이 출판사의 시험을 통과하다니,</div> <div align="left">하지만 원고는 줄 수 없었다. 자필로 써온 원고는 사본이 아니었다. </div> <div align="left">아이, 한시가 급한데 미리 좀 뽑아놓을걸.. 마음 속으로 자신에게 핀잔을 주며 선엽은 머리를 긁적였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저어.. 이게 복사본이 아니라서요, 저도 다음 원고를 써야하다보니 좀 필요할 것 같은데,</div> <div align="left">이거 얼른 복사집에 가서 복사해올게요. 죄송합니다.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준비성이 철저하지 못 했다고 느낀 선엽의 걱정과 달리  원고를 읽어본 직원은 별 나쁜 감정이 없어보였다.</div> <div> </div> <div>" 네. 그러시죠. 어차피 근무시간 중이고하니, 퇴근시간 전까지만 가져다주세요. "</div> <div> </div> <div>"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div> <div> </div> <div>선엽은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를 몇 번씩이나 하곤, 허겁지겁 서류를 챙겨 발걸음을 서둘렀다.</div> <div>출판사를 빠져나가는 선엽의 발걸음을 직원의 부름이 붙잡았다.</div> <div> </div> <div>" 선엽 씨! "</div> <div> </div> <div>" 예? "</div> <div> </div> <div>" 그 원고 중간에 반전, 완전 대박이었어요. 요즘 작품 하나 건지기 어려운데, 보물을 찾은 느낌이에요. "</div> <div> </div> <div>직원의 치켜든 엄지손가락이 선엽의 마음도 한껏 띄워놓았다.</div> <div> </div> <div align="center">ㅡ</div> <div align="center"> </div> <div align="left">복사집, 복사집, 배터리는 또 왜 이렇게 없어,</div> <div align="left">하여간 스마트폰 배터리는 빨리 닳아서 탈이야..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충전이 필요하다는 스마트폰 알림창을 신경질적으로 끄고 선엽은 지도 앱을 자꾸 살폈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분명 이 주변이라는데..'</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젊은이.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미치겠네, 빨리 뽑아서 갖다드려야 할텐데. 기다리게 할수록 손해인데.. </div> <div align="left">해준다고 할 때 빨리 매듭을 지어야 뒷통수를 안 맞지..'</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학생! "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앗, 아.. 네. 왜 그러세요, 할아버지.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좀 도와줘.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선엽은 초조하게 인쇄할만한 곳을 찾고 있다가 낯선 할아버지가 부르는 통에 생각을 잠시 멈췄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뭘 도와드리면 되나요? "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바쁠텐데 참 미안해.. 별게 아니고.. 이 쌀을 마트에서 샀는데.. 도무지 집까지 들고가기가 쉽지가 않아.</div> <div align="left">젊은 자네가 들어주면 금방일텐데, 우리 집이 여기서 좀 떨어져있어.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왠만해선 바쁜 자기 일부터 처리하고 싶었지만 선엽은 할아버지의 작은 부탁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div> <div align="left">지긋하신 나이에 딱 봐도 허리가 편찮아보이시는게 돌아가신 자기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어-.. 저.. 제가요..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그 순간 선엽의 전화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div> <div align="left">출판사잖아, 선엽은 황급히 받았다.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네! 지선엽입니다.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아 선엽씨, 아까 원고 검토한 직원입니다. 급하게 출장갈 일이 생겨서요, 오늘 원고는 못 받겠고</div> <div align="left">천천히 준비해두셨다가 한꺼번에 주세요. 혹시 이메일로 보내주시면 더 좋겠는데, 글을 손으로 쓰시나보죠?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아, 텍스트로도 준비할 수 있어요.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네에, 잘 알겠습니다. 아무튼 오늘은 안 되겠어요, 제가 안 되네요. 저희 출판사는 한 번 작가하고</div> <div align="left">약속했으면 지킵니다. 염려 마시고 작품에만 몰두해주세요. 제 업계 경력을 걸고 꼭 출판시켜드립니다. 수고하세요.</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휴, 선엽은 안심이 되는 동시에 뿌듯한 마음이 차올랐다.</div> <div align="left">다시 세상이 아름다워보였고, 거리가 먼 집까지 쌀포대를 들어다달라는 처음 보는 할아버지의 부탁도</div> <div align="left">자기가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당연히 해드려야 할 일로 여겨졌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할아버지! 가시죠! 들어드릴게요!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참 고마워.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선엽은 어깨에 맨 가방 안에 원고가 든 봉투를 조심스레 집어넣고 단단히 잠궜다.</div> <div align="left">쌀을 집어들자 무게가 제법 무거웠지만 지금이라면 냉장고도 들어줬을 것 같다.</div> <div align="left">두 사람이 지나가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흐뭇하게 쳐다봤다. </div> <div align="left">아직 살만한 세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center">ㅡ</div> <div align="center"> </div> <div align="left">" 어디 놓으면 되죠?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잠시 기다려줘, 문 좀 열고.. 우리 집 부엌까지만 좀 갖다주게.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헉헉. 네에.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이렇게나 멀 줄이야, 선엽은 오면서 몇 번을 후회했다. </div> <div align="left">하지만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끝까지 책임을 다 하겠다는 생각에 선엽은 최선을 다 했다.</div> <div align="left">열쇠 소리가 찰칵찰칵거리다 문이 열렸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들어오게!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네. 실례하겠습니다..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선엽의 머리가 닿을만한 높이의 문이었다.</div> <div align="left">허리를 숙여가며 집안으로 들어섰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뭐야, 집안이 왜 이래.'</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선엽은 순간 의아함에 머리가 띵해졌다.</div> <div align="left">밖에서 볼 땐 평범한 주택이었는데, 들어서자 하나의 큰 방과 주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div> <div align="left">거기까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지만 큰 방이 문제였다.</div> <div align="left">사람 살고 자고, 거실이었다가 침실이었다가, 한 마디로 모든 역할을 하는 게 원룸이겠지만</div> <div align="left">이 집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넓은 방의 바닥에 맨홀이 몇 개씩이나 박혀있었다.</div> <div align="left">하나, 둘, 셋, 넷.. 다섯.. 뭐야, 집에 아무 것도 없고 이게 뭐야.</div> <div align="left">TV도 없고, 책상도 가구도 아무 것도 없으면서 사람 산다는 집 바닥에 맨홀이 왜 이렇게 많아.</div> <div align="left">선엽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부엌에다 놔주게, 커피 한 잔 마시고 가..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할아버지는 부엌에서 커피잔을 데우고 있었다.</div> <div align="left">믹스커피는 지금 막 봉지를 뜯고 있었다. 수면제 같은 걸 타는 건 아닌 것 같다고, </div> <div align="left">선엽은 커피 정도는 마셔도 되겠지, 생각했다.</div> <div align="left">일단 너무 더워서 좀 숨이라도 골라야 할 것 같았다.</div> <div align="left">쌀포대를 부엌 구석에 내려놓았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휴우, 할아버지 혼자였으면 정말 힘드셨겠어요.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정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자네에게 더 고마워. 저기 앉아있게.. 커피 다 탔어. 가세.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네. 근데, 이 집.. 사시는 집이에요?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쌀 갖다놓는 거 보면 모르겠나, 사람 먹고 살지.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아무 것도 없는데요?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그거야 냉장고 하나 있고 불 들어오면 끝이지.. 텔레비전이니, 소파니, 그런게 왜 필요해.</div> <div align="left">텔레비전 안 보면 그만이고, 바닥에서 자면 그만이지. 옛날 사람들 다 그렇게 살았어.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듣고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div> <div align="left">맨홀에 대해서 물어볼까, 하며 커피를 후룩 마시는데 할아버지가 먼저 말을 걸었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아까 자네, 길에서 뭔가 들고 있던데. 이력서인가? "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이력서? 평범한 취준생처럼 보이시나봐, 난 예비 작가라고.</div> <div align="left">그냥 '네, 그런거에요' 해도 될텐데 우쭐한 마음에 선엽은 설레발을 치며 대답했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아뇨. 제 소설 원고에요. 제가 소설가가 될거거든요. 실은 출판 결정이 나서요.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아.. 길에서 전화를 받던데, 그 전화였나보구만. 대단허이.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하하.. 대단하지도 않아요. 책을 쓴다고 잘 팔리는 것도 아니니까요.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자네 같은 청년 잘 없네. 여기까지 와준 것도 그걸 말해주는거야.. 혹시 원고 읽어봐도 되겠나.</div> <div align="left">왠지 자네라면 아주 재밌는 글을 썼을 것 같네..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음, 네. 잠시만요.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보여드릴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막상 생각해보니 출판사 외의 사람에게 이 원고를 보여주는 건 처음이었다.</div> <div align="left">평범한 사람들이 독자이니만큼, 평범한 독자의 눈으로 본 작품은 어떨까, 선엽은 할아버지의 평가가 궁금해져서</div> <div align="left">가방에서 원고를 꺼내 건네었다.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고맙네..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그냥 길에서 만난 할아버지일 뿐인데, 원고를 열심히 읽고 계시니 공모전의 심사위원 앞에라도 선 것처럼</div> <div align="left">선엽은 이상하게 긴장이 되었다. 아랫배가 슬슬 아팠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저, 화장실은 어디에요? 여긴 안 보이는데.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응, 여기서 나가서 저기로 좀 돌아가봐. 화장실이 따로 있어.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네. 실례하겠습니다.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일단 화장실이 급하니까 이것부터 해결한 다음에, 할아버지 원고평만 들으면 바로 집에 가야지,</div> <div align="left">어쨌든 착한 일도 했고 원고도 통과됬으니까 오늘 하루는 최고야,</div> <div align="left">선엽은 배를 감싸쥐며 화장실을 찾아 집 밖으로 나갔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center">ㅡ</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선엽이 용무를 마치고 다시 집으로 들어서자, 황당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div> <div align="left">할아버지와 원고는 온데간데 없고, 맨홀 뚜껑 다섯 개가 다 열려있었다.</div> <div align="left">시꺼먼 구멍이 집안 곳곳에 숭숭 뚫려있는게 몹시 기괴했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할아버지!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선엽은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div> <div align="left">그 원고가 어떤 원고인데, 아.. 진작에 그냥 집에 돌아갈걸, 내가 미쳤지,</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할아버지! 어디 계세요! 원고 돌려주세요! "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그러자 가장 먼 쪽에 있는 맨홀에서 할아버지가 얼굴을 쑥 내밀었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원고 재밌더구만. 내가 좀 더 읽고 주고싶어졌어. "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장난치지말고 빨리 주세요.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언제 안 준다고 했는가. 조금만 더 읽게 해줘. 재밌더라고.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아 진짜 열받게 하네, 달라고!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너무 화가 나서 말이 짧아졌다, 선엽이 맨홀로 다가갔지만 중간에 큰 맨홀 두 개가 열려있어</div> <div align="left">그걸 피하며 달려가자 가장 먼 맨홀로 다시 들어간 할아버지가 뚜껑을 이미 닫으며 들어간 채였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손잡이가 어디지,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손잡이가 없었다. 이걸 어떻게 연거야, 흥분에 차오른 선엽이 씩씩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div> <div align="left">바닥에 널부러진 쇠작대기가 보였다. 이걸로 연거구나,</div> <div align="left">선엽이 쇠작대기를 사용해 할아버지가 들어간 맨홀 뚜껑을 거칠게 열었다.</div> <div align="left">헉,헉, 어디로 갔어, 망할..</div> <div align="left">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만한 터널은 깊이가 2m를 훌쩍 넘는 것 같았다.</div> <div align="left">사람이 밟고 내려갈 수 있도록 작은 손잡이가 달려있었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선엽은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바닥에 도착하자 물곰팡이 냄새와 함께 뜨거운 습기가 훅 올라왔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헉, 헉, 씨발. 내 원고 돌려줘!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선엽의 목소리가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하고 울렸다.</div> <div align="left">음파가 벽에 부딪치고 반사되며, '돌려줘'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사방에서 들렸다.</div> <div align="left">이 안은.. 미로인 것일까.</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어딨어! 원고 돌려달라고, 당장 나와.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선엽은 일단 막힌 벽의 반대쪽, 유일하게 전진할 수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center">ㅡ</div> <div align="center"> </div> <div align="left">" 제발, 원고 돌려주세요... 저 그거 없으면 안 돼요.. 할아버지..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선엽은 폐쇄된 공간에서의 공포로 울고 있었다.</div> <div align="left">안 그래도 없던 스마트폰 배터리는 이미 손전등 앱을 쓰다가 다 닳아버려서 전원이 나간지 오래였다.</div> <div align="left">그나마 어둠에 적응한 눈이 한치 앞은 분간할 수 있게 해줬지만, 그 지경에 이르고나니 선엽은 깨달았다.</div> <div align="left">이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자기 자신을.</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할아버지.. 할아버지.. 살려주세요..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결국 선엽은 '원고를 받아야 한다'는 목적이 완전히 바뀌어, '살아야 한다'는 목적만이 남았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원고 가지세요.. 그냥 나가게만 해주세요..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또옥, 똑, 똑, 물 떨어지는 소리 속에 선엽이 흐느끼는 소리가 터널 속에서 이리저리 반사되어 </div> <div align="left">몇 배는 크게 울려퍼졌다.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한 발 앞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div> <div align="left">뜨거운 습기가 자신을 둘러싸고, 자신의 심장이 뛰는게 느껴졌다.</div> <div align="left">울고 있는 자신의 목소리가 터널 안을 울리며 자기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div> <div align="left">무서워, 살고 싶어, 마음 속으로 하는 소리마저 귀에 환청으로 들렸다.</div> <div align="left">폐쇄된 공간에 완전히 갇혀가고 있었다.</div> <div align="left">이미 방향감각이 마비되어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었고,</div> <div align="left">심지어 터널은 언제부턴가 조금씩 천장이 줄어들고 있었다.</div> <div align="left">지금 선엽은 허리를 구부린 채로 걷고 있었다.</div> <div align="left">원고 따위는 잊은지 오래였다.</div> <div align="left">공포에 휩싸여 울면서 점점 좁아드는 터널을 헤매고 있는 가련한 목숨 하나.</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center">ㅡ</div> <div align="center"> </div> <div align="left">" 으으으흐, 으흐흐.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우는 걸까? 웃는 걸까? 아니면 그냥 실성해버린걸까?</div> <div align="left">선엽은 괴상한 소리를 흘리며 바닥을 이리저리 짚으며 앞으로 가고 있었다.</div> <div align="left">이번에 들어가기 시작한 터널은 줄어들고, 좁아지는 굴곡이 더욱 심했다.</div> <div align="left">선엽은 이제 허리를 펴긴 커녕 양반다리를 하고 앉을수도 없어 낮은 포복으로</div> <div align="left">기어들어가고 있었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선엽 자신도 이 터널이 위험하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div> <div align="left">이 터널의 입구에서부터, 자신이 쓴 원고가 한 장, 한 장씩 떨어져있었다.</div> <div align="left">자신의 노력, 눈물, 희망이 모두 담긴 원고였다.</div> <div align="left">그 감정.</div> <div align="left">공포에 울면서,</div> <div align="left">희열에 웃으면서,</div> <div align="left">폐쇄 속에 분열되어가는 자아 속에서,</div> <div align="left">선엽은 흐흐흐, 어둠 속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가고 있었다.</div> <div align="left">57페이지.. 58페이지.. 59페이지..</div> <div align="left">그럴수록 터널이 자신을 죄어들어왔다.</div> <div align="left">이미 원고는 터널 내의 뜨거운 증기로 인해 펜얼룩이 번져 알아볼 수 조차 없었지만 </div> <div align="left">선엽은 상관없었다.</div> <div align="left">눈물과 어둠, 그리고 공포가 번져있는 눈동자엔 현실과 이성이 비집고 들어올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div> <div align="left">오로지 원고를 찾고 있다는 것과 살고 싶다는 두 목적 때문에 이 동물은 미친 현실 속에 살아있었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center">ㅡ</div> <div align="center"> </div> <div align="left">299페이지.. 300페이지..</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헤, 헤헤헤, 헤헤헤헤 ! "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다 찾았어, 이제 된거야, 이제 된거야, 다 찾았다, 하하하, 하하하!!</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찾.. 찾았다, 으헤헤, 으헤헤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축하하네.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눈물이 멎으며 선엽이 촉각을 곤두세웠다. </div> <div align="left">마치 야생의 동물처럼 재빠른 반응이었다.</div> <div align="left">인간으로서의 자아가 희미해지자 깨어난 짐승의 본능.</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약속했잖는가. 원고는 돌려줄거라고.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 나가게 해줘,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그건 약속 못 하겠는데.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나가게 해줘! "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선엽이 울부짖으며 바닥을 박박 기어 앞으로 다가가려하자,</div> <div align="left">갑작스레 엄청난 불빛이 퍼져서 선엽은 꼼짝도 못 하고 두 눈을 막았다.</div> <div align="left">눈이 아프고 정신이 아찔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거야,</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헉헉, 그러자 엄청나게 넓은 지하 공장이 눈에 들어왔다.</div> <div align="left">그 뒤에 알게 된 건 쇠창살이 있는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가는 크기의 철제 케이지에</div> <div align="left">쏙 들어간 채로 덩그러니 종이 뭉치를 들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다.</div> <div align="left">어떻게 된거야, 어떻게 된거지,</div> <div align="left">그제야 선엽은 자기가 되돌아온 길을 돌아보았다.</div> <div align="left">이럴수가.. 터널은 30m 뒤에서 끝나있었다.</div> <div align="left">갈수록 줄어드는 터널 속에서 시간과 공간 개념없이 오로지 코 앞의 원고만을</div> <div align="left">줍다보니 터널이 끝난지도 모르고 낮은 포복으로 바닥을 기어 자기 스스로 이 케이지 안에</div> <div align="left">갇혀버린 것이었다.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으아아악!!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어둠이 걷혔지만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div> <div align="left">오히려 현실이 뭔지조차 알 수 없었던 그동안의 칠흑 같은 어둠이 더 희망적인 편이었겠지.</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원고, 재밌었네. 중간에 반전 예상 못 했어. 자네 소질 있더라고. 아마 그대로 집에 갔더라면</div> <div align="left">훌륭한 소설가 하나가 나왔을지 모르겠군.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헉, 헉, 헉,</div> <div align="left">기대하던 독자의 첫 반응이 호평이었지만 지금 선엽의 귀에 그딴게 들어올 리 없었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제발, 살려주세요.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하지만 그런 반전을 머릿속으로 구상한 자네도 이런 반전은 예상 밖이지?</div> <div align="left">소설보다 재밌지?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여기 뭐에요, 저한테 왜 이러세요.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어때, 찾고 싶던 보물을 다 찾은 기분은.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나 좀 보내달라구요!! 살려달라고요!!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자네 참 이기적이구만.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쇠창살을 흔들며 울부짖는 선엽을 뒤로 한 채, 노인은 천천히 벽에 다가가 알 수 없는 기체가 들어가있는 탱크의</div> <div align="left">마개를 돌려 열었다. 탱크에 연결되어있는 호스의 깔때기 끝에서 기체가 푸슉, 푸슉, 새어나오는 소리가 들렸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으아악, 흐아아악, 흐ㅡ읍..읍.. "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잠시 뒤 공포에 눈이 희번덕 뒤집어진 선엽의 코와 입을 깔때기가 틀어막았다.</div> <div align="left">선엽의 돌아간 검은자가 다시는 제자리를 찾지 못 했다.</div> <div align="left">그러나 아직 숨이 끊긴 건 아닌 모양으로, 정신만 잃어버린 듯 스스로 호흡은 하고 있었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그 모습을 몹시 뿌듯하게 바라보던 노인의 독백이 이어졌다.</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이렇게 건강한 성인 남자 구하기가 제일 어려운데, 보물을 찾은 느낌인걸.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left"> </div> <div align="center"><strong>환상괴담, '보물찾기' 끝</strong></div> <div align="center"><strong>괴담의 중심 The Epitaph</strong></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