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오베에서 '유시민의 글 잘쓰는 방법'을 보다보니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서 써봅니다.
벌써 2년 전 일이네요.
프로메테우스를 보러 극장에 갔습니다. 혼자.
저는 영화 시작 전에 틀어주는 광고 보는 걸 안좋아해서 가급적 영화 시작 시간에 딱 맞게 상영관으로 들어가곤 하는데요,
그 날도 그렇게 영화 시간을 기다리며 극장 안을 어슬렁 거리고 있었습니다.
흑인 네 명이 눈에 띄더군요.
남자 둘 여자 둘, 나이는 잘은 모르겠지만 서른은 안 되어 보였는데, 옷차림이 좀 뭐랄까,, 어? 응~ 뭐,,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그 때가 6월말 쯤이었거든요.
다들 반바지에 반팔티 차림인데 걔네들은 잠바까지 입고 있어서, '어이구 덥지도 않나.. 안더우니까 저렇게 입었겠지..' 혼자 속으로 그랬죠.
뭐 그러거나 말거나,, 저는 화장실에 들렀다가 상영관으로 들어갔습니다.
예매할 때 지정해 둔 한가운데 자리를 찾아 갔는데, 그 뒷자리에 아까 흑인 네 명이 쭈르르 앉아 있더군요.
'엥? 이거 보러 온거였나?' 라고 생각하며 제 자리에 앉았습니다.
------------------스크린----------------
저
남녀남녀
이렇게 앉았습니다.
전체 관객수는 100여명 정도 되는 것 같았구요.
광고가 또 나오더군요.. 젠장..
소녀시대 중 몇 명이 나와서 어색한 영어를 자꾸 반복하길래 '뭔 광고가 저따위냐' 하고 있던 차에 뒷자리에서 웃음이 터져나왔습니다.
'내가 봐도 어색한데 쟤들이 보기엔 더 가관이었겠지', '그나저나 쟤들은 자막 안읽어도 되니까 편해서 좋겠다'
이런 생각들을 하는데 영화가 시작되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초반부에 ~ology 같은 학술적인 용어들이 여러번 나옵니다.
생명의 기원을 찾아 탐사를 떠나게 되는 이론적 배경을 설명하는 장면이라 그런데요,
갑자기 오래 전에 본 미국 각 직업군별 어휘력에 관한 기사가 생각나면서, '뒤에 앉은 애들이 이 말들을 다 알아들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겁니다.
기사 내용은 기자, 작가, 변호사 등이 제일 어휘력이 풍부하고, 단순 노무직으로 갈수록 사용하는 어휘가 적어진다는 뭐 그런 거였는데,
그 흑인들이 그래보였거든요..
하지만 그런 상념도 잠깐, 지금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님을 깨달은 저는 자막과 화면을 정신없이 번갈아보며 영화에 빠져들어갔습니다.
일이 시작된 건 프로메테우스호 안에서 탑승자들끼리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에서였는데요, 풋~ 하고 살짝 웃음이 나오는 장면이었습니다.
극장 여기저기서 웃음 소리가 들렸는데, 뒷자리는 조용~하더군요.
유머코드가 다를 수도 있고, 원래 대사는 안웃기는데 번역을 웃기게 한 걸수도 있고,, 해서 그냥 지나갔는데 계속해서 엇박자가 나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웃는데 뒷자리는 조용하고, 아무도 안 웃는데 뒷자리에서만 웃음이 터져나오고,, 이렇게요.
근데 이 영화는 뒤로 갈수록 웃을 거리가 없어지는 영홥니다.
그런데요, 뒷자리에선 수시로 웃음소리가 나더라고요...
'아니, 이게 도대체 뭐지?? 이게 무슨 현상이야??'
이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이것들..'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에이 설마 아니겠지' 하고 넘겼습니다.
영화가 아주 재밌었기 땜에 저는 또 쉽게 영화에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만, 몇 분 후 다시 들려온 뒷자리 웃음소리에 저는 다시금 극장 안에 앉아있는 현실의 나로 돌아와야 했는데, 그와 동시에 저는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웃음이 터져나올 때 보통은 'ㅍ' 이나 'ㅎ' 소리가 먼저 나오죠.
근데 이 사람들의 웃음은 '움'으로 시작하더군요.
움훠훠훠...(실제로 저렇게 웃었음)
'움~' 하면서 먼저 뱃속의 소리를 끌어올린 다음에 흑인들 특유의 탁하고 굵은 저음으로 '훠훠훠' 하고 내뱉는 겁니다.
그러니까 얘네들은, 우스워서 웃고 있는게 아니라 웃음소리를 만들어내고 있던 거였습니다.
게다가,
'움~' 하면서 서로 호흡을 맞춘 다음 동시에 일사불란하게 '훠'를 내뱉는 걸 보면, 이게 하루이틀 장사한 게 아닌 것 같더라구요..
나중으로 갈수록 얘네들의 움훠는 몇가지 규칙성마저 띠게 되었는데,
첫째, 남자들만 웃는다.(흑형들만 계속 웃고 흑매들은 빠짐)
둘째, 등장인물 중 흑인이 말할 때만 웃는다.(흑인 함장이 무슨 말이든 했다 하면 웃음. 다른 사람 말에는 안웃음)
셋째, 훠는 딱 세 번만 한다.(훠훠훠훠도 아니고 훠훠도 아니고 훠훠훠 이렇게만)
..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혹시 이런 거 관찰하느라 영화는 보지도 못한 것 아니냐 하실지 몰라 미리 말씀드리지만, 영화 감상에는 거의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앞에도 말했다시피 영화가 아주 재밌었거든요.
그리고 이건 영화를 다 본 다음에 돌이켜 정리해보니 그랬었다는 거구요.
실제로 방해가 됐던 건 내 뒤에 앉은 흑형이 발을 건들거리며 제 의자를 툭툭 찬 것 정도였는데,
두 번째로 의자를 차던 순간, 제가 분노를 담아서 팔꿈치로 등받이를 쿵쿵 쳤더니 그 담부턴 얌전해 지더라구요.
하지만, 전혀 우습지도 않고 오히려 진지한 장면인데도 흑인 함장이 뭐라 말만 하면 여지없이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움훠훠훠...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저로서는 참,, 답답하긴 하더군요. 한동안은 얘들이 왜 웃는지를 몰랐으니까 말이죠.
사람들의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심각한 상황인데 흑인이 말만 하면 움훠훠훠..
그러다 나중엔 지들도 힘들었는지 '움' 소리가 점점 길어지더군요.
움~훠훠훠.. 우움~ 훠훠훠.. 심지어는, 우우움~~훠훠훠.. 까지....
그 때쯤엔 저도 '아, 얘들이 웃겨서 웃는 게 아니구나' 라고 깨달은 후라서 '얘들이 웃든말든 나는 영화나 보자' 모드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던 의문 하나는, '과연 얘들이 이 영화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을까' 였는데요,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끝부분이 다 되어서야 찾게 되었습니다.
흑인 함장이 외계인의 공격으로부터 지구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질 결심을 하고,
몇 명 안남은 승무원들과 함께 프로메테우스호를 조종해서 외계인의 우주선을 향해 돌진하여 장렬하게 폭사하던,,
왠지 자세를 바로하고 앉아야 할 것 같은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던 그 순간에 뒷자리에서 장엄하게 울려퍼지던 우움~훠훠훠..
...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던 이순신 장군의 기분이 이랬을까.. 싶던 그 때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이것들은 영화 내용을 전혀 이해못하고 있구나!'
'혹시,,' 했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죠..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웃음을 짜내야 했는지는, 글쎄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여자친구에게 무식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고, 그럴만한 무슨 이유가 있었겠죠.
영화가 끝나자마자 후다닥 나가더군요.
저는 영화의 여운을 즐기며 잠시 앉아 있다가 천천히 밖으로 나갔습니다.
매표소 앞, 아까 영화 보기 전에 서있던 그 자리에 또 모여 서있더군요.
아마도 다른 영화를 한 편 더 보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렇게 지나치다가 뭔가 위화감 같은 게 느껴져 눈길을 돌렸는데, 여자들 중 한 명은 그냥 까만 우리나라 사람이더군요.
'이게 도대체 뭔 조합이야??'라는 의문을 그 자리에 남겨둔 채 저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밤, 중딩 딸래미에게 영화관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줬습니다.
배를 움켜쥐고 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며 웃더군요.
특히, 심각한 상황인데도 흑인 함장이 뭐라 말만 하면 꿸꿸꿸.. 거리더란 대목에서는,
"어떻게 웃었다고?" 라고 여러번 리플레이를 시켜가며 숨 넘어가게 웃어대는 모습을 보노라니,
울 딸을 이렇게 웃겨줘서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를 해야 할 지,
그 따위로 영화 볼 거면 다시는 극장에 오지 마라.
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더라구요..
뭐, 극장에서 다시 본다면 반가움과 환영의 눈인사를 아낌없이 보내줄 것 같지만요...
제 이야기는 이게 끝입니다만, 오늘 이 얘기가 생각난 건 처음에 말했듯 '유시민의 글 잘쓰는 방법'이란 글을 보아서 였습니다.
당연히 그 흑형들을 비하하거나 매도할 생각은 전혀 없구요, 다만 유시민님의 "어휘력을 늘려야 생각의 폭도 넓어지고, 말도 글도 잘 구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려면 좋은 책을 읽어야 한다" 는 말에 완전 공감하다가 문득 떠오른 에피소드일 뿐이랍니다.
그러니 여러분,
좋은 책 많~이 읽읍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