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Sabaton - Nuclear Attack
1945년 8월 9일은 일본의 도시 나가사키에 세계 역사상 두번째로 핵무기가 사용된 날입니다.
이하 내용은 엔하위키에서 발췌.
4.1 여기가 아니다
팻 맨을 싣고 이륙한 B-29인 '복스카(Bockscar)'(기체번호 44-27297)는 에놀라 게이와 동일한 509 혼성그룹 393 폭격비행대대 소속으로 추가적인 원자폭탄 투하를 위해 후쿠오카현 코쿠라(小倉, 현 키타큐슈시 코쿠라키타 구, 코쿠라미나미 구)로 날아갔지만, 구름으로 인한 시계 불량으로 폭격을 할 수가 없었다. 제조하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며, 재고량도 없었던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것이므로 가급적이면 육안조준으로 정확하고 가장 피해가 크도록 폭격을 할 예정이었기에 폭격기는 기수를 돌렸지만, 나가사키 역시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연료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기에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고, 이대로라면 폭탄을 버리거나 레이더 조준으로 폭탄을 투하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30초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구름의 틈으로 나가사키 시가지가 보일 정도로 큰 맑은 구역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이 운명을 갈랐다.
그리고 나가사키에도 버섯구름이 피어 올랐지만, 그 피해는 히로시마보다 적었다.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고, 완전 평야지대인 히로시마에 비해 산지투성이라 폭심지에서 발생하는 열선과 폭풍이 산에 거의 다 막혀서 인명 피해가 히로시마의 4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대략 4만 명?). 게다가 조준이 어려웠기에 원래 노렸던 투하지점에서 4km 이상 빗나간 것도 겹쳐서 위력이 그만큼 줄어든 것이다. 팻 맨의 위력 자체는 리틀 보이보다 더 강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번에도 일본 군부는 원폭을 탑재한 복스카가 큐슈를 향해 접근 중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히로시마와 같은 V600번대 콜 사인을 사용하는 B-29가 출격했으며, 정보부에서는 그것이 원폭이라 판단하여 보고했지만, 당시 최상층부가 소련의 참전으로 인한 긴급회의 중이어서 무시되었다(…). 덕분에 이번에도 공습경보를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 폭격 이후, 미국은 소련 참전으로 인한 성과 파악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천명한 포츠담 선언 이행을 다시 한번 촉구하기 위해서 당분간 원폭 투하를 중지하게 되었다.
게다가 폭격하고 싶어도 폭탄이 없었다. 당시 플루토늄 폭탄용 폭축렌즈는
폭약설계담당자인 키샤코프스키가 한 땀 한 땀 수작업으로 만들고 있었고, 새 폭탄을 위한 플루토늄 추출은
진행 중이었으며, 플루토늄 폭탄의 필수품인 핵기폭기(베릴륨과 폴로늄)도 예비가 없었다. 우라늄 폭탄은 아예 3~4개월 이상 추가 농축작업을 해야 폭탄을 만들 수 있는데 생산시설에 기계적 문제가 생겨 생산중지 상태였다. 이 때문에 세 번째 폭탄은 플루토늄으로, 그나마도 빨라야 8월 20일에야 준비가 가능했다. 참고로 첫 핵폭격 후 10개월 뒤까지도 미국의 가용 원자폭탄은 7발에 머물렀으며, 플루토늄은 9발분 있었다. 22개월 뒤 시점에도 가용 폭탄은 13발에 불과했다.
4.2 일본의 두 번째 반응
일본 전쟁지도부인 대본영은 두 번째 공격과 소련의 참전을 당한 이후에야 비로소 항복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일본 전쟁지도부는 그제서야 항복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며, 소련은 자기 몫을 챙기기 위해 잽싸게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본 일본 대본영은 항복하기로 결정한다. 일단 학자들에 따라서 원폭과 소련 참전 중 과연 어느 것이 항복에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일단 다이쇼 이래로 제국의 절대 방위선인 북방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상황에 내지에서도 그러한 공격을 당하면 일단 국체보전
만이라도 한 상태에서 항복을 고려하는 건 당연한 일. 물론 이는
히로히토 덴노를 살려야 한다는 이유이지,
절대로 일반 국민들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항복내용은 1945년 8월 15일 정오, 이른바 '
옥음방송'이라 하는 덴노의 녹음된 목소리를 직접 방송하였다. 사람들은 덴노를 신적 존재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계기를 통해 방송되는 방식이라 라디오 음성은 깔끔하지 않았고, 또 내용이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면 알아듣기가 매우 힘든 일본어 문어 형식으로 되어 있어, 처음엔 이 방송을 하였을 때는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를 몰랐다고 한다. 그후 방송요원이 일상언어로 해석하여 후에 방송하여 드디어 항복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항복에도 반대자들은 극렬하게 저항했으며, 쿠데타를 일으켜 방송국을 점거하는 등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은 자들도 자결하거나
카미카제 공격에 참가하는 식으로 반항했고, 그 와중에서 항복선언이 발표되게 된다. 오죽하면 항복을 결정한 날이
일본의 가장 길었던 날이겠는가. 당시 필리핀에서 미군 포로생활을 하던 작가 오오카 쇼헤이는 소련의 관동군 공격과 스웨덴을 통한 일본의 항복 요구 타전을 발표한 8월 10일을
포로들에게 사실상의 전쟁이 끝난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의미심장하게도 10일부터 15일까지 죽은 사람들은 무의미하게 죽은 것이고 왜 요타전후 대국민 발표를 늦게 했는지 한탄하고 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전쟁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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