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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ID : lovestory_66256

작성자 : 장미의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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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 112.7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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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시간 : 2014/05/21 13:57:40

http://todayhumor.com/?lovestory_66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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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오후 한 시가 조금 넘은 시간, 전화벨이 울렸다. “여... 여보세요. 어? 고모. 잠깐 잤어... 점심 먹고 잠깐 잠든 거야. 집이지 뭐, 딱히 할 일도 없고. 그냥 있어... 알바? 무슨 일 하는 건데? 뭔지 말을 해줘야 결정을 하지. 오만 원 준다고? 지금부터 일하는 건데? 오... 진짜? 알겠어. 두시까지? 오케이. 오케이.” 2월의 끝자락, 여전히 바람은 차가웠다. 그래도 맑게 갠 하늘은 마치 봄이라도 온 것 마냥 기분 좋게 펼쳐져 있었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나는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집 근처에 있는 국립대학교로 일찌감치 진학을 결정했다. 사실 성적으로 보면 서울에 있는 대학교도 갈 수 있었지만 부모님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보면 지방 국립대가 더 나을 거라고 스스로 판단했다. 대신 학과는 내가 가고 싶었던 일본어과를 택할 수 있었다. 뜬금없는 고모와의 통화 때문에 억지로 나오긴 했지만 탁 트인 하늘을 보면서 길을 걸으니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시가 거의 다 되어서 약속 장소인 패스트푸드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대도 안 했지만 역시 고모는 아직 도착 전이었다. 무슨 일을 시키려고 그러나 궁금해 하던 차에 문이 열리면서 고모가 허겁지겁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정신없어 보이는 얼굴에 뭔가 일이 있긴 있나 보다 싶었다. “고모. 여기야.” 하 루 햄버거를 먹으며 나는 고모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윤환아, 있잖아. 고모가 사실 오늘 약속을 두 개를 잡아버렸어.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하지? 쉽게 말하면... 데이트를 두 개 잡았다고 해야 하나?” “쿨럭! 쿨럭! 워? 에이트 우 개?” 햄버거를 우걱우걱 먹다가 나도 모르게 헛기침을 해버렸다. 입 안에 잔뜩 물려있던 햄버거 때문에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천천히 먹어.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은 아냐. 사실, 몇 달 전에 문화동에 있는 바울의 집이라는 곳에 봉사활동을 나갔거든. 그냥 뭐 오갈 때 없는 아이들 돌봐주는 그런 곳이야. 처음엔 회사에서 단체로 가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봉사활동 하다보니까 괜히 내가 착한 사람이 된 거 같기도 하고, 아이들도 너무 예쁘고 해서 시간될 때마다 틈틈이 가봤거든.” “그런데? 나 보고 하루 나가달라고? 그건 데이트가 아니잖아.” “쫌 끝까지 들어봐. 성격은 너네 엄마 닮아서 엄청 급해. 그러다가 한 친구를 만났는데 바울의 집에서 초등학교까지 졸업하고 중학교부터는 그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아이야. 바울의 집도 넓지가 않아서 아이들이 조금 컸다 싶으면 혼자 살 수 있게끔 준비를 해주거든. 애가 착하기도 하고 고모 말도 잘 따르고 해서 많이 예뻐해 줬지.” “남자 아이야?” “응. 이번에 고등학교 들어가. 그래서 고모가 맛있는 것도 사주고 시내 구경도 시켜준다고 해서 약속을 잡았는데 그게 오늘이었던 거야. 깜박하고 있었거든. 근데 오늘 남자 친구 랑도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몇 주 전부터 예약해 놓은 레스토랑인데 그걸 어떻게 취소해...” “그럼 내가 고모 남자친구랑 같이 레스토랑에 가면 된다는 거지?” “야! 너 미쳤냐? 거길 니가 왜 가! 어쩌면 오늘 프러포즈 받을 지도 모른단 말이야.” “오... 진짜? 그럼 이제 나도 고모부 생기는 거야?” “일단 느낌은 왔어. 흠.... 그러니까 니가 그 아이랑 하루만 같이 놀아줘.” “싫어. 고등학교 가는 남자애랑 내가 왜 데이트를 해. 나 여태까지 여자 친구도 한 번 없었던 거 잘 알잖아. 안 돼 안 돼! 내 첫 데이트를 남자애랑 할 수는 없지. 암... 절대 그럴 수는 없지.” “오만 원 줄게. 제발, 제발. 고모가 이렇게 간절히 부탁한다. 제발. 응? 응?” “그래도 안 돼. 그냥 그 애한테 다음에 보자고 해. 그러면 되잖아.” “그러고 싶었는데 그 아이가 오늘을 엄청 기다리고 있었나봐. 아까 바울의 집에 계신 선생님께서 전화를 해 주셨는데 엄청 손꼽아 기다렸데... 나도 그래서 알게 된 거야. 오늘이 약속 날인 거. 아차, 싶었지 뭐. 그런데 어떻게 약속을 취소해. 음...... 너 가방 필요하지? 고모가 가방 사줄게. 가방.” “가방? 가방이라....... 음... 좋아. 내가 진짜 고모 사정 봐줘서 한 번만 해주는 거다. 대신 알바비 오만원도 주고 가방도 사주고 오늘 그 아이랑 돌아다니면서 쓰는 비용도 고모가 다 내는 거야.” “그럼 그럼. 여기 고모 카드랑 현금도 3만원 줄게. 오늘 필요한 건 이 카드로 다 쓰고 현금도 필요할 때 쓰고. “알바 비는?” “그건 나중에 카드 돌려받을 때 줄게. 하여튼 돈 밝히는 건 니 엄마랑 똑같다. 참고로, 여기로 오기로... 어? 인성아. 여기야 여기.” “뭐야. 벌써 불러놓은 거야. 이거 완전 계획적 이구만.” 고개를 돌려서 문 쪽을 보니 키가 작은 남자 아이 하나가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작았고 얼굴도 어려 보여서 도저히 고등학생으로 보이진 않았다.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했다고 하면 믿을 만한 얼굴이었다. 생각해보면 차라리 어려보이는 얼굴이 더 낫겠다 싶었다. 어디를 가도 한참 동생으로 보일 테니까 창피할 것 같지도 않고. “인성아. 누나가 같이 있어주고 싶었는데 중요한 일이 생겨서 오늘은 이 형이랑 같이 놀고, 다음에는 꼭 누나가 같이 있어줄게.” “전 괜찮아요. 저는 형도 좋아요.” ‘형이라... 짜식, 인상은 좋아 보이는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분명 아픔이 있는 아이일 텐데 그래도 저렇게 웃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예뻐 보이기도 했다. 고모도 봉사활동으로 만난 아이라고 했으니까 나도 봉사활동 한다는 마음으로 최대한 잘 해주리라 마음을 먹고 인사를 했다. “인성이라고? 난 윤환이형이야. 반가워.” “네. 저도 반가워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에 고등학교 들어간다고. 그럼 공부 열심히 해야겠네.” “네. 그래야 하는데... 그 고등학교가 저랑 잘 맞을지는 모르겠어요.” 둘의 대화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고모가 슬쩍 끼어들었다. “오! 둘이 이렇게 얘기하는 거 보니까 진짜 친형제 같다. 걱정 안 해도 되겠네. 윤환아. 오늘 잘 부탁할게. 무슨 일 있으면 고모한테 바로 전화하고! 인성이도 형이랑 잘 있을 수 있지? 형이 오늘 집까지 데려다 줄 거야.” “집까지? 고모, 그건...” “그럴 거잖아. 그치, 윤환아.” ‘저 가식적인 거짓 웃음.... 하....... 어쩔 수 없지.’ “그래. 형이 집까지 잘 데려다줄게.” “네. 감사해요.” “그럼, 나 먼저 간다. 인성이 배 고플 테니까 뭐 좀 먼저 사 먹이고 나가.” “알겠어.” 고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좋게 생각해야지. 어차피 동생도 없는데 동생 하나 생겼다고 생각하고 잘 해줘야겠다.’ 최대한 착해 보이는 얼굴로 미소를 잔뜩 머금고 물어보았다. “인성이, 배고프지? 뭐 먹을래.” “음... 저도 형이 먹는 걸로요.” “그래. 형이 그럼 주문하고 올게. 잠깐 기다려.” 주문을 하고 햄버거를 가지고 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음속에 있던 이야기도 인성이는 생각보다 덤덤하게 꺼내었다.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교통사고로 두 분 모두 돌아가셨고, 큰아버지 댁에서 살다가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이혼을 하는 바람에 혼자 남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절차에 따라 바울의 집에 오게 되었는데 그 때 인성이 나이가 일곱 살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냈던 아이치고는 꽤나 밝고 이야기도 잘 통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친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성이 오늘 뭐하고 싶니?” “사실 다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형이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형은 뭐든 괜찮아. 다 돈 받고 하는... 아.... 아냐 아냐. 괜찮아. 뭐 하고 싶은데?” “서점에 가고 싶고요. 영화 보고 싶어요. 그리고 저녁은 돈가스 먹고 싶어요.” ‘헐...... 이럴 수가. 여자 친구 생기면 해보고 싶었던 걸 그대로 말하다니. 이건 정말 좌절이다. 첫 데이트가 꼬맹이 남자 아이인 것도 싫은데, 그 코스도 내가 꿈꿔오던 그 데이트 코스라니.... 흠.... 하긴 뭐 이걸 데이트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봉사활동이야 봉사활동. 아니면 알바. 괜한 거에 의미를 두지 말자.’ “그... 그래. 서점이랑 영화 그리고 돈가스. 좋네. 좋아. 그럼 시내로 나가야겠네. 다 먹었으면 나가자.” “네. 형!!!” 택시에서 내려서 우리는 대전 시내의 대로변에 있는 대형서점으로 향했다. 온 김에 나도 읽고 싶었던 책 좀 한 권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성이는 읽고 싶은 책 있니? 천천히 둘러봐. 형도 좀 둘러보고 있을게.” “네. 그럼 딱 한 권만 살게요.” “꼭 그러지 않아도 돼. 필요한 책 있으면 마음껏..... 까지는 아니고, 뭐 부담 없이 골라봐.” 나는 살짝 억지가 섞였지만 어쨌든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를 짓고 인성이의 등을 떠밀었다. 내가 일본어과에 지원하게 된 계기는 일본어 자체에 대한 관심도 많았지만 일본 문화를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요즘 일본 문학이 한국어로 번역되는 일이 많아서 수능이 끝나고 요 며칠 사이에 무라카미 하루키나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몇 권 읽어볼 수 있었다. 새로 나온 책은 없나 싶어 신작 코너를 서성이다가 자연스럽게 외국 소설이 진열되어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는데, 인성이 역시 그 부근에서 책을 한 권 잡은 채 꼼꼼히 읽어보고 있었다. 조용히 다가서서 바로 등 뒤에 선 다음 나지막이 물어보았다. “무슨 책 읽어?” “헉! 놀랐잖아요... 제가 추리소설을 좋아해서요.” “오! 셜록 홈즈 명작 모음집. 좋은데...” “읽어보셨어요?” “그럼. 형도 추리소설 좋아하거든. 홈즈 시리즈는 많이 읽어봤지.” “그래요? 우와! 멋있다. 전에 폐지 버리는 곳에서 우연히 홈즈 책을 주워서 한번 읽어봤거든요. 근데 너무 너무 재밌는 거예요. 그래서 열 번도 더 넘게 읽어본 거 같아요. 새로운 것도 읽고 싶었는데 책을 구할 수가 없어서...” “음... 그래? 그것 참 인연이네. 홈즈가 너를 찾아간 거야.” “그런가? 히히. 이 책 재밌어요?” “재밌어. 원래 홈즈 시리즈는 단편 모음집이 더 좋더라고. 장편도 괜찮은 게 있긴 하지만. 그럼 이 책이랑... 형이 한 권 더 골라줄게. 이리 와봐.” 나는 홈즈 책이 정리되어 있는 책장 속에서 책을 한 권 골라 인성이에게 내어주었다. “이게 ‘주홍색 연구’라는 책인데, 홈즈 시리즈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야. 여기에서 홈즈랑 왓슨이랑 만나게 되지. 한번 읽어봐. 그리고 나중에 기회 되면 형이 몇 권 더 추천해 줄게.” “우와! 진짜 감사해요. 열 번씩 읽어 볼게요.”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고... 형도 사고 싶은 책 있으니까 잠깐 저쪽으로 가보자.” 무슨 책이 좋을까 책장 앞에 서서 둘러보던 중에 왠지 볼에 꽂히는 시선이 따가워져서 왼쪽으로 돌아보았다. 그곳에서 인성이는 초롱초롱한 두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아! 그냥 형이 멋있어 보여서요. 형은 이제 대학생 되는 거예요?” “응. 이번에 대학교에 가서 일본어 공부할 거야.” “일본어요? 멋있다. 형은 진짜 행복해 보여요.” “행복해 보인다고? 글쎄. 지금 내가 행복한가? 잘 모르겠네.” “제가 볼 때는 형은 행복해 보여요.” “그래. 고맙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대화이긴 했지만 내가 멋있어 보인다고 하고, 내가 행복해 보인다고 하는 인성이의 말에 왠지 뿌듯해지기도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집을 하나 골라서 계산을 하고 서점을 나왔다. 해가 지고 저녁이 되고 나니 밖은 제법 쌀쌀했다. 책 세 권이 담긴 비닐 봉투를 팔에 끼고 두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은 채 가장 번화한 골목으로 향해 가는데 인성이의 표정이 급하게 어두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성아, 왜? 어디 아프니?”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제가 사람 많은 곳에 가본 적이 별로 없어서요. 조금 겁나요.” “평일이라 그렇게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닌데.. 그럼 어쩌지?” “저기..... 손 좀.......” “손???” 인성이는 내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뭐지 이게? 손을 잡아달라는 건가? 시내 한복판에서 남자랑 남자랑 손을 잡고 걷자고.... 말도 안 돼. 어떻게 손을 잡고 걸어 다녀? 이건 진짜 아닌데... 어쩌지? 어쩌지?’ “손 좀 잡아주시면 안돼요?” “어? 어.... 괜찮지.” 인성이의 손은 차가웠다. 손을 잡고 나니 표정이 한결 가벼워져 보였다. 대인기피증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워낙 이런 경험이 없는지라 많은 사람들 속에 섞이는 게 조금 무서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이야 열일곱이 되었지만 정신연령으로 따지자면 그것보다 훨씬 어린 아이일 수도 있으니까 이런 상황이 낯설고 무서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정리해봤다. 이왕 잡은 손 놓을 수도 없고 또 인성이가 워낙 어려보이는 지라 딱히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도 없을 거라 여겼다. 그냥 어린 동생 데리고 시내 구경 나온 새내기 대학생 정도로 사람들이 생각하겠지 싶었다. “조금 괜찮아졌니?” “네. 형 손잡고 걸어가니까 좋아요.” ‘넌 좋겠지. 난 사실 쫌 쪽 팔리 단다. 아는 사람 만나면 안 될 텐데...’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사실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아직 배 안 고프지? 영화를 먼저 보고 돈가스 먹으러 갈까?” “네. 좋아요. 저......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그래. 영화는 니가 골라. 형은 다 괜찮으니까.” 잠시 후에 매표소 앞에서 서서 인성이가 보고 싶다는 영화를 손가락을 가리켰을 때, 나는 정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저 영화? 저거... 남자랑 여자랑... 그러니까, 완전 사랑 이야기인데...” “저 열일곱 살인데 못 보는 영화에요?” “아니. 못 보는 건 아닌데, 그래도 멜로 영화는 우리 둘이 보기에 쫌...” “형은 싫으세요? 그럼 다른 거 볼까요?” “아냐. 아냐. 니가 보고 싶은 거 보기로 했으니까 괜찮기는 한데. 꼭 보고 싶니?” “네. 꼭 보고 싶었던 영화에요.” “그래........ 보자. 저 영화.........” ‘남자랑 손잡고 시내 돌아다닌 것도 짜증났는데 영화도 멜로라니! 영화도 멜로라니! 아.... 왠지 내가 여자 친구 생기면 하려고 했던 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해. 이럴 수가.... 진짜 좌절이다.’ 팝콘을 사서 영화관 안으로 들어섰다. 어쨌든 나 역시 평소에 보고 싶었던 영화니까 그냥 기분 좋게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 본다고 생각하고 영화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런데 나보다 인성이는 더 집중한 것처럼 보였다. 눈에서 하트라도 뿜어져 나올 기세로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너 영화관 처음 와봤니?” “네. 처음이에요.” “그렇구나. 무섭지는 않아? 뭐 사람은 별로 없지만...” “옆에 형이 있잖아요.” “그.... 그래. 옆 형..... 형이 있지.” ‘아... 언젠가 여자랑 같이 와서 옆에 오빠가 있잖아 라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 점점 뭔가 꼬이기 시작하는 거 같아.’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 우리는 말없이 화면을 보기만 했다. 음악과 영상 그리고 대사, 배우들의 연기까지 흠잡을 곳이 하나도 없을 만큼 훌륭한 작품이었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의 마음을 읽어내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오려고도 했다. 물론 잘 참아내긴 했지만 옆에서 영화를 보는 인성이는 눈물을 주룩 주룩 흘리고 있었다. 다행히 코를 훌쩍 거리지는 않아서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감수성이 짙은 아이구나. 그래도 재밌게 보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영화를 다 보고 다시 번화가로 나왔을 때 나도 모르게 인성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거지 두 번째는 그다지 힘들지 않은가 보다. 이제 누가 보든 말든 될 대로 되라 라는 심정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자주 다니던 돈가스 집으로 향했다. 인성이는 영화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있었는지 말없이 걷기만 했다. 잠시 후 돈가스를 먹으며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아까 그 영화, 많이 슬펐어?” “아뇨. 슬프지는 않았어요. 그냥.....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온 것뿐이에요. 슬프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렇지. 슬픈 영화는 아니었던 것 같아.” “형은 어땠어요?” “재밌었어. 특히 음악이 참 좋더라고. 이야기의 연결도 좋았고. 너도 재밌게 본 거 같은데?” “처음에는 자막 읽는 게 힘들어서 잘 이해가 안 됐는데........” 우리의 영화 이야기는 꽤나 깊이 있었다. 어린 나이 치고 인성이는 영화에 대한 이해력이 아주 높았고, 나는 스쳐지나 갔던 장면까지 꼼꼼히 기억해 내며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해나갔다. 사실 이것마저도 여자 친구와 하고 싶었던 거였긴 했다. 영화 보고 나와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 나누면서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거나 하는 거. 근데 인성이랑 나누는 대화도 나쁘지는 않았다. 서로 통하는 부분도 있었고 서로 다르게 해석한 부분도 있어서 왠지 또 다음에 다른 영화를 보고 나서 이야기를 나눈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와서 택시를 탔다. 고모가 말해준 문화동으로 택시는 방향을 잡았다. 인성이가 말한 문화동 평화교회에 가까워질수록 동네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둡고 조용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이런 곳에 사는 구나. 쉽지 않겠네...’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피곤했는지 옆자리에서 인성이는 꾸벅 꾸벅 졸다가 고개를 내 어깨로 툭 떨어트렸다. ‘끝까지........ 내 환상을 깨버리는구나. 이건 진짜 내가 여자 친구가 생기면...... 에라! 모르겠다.’ 속으로는 왠지 모를 분노가 생기기도 했지만 나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인성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어차피 오늘 보면 안 볼 아이인데 모질게 할 필요도 없고, 사실 생각해보면 그다지 나쁜 하루도 아니었기 때문에 괜히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 기사님은 골목길 속에 숨어있던 작은 교회 앞에 차를 멈추어 세웠다. “여기가 문화동 평화교회에요.” “네. 잠시 만요. 인성아! 일어나봐, 다 왔어.” “으.... 응. 다 왔어요? 아! 교회네. 여기서 내리면 되요.” “혼자서 집까지 갈 수 있겠니? 여기는 택시가 안 잡혀서 형은 이 택시 타고 바로 가야 할 거 같은데...” “네. 괜찮아요. 저기 골목길로 조금만 걸어가면 되요. 형, 다음에 또 볼 수 있겠죠?” “어.... 다음에? 그.... 그럼. 볼 수 있겠지. 형이 고모랑 같이 한 번 올게. 여기 책.” “네. 꼭 와주세요. 그 때 또 얘기 많이 해요.” “그..... 그래. 인성아, 책 잘 읽고. 다음에 또 보자.” “네. 오늘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봐요.” 택시 안에 있던 거울로 가로등 아래에 서있는 인성이의 모습이 비췄다. 택시가 그 어두운 동네를 빠져나올 때까지 인성이는 움직이지 않고 그곳에 서있었다. 입에서 작은 한숨과 함께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휴... 오만 원짜리 알바치고는 꽤 힘들었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어.” 마치 일을 끝내고 퇴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가벼운 마음이었고 꽤 뿌듯한 마음이기도 했다. 인성이를 다시 볼 지 혹은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 찾지 않고 잊히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어쨌든 오늘 하루는 잘 보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새내기에게 3월은 천당과 지옥을 몇 번이나 오가는 화끈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선배들에게 끌려 다니며 멍멍이가 될 때까지 술을 퍼마신 때도 많았고 동기들과 함께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잔디밭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때도 많았고 때로는 그 중에 몇몇과 소소한 데이트를 즐기는 때도 있었다. 그렇다고 여자 친구가 생긴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캠퍼스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종종 고모에게 인성이를 보러 가자는 문자를 받기도 했지만, 새내기의 빡빡한 스케줄 속에서 하루를 뺀다는 게 쉽지 않은 터라 하루 이틀 미루기만 했다. 고모도 내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서 굳이 억지로 데려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내가 딱히 바라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을 테니까. 그래도 고모에게 인성이가 나를 많이 좋아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서 인지 언젠가 한번쯤 여유가 생기면 보러 가야겠다고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3월 마지막 주 수요일이었다. 나는 그 날 수업을 안 들어가고 동기들과 함께 갑천변으로 벚꽃구경을 나왔다. 대학생이라면 한번쯤 수업 빼고 바람도 쐬러 가야 한다는 과대표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거였다. 끝없이 수다를 떠는 여자 동기들은 자기들끼리 팔짱을 끼고 돌아다니다가 꽃도 꺾고 사진도 찍고 때로는 까르르르 하며 정신없이 웃어대기도 했다. 서너 걸음 뒤에서 나는 그 친구들을 따라 걸으며 불어오는 봄바람을 한껏 느끼고 있다가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춰 섰다. ‘고모? 이 시간에 어쩐 일이지? 일 안 갔나?’ “여보세요. 응, 고모. 어쩐 일이야? 나 지금? 학교는 아니고... 그 근처에 있어. 바울의 집에? 나 어딘지 모르는데... 아! 평화교회는 가본 적 있어. 바울의 집이 거기 바로 옆이 였어? 근데 왜? 거기로? 지금? 왜? 꼭 가야돼? 나 지금....... 아.... 그래. 알았어. 지금 갈게.” 한창 일을 하고 있어야 할 평일 낮 시간에 고모에게 전화가 온 것도 이해가 안 됐지만, 그런 고모가 바울의 집에 있다는 건 더더욱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늘 밝은 고모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우울하게 들려온 것도 마음에 걸렸다. “얘들아. 나 좀 가봐야 할 거 같아. 나중에 학교에서 보자.” 바로 택시를 타고 문화동에 있는 평화교회로 향했다. 밤에 왔을 때는 그저 어둡다고만 생각했던 곳인데 낮에 와보니 건물도 대부분 1층이고 길도 좁아서 여기가 대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낙후한 동네라는 걸 알게 되었다. 멀리 교회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내 심장이 조금 급하게 뛰고 있음을 느꼈다. “여기서 세워주세요.” 택시에서 내려서 교회를 지나 조금 걷다보니 바울의 집이라는 간판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꽤 많은 사람들이 그 건물 바깥을 서성거리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고 고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심장은 조금 전 보다 더 빠르게 뛰고 있는 듯싶었다. 바울의 집 안으로 들어섰는데 예상보다 사뭇 다른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장례식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얀 국화꽃 사이에 영정사진이 보였고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향이 방안에 은은하게 퍼져있었다. 코끝을 찡하게 만든 그 향 때문에 잠깐 어지러움을 느꼈다가 정신을 차리고 영정 사진을 보았다. 그 사진 속에는 인성이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순간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냥 사진 속 주인공이 인성이라는 사실에 놀라기만 했을 뿐 인성이가 죽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서 그런 건지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사진만 바라보았다. “왔니?” 익숙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고모..... 고모... 고모....... 이게 무슨 일이야?” 고모는 회사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아마도 일하다가 급하게 이곳으로 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두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고 눈물이 가득 고여 있어서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아니. 왜 인성이가 저기에?” “인.... 인성이가 먼저 떠났어.” 애써 울음을 참았지만 고모의 두 눈에서는 이미 커다란 줄기를 그리며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고모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순간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친구가 윤환이구나. 잘했네. 잘했어. 착해.” “아! 인성이한테 그렇게 잘해줬다던 윤환이가 이 친구였어. 그래. 잘 왔어. 인성이가 하늘나라 가는 길에 많이 좋아하겠네. 형 왔다고.” “아이고! 키도 훤칠하고 인물도 좋네. 인성이랑도 닮았어.” “닮았긴, 훨씬 잘 생겼고 만. 잘 왔네. 가서 인사해야지.” 고모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마음속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이 스물 스물 올라오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아챌 수 있었다. “그래. 윤환아. 너도 인성이한테 인사해야지.” 분명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멍하니 인성이의 해맑은 미소만 바라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절을 두 번 했다. 그리고 또 멍하니 인성이의 사진만 바라보았다. 잠시 후에 고모가 와서 내 손을 잡았고 나는 고모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배고프니? 뭐 좀 먹을래?” “아니. 그것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 차근히 이야기해줄게. 여긴 사람 많으니까 저쪽으로 가자.” 작은 가게 옆에는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높게 솟아 있었고 그 아래 작은 평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평상 위에 나는 앉아 있었다. 눈앞에 멀리 대전 시내의 모습이 보였다. 높게 솟은 빌딩들이 마치 다른 세상의 모습인 것처럼 느껴졌다. 내 주변에 있는 모습과 비교해 보면 정말이지 다른 나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낯설어 보였다. 캔 음료수를 두 개 들고 고모는 내게 다가와 앉았다. “많이 놀랐지? 이것 좀 마셔.” “응. 놀라긴 했는데, 왜 사람들이 나한테 그렇게?” “바울의 집 사람들? 너 다 알거든...” “나를 어떻게?” “인성이가 니 얘기를 많이 했어. 고마운 형이라고.” “인성이가 내 얘기를...? 근데 왜 죽.... 아니, 왜 저기..... 하늘나라?” “음... 어떻게 설명해야하지. 이게 좀 복잡해.” “원래 아팠던 아이였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스스로 간 거 같아.” “자살?” “글쎄. 그걸 자살이라고 해야 하나? 경찰에서는 사고사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다 스스로 간 거라고 생각해.” 고모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인성이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고 공고로 진학을 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일찌감치 기술을 배워서 돈을 버는 게 좋겠다 싶어서 인성이를 돌봐주던 사람들은 인성이의 의지와는 달리 공고로 진학을 시킨 듯 보였다. 하지만 인성이는 책을 읽는 걸 좋아했고 글을 쓰는 걸 좋아했었다고 한다. 중학생 시절 백일장에 나가서 상도 탄 적이 있고, 인성이가 쓴 독서 감상문이 지방 신문에 실리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인성이에게 어디 고등학교를 갔냐고 물어보지도 않았고 당연히 인문계로 갔을 거라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인성이와 만났던 그 날, 인성이와의 대화를 떠올려 보며 책 읽는 것과 글 쓰는 것을 좋아했었다는 이야기에 깊은 공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점에 가고 싶어 했던 것도 영화를 보고 싶어 했던 것도 이제야 다 이해할 수 있었다. 공고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인성이는 결석이 잦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렇다 할 방황을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집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보호자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적었고, 더욱이 그 학교에는 비행을 저지르는 학생이 많아서 결석만 할 뿐 특별히 사고를 치지 않는 인성이를 크게 다그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입학을 하고 한 달 쯤이 지났을 때 인성이는 하늘나라로 떠난 것이었다. “그런데 왜 스스로 떠났다고 한거야?” “그게 말이야...” 인성이가 혼자 살고 있는 집은 단칸방이었고, 외부에 있는 공용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아주 허름한 곳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난방도 연탄을 사용하기 때문에 늘 연탄가스에 신경을 써야 해서 잠을 못 자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인성이는 연탄가스에 민감해서 자고 있는 중에도 연탄가스가 샌다 싶으면 아무리 늦은 밤중이라도 바울의 집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면 선생님들이 인성이네로 찾아가 조치를 취해주곤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성이가 떠나간 날, 인성이는 연탄가스가 새는 걸 알면서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스스로 잠들었다고 고모가 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걸 어떻게 안 거야? 인성이가 알면서도 나오지 않았다는 걸?” “그건... 이거 한 번 읽어봐.” 고모는 내게 낡은 노트 한 권을 건네주었다. “고모 먼저 일어날게. 다 읽으면 바울의 집으로 와.” “이게 뭔데?” “일기장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인성이 노트야. 이런 거 저런 거 써놓는 노트 같아. 그거 읽어보면 다 이해가 될 거야. 천천히 읽어보고 와.” 그렇게 고모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노트를 펼치는 손이 살며시 떨리고 있는 걸 느꼈다. 첫 장을 넘겼더니 인성이가 써놓은 낙서들을 볼 수 있었다. 고등학생이라고 하기에는 꽤나 깊이가 있는 글들이었다.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건 어떤 감정일까? 지금 나는 살아있는 걸까? 아니면 죽었는데 살아있다고 착각하는 걸까? 우리 엄마와 아빠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나도 죽고 나면 엄마와 아빠를 만날 수 있을까?’ ‘돈을 벌어야 하는데... 돈을 벌어야 하는데... 공고를 나오면 돈을 벌 수 있겠지? 그러면 돈을 벌고 나서 작가가 되어야겠다. 작가가 되려면 얼마나 필요할까?’ 정돈되지 않은 감정들이 두서없이 쓰여 있는 듯 보이기도 했지만 인성이의 꿈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꿈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지라 가까이에서 인성이를 돌봐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윽고 나를 만났던 날이 일기처럼 쓰여 있는 장을 볼 수 있었다. 무엇을 했는지 상세하게 적혀 있을 뿐 인성이가 어떤 생각이었는지 잘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대부분의 문장이 똑같은 말로 정리되어 있었다. ‘.... 책을 선물 받아서 좋았다.’ ‘.... 영화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 돈가스 맛이 참 좋았다.’ ‘.... 택시를 타고 마음 편하게 잠이 들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오늘 하루 정말 행복했다. 이런 기분을 느끼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다른 일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느낌이었다. 좋았다... 행복했다... 아마도 인성이는 그 날 처음으로 행복을 느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 날 일기는 다른 장과 다르게 몹시 구겨져 있었다. 아마도 그 날의 일기를 수도 없이 읽었었나 보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종종 써져있던 글들은 대부분 그날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셜록 홈즈에 대한 글, 함께 본 영화에 대한 글, 손을 잡고 걸었던 시내 풍경을 묘사해 놓은 글도 있었다. 그리고 묘한 느낌의 글도 읽을 수 있었다. ‘이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날이 언제까지일까? 조금씩 조금씩 잊혀 가는데... 벌써 어떤 부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 행복을 잊게 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잊고 싶지 않은데...’ 그리고 마지막 장. ‘이대로 잠들면 되겠구나. 이대로 행복을 가슴 속에 안은 채 잠들면 되겠네. 엄마, 아빠를 본다면 내가 느낀 행복에 대해서 꼭 이야기 해줘야지. 윤환이형, 고마워요.’ 아마도 하늘나라로 떠난 그 날 쓴 글인 것으로 생각됐다. 연탄가스를 느꼈던 그 때 쓴 거였다.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반겨주었던 것도, 인성이가 스스로 떠났다고 고모가 말한 것도 이해가 됐다. 나는 그저 하루를 함께 보내준 것밖에 없는데, 그 하루가 인성이에게는 짧은 인생 속에서 느낄 수 있었던 유일한 행복이었다니 놀랍기만 했다. 그리고 또 혼돈스러웠다.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잘 알지 못했던 아이가 두려움 없이 잠들었다고 생각하니 인성이의 선택도 나쁜 것은 아니었겠구나 하는 알 수 없는 마음도 들었다. 인성이가 떠나기 전에 내가 한 번 더 와볼 걸이라는 후회가 들어서 책임을 회피하려고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밀려오는 슬픔을 억누르기 위해서 그런 마음을 억지로 꺼냈는지도 모르겠다. 행복이라는 것을 느끼고 그 행복을 잃기 전에 떠난 인성이가 다른 세상에서도 행복하길 바랄 뿐이었다. 문득 내게는 별 거 아니었던 그 단 하루가 인성이에게는 유일하게 행복했던 단 하루였다는 그 사실이 스무 살의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행복의 그늘 속에 살던 인성이가 그 그늘을 빠져나오기 싫어서 영원히 그 그늘 속에서 잠든 건 아닐까? 그 그늘을 빠져나오면 더 큰 세상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행복의 그늘 속에서 잠든 건 사실이니까.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러갔다. 2013년 3월,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요즘이다.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 습관처럼 TV를 먼저 켰다. 하루 종일 맸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고 나니 이제야 긴장이 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름도 모를 걸 그룹이 TV에 나와서 많이 들어본 듯 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음악을 들으며 냉장고로 가 캔 맥주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그대로 무거워진 몸을 소파에 던져버렸다. “후....... 먹고 살기 힘들다.” 자세를 고쳐 앉아 캔 맥주를 따고 벌컥 벌컥 한 모금 들이켰다. 톡 쏘는 맥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갈 때마다 세포 하나하나가 다시 살아나는 듯 한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 그래도 이 맛에 사네.”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이리 저리 돌리다가 한 케이블 채널에서 멈춰 섰다. 하루 종일 흘러간 영화를 보내주는 그런 따분한 채널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러브레터’가 나오고 있었다. 1999년 그 해 겨울, 일본 문화가 하나씩 하나씩 개방되더니 러브레터 역시 우리나라 극장에서 개봉을 했다. 인성이가 보고 싶어 했던 그 영화. 인성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봤던 영화이기도 하고 내가 유일하게 남자와 단 둘이 극장에서 봤던 멜로 영화이기도 한 그 영화, 러브레터. 때마침 나카야마 미호가 눈 덮인 산으로 나오는 장면이 이어지고 있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그 장면. “오겡끼 데쓰까? 아따시와 겡끼데쓰.....” 십년하고도 몇 해가 더 지난 지금. 요즘도 난 그 하루가 가끔씩 떠오르곤 한다. 새내기 대학생이었던 1999년, 인성이와 함께 했던 그 하루가 가끔 떠오르곤 한다. 인성이의 짧은 인생 속에서 유일하게 행복했었던 그 단 하루. 아직도 난 잘 모르겠다. 인성이가 정말 행복함을 안고 떠나간 건지? 혹시 내가 모르는 아픔이 있는지? 그리고 또 모르는 게 많다.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나는 지금 그 행복의 그늘 속에 살고 있는 건지? 그리고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다. 지금의 나를 보고 있다면 그날처럼 내가 멋있어 보이는지? 그날처럼 내가 행복해 보이는지? 그렇게 모르는 것 투성이 속에서도 유일하게 알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 그건 바로 그 하루가 떠오를 때마다 인성이가 많이 보고 싶어진다는 그것이다.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TV 속에서는 러브레터가 나오고 있다.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혼잣말로 중얼거려 본다. “잘 지내고 있지? 나는 잘 지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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