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초반. 세계경제의 질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근본적이고 급속한 변화를 경험하였다. 1989년 12월 미소정상회담이 끝나자마자 사회주의는 붕괴하였으며, 자본주의적 국제경제질서 또한 급속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세계적인 규모의 상호의존은 WTO를 출범시키게 만들었으며 통상마찰은 심화되고 혼란스러울 정도로 복잡해졌다. 기축통화인 달러의 위상은 갈수록 약화되어갔으며, 유로화는 체제 존속을 위협 당했으나 끝내 해결책을 찾았다. 그러나 빈곤과 부유함의 간극은 갈수록 벌어지며 상대적 박탈감은 젊은이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통계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도래한 것처럼 보였으며, 국제질서는 다극화 체제로 빠른 속도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 이후에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산, 분배, 교환, 그리고 소비라는 네 가지 분야가 상호 연관을 미치며 경제가 구성되지만,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산이다. 장기적으로 인류 경제구조의 역사는 생산 형태에 따라 나머지 구조가 결정되어 왔다.
 인류는 어떠한 길을 걸어 오늘날까지 왔는가? 원시사회의 공동노동에서 출발하여 사유재산제도가 생기고, 계급이 파생하였다. 권력자와 피지배자라는 이분법적인 구조는 상당한 기간 존속되었으며, 권력자의 극점에는 왕, 피지배자의 극점에는 노예가 존재하였다. 노예제 생산제도는 오랜 시간 버텼으나 이내 무너지고 봉건제사회로 전환되었다. 생산력이 발달하면서 잉여생산물이 쌓이게 되고, 이 축적과정은 봉건영주와 지주를 위협하였다. 마침내 봉건제마저 와해되고 세상은 산업화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초기의 산업화는 매우 열악하여 착취라는 말이 매우 정확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균형 아닌 구조가 오래 지속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유럽 열강의 산업혁명은 생산과잉의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으며, 자본주의는 불확실한 경기변동을 거치다 마침내 세계대공황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세계대전이라는 불구덩이로 가게 되는 큰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세계는 다시 냉전을 거치고, 마침내 그 냉전마저 무너졌다. 그리고 21세기가 시작되었다.
 21세기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적인 시대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수많은 사람들을 좌절시키게 만든 시대이기도 했다. 희망과 절망의 경기변동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이제 자본주의도 자기조정 메커니즘이라는 그 힘이 쇠퇴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시점이 도래하게 되었다. 인류가 만약 이 소용돌이 속에서 해결책을 못 찾고 파탄의 시대로 도래할 첫 걸음을 뗐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가? 만약 이 난국이, 사실 지나고 나서 되돌아보면 별 거 아닌 무용담 정도로 남게 될 짧은 서사시라면, 우리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시대는 파탄으로 가는가, 중립을 유지하는가, 발전하고 있는가?
 누군가는 시대가 악마의 맷돌 속으로 이끌려 간다고 생각하고는 집단을 이루어 이 경향성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고 있었다. 사실 싸운 게 아닌지도 모른다. 이 경향성에 반대하는 또 하나의 경향성을 만들어 낸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은 모든 게 탄로 나게 되는 순간,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잃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돌아보기보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으려 애썼다. 이와는 반대로 이 경향성을 더욱더 부채질하는 집단 또한 있었다. 아직은 어느 누가 옳은지 아무도 모른다. 서로 자기가 옳다는 논증은 있지만 대규모로 실험된 적도 없으며, 어느 정부도 전적으로 한 경향성만의 편을 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끝내 모두 실패하거나 엇나갔다. 그리고 그 실패와 왜곡과 어긋남이 새로운 파탄의 시대로, 새로운 난국의 소용돌이로 이끌어 버렸다.
 그리고 이 소용돌이의 가장자리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살인자와 피에 물든 밤(Pro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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