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p><p class="바탕글"><br></p><p class="바탕글"><br></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0pt;">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span> 베이지색 기모 코트는 꽤 두툼해 보였지만 가느라단 목이 텅 비어서 안쓰러웠다. 목도리를 하나 감아주고 싶었다. 그녀는 덜덜 떨면서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p><p class="바탕글"><br></p><p class="바탕글">-안아드릴까요.</p><p class="바탕글">-아니요.</p><p class="바탕글"><br></p><p class="바탕글">들고 있는 피켓조차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대답이었다. 옆에서 K군이 킥 웃었다. 민망함에 약간 짜증이 났다. 필요 없으면 가던 길이나 갈 것이지 왜 그렇게 서서 쳐다봐.</p><p class="바탕글">하얗게 입은 남자 셋이 P양에게 다가왔다. 역시 인기 폭발이다.</p><p class="바탕글"><br></p><p class="바탕글">-메리크리스마스</p><p class="바탕글"><br></p><p class="바탕글">P양이 그들을 차례로 ‘안아줬다.’ 물론 그 모양새는 난쟁이 P양이 안기다 못해 사내들 품에 파묻히는 꼴이었지만 김 교수님 말에 따르면 프리허그란 “포옹을 통해 외롭고 지친 현대인의 파편화된 정신을 치유하는 캠페인”이고, 우리 중 유일하게 커플인 P양은 비록 모타리는 주먹만 하더라도 정신 건강은 가장 완벽했다. 특히 오늘 같은 날에 그녀는 정서적 갑의 입장에서 외로운 솔로들을 ‘안아줄’ 능력이 충분했다.</p><p class="바탕글"><br></p><p class="바탕글">화이트 크리스마스의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문득 시선이 돌아가 그녀를 찾았다. 긴 생머리 위로 눈발을 하얗게 쌓아올리다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어그부츠로 눈을 꾹꾹 밟으면서 스킨푸드 쪽으로 가더니 그 건물 1층의 처마 아래로 쏙 들어갔다. 시간이 꽤 흘러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휴대폰을 습관적으로 확인하다가 이따금 이쪽을 쳐다볼 뿐이었다. 종종 발도 굴렀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내가 여고생 한 무리를 안아주던 때에 다시 스킨푸드 옆으로 나와서 내 쪽을 한번 돌아보고는 거리를 따라 좀 내려간 다음, 네이처 리퍼블릭 근처에서 잠깐 머뭇거리다 버거킹을 지나서 마침내 거리 저 아래로 사라졌다.</p><p class="바탕글"></p><p class="바탕글"><br></p><p class="바탕글">캠페인은 예정보다 삼십 분이나 길어졌다. 여덟 시가 좀 넘어서 P양은 연애질을 하러 갔고 K군은 소개받은 여자를 만나러 갔다. 피켓은 근처 휴지통에 버렸다. 곧바로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버릴 작정으로 을지로입구역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연인들이 득실댔다. 지나치는 순간 들리는 짧은 몇 마디, 한 줄짜리 영화평, 선물에 대한 감동, 모텔에서 보낼 밤에 대한 미지근한 농담. 옷깃을 여며주고, 어깨를 감싸주고, 깍지를 끼는 가느다란 손가락의 세심한 움직임.</p><p class="바탕글"><br></p><p class="바탕글">내 머리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들의 사소한 말이며 행동에서 전 여자 친구의 파편을 하나씩 찾아냈다. 그리고 윈도우 조각 모음을 하는 것처럼 그걸 짜 맞췄다. 교양 수업에서 그녀를 만나 다섯 명이 하는 조별 과제를 둘이서 하던 4월부터 시작했다. 올해 여름이 유달리 뜨거웠던 까닭은 우리가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이었고, 가을에 낙엽이 지면서 우리의 사랑도 한 장씩 떨어졌다. 애증의 첨예한 경계에서 다투고, 싸우고, 투정에 지쳐서, 실수와, 진심의 오해와, 결국 부질없는 내 자존심 때문에 끝으로 몰고 가 마침내 모든 것을 박살내버린 게 2주 쯤 되었다.</p><p class="바탕글"><br></p><p class="바탕글">명동 3길에 지난 1년이 차례로 굴러와 레드카펫처럼 깔렸다. 그러자 애달픈 발이 점점 무거워졌다. 스무디킹 사거리의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도착할 때 쯤엔 상태가 최악이었다. 난 고개를 푹 숙이고 근처 빌딩 아래 주차장으로 도망쳤다. 희뿌옇게 번진 어둠 속으로 간신히 기어들어갔다. 그리고는 제일 구석진 곳 파란색 모닝 옆에 잡초처럼 주저앉았다.</p><p class="바탕글"><br></p><p class="바탕글">난 정말 울고 싶지 않았다.</p><p class="바탕글"><br></p><p class="바탕글">아무렇지 않은 척, 지나간 인연 아름답게 간직하며 살고 싶었다. 희미하게 잊혀지길 바랐다. 이렇게 명동 길 한복판에서 크리스마스이브에, 어느 주차장에 쪼그리고 앉아서 초라하게 흐느끼는 건 정말로 싫었는데, 프리허그를 하러 나오면서 그렇게 다짐했는데. 묘한 억울함이 감정을 더 북돋우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오늘 나를 한 번 쯤 생각은 해줄지, 한 여름이 아니면 항상 추위를 조금씩 타는 사람이었는데 오늘처럼 날씨가 찬 날에 옷은 따뜻하게 입었는지.</p><p class="바탕글"><br></p><p class="바탕글">숨을 헐떡대며 울다가 지쳐서 고개를 들었다. 주차장 저 끝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황급히 뺨을 닦는데 그녀가 보였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대며 걸어오고 있었다. 딱 봐도 상태가 최악이었다. 그녀는 어깨를 떨었다. 목을 텅 비워놓으니까 춥지. 파란색 모닝을 양보해야겠다고 생각했다.</p><p class="바탕글"><br></p><p class="바탕글">-프리허그…… 하시던 분이죠.</p><p class="바탕글"><br></p><p class="바탕글">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p><p class="바탕글"><br></p><p class="바탕글">-네.</p><p class="바탕글">-아직 하나요.</p><p class="바탕글"><br></p><p class="바탕글">대답이 늦자 그녀는 화장이 번져 엉망이 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p><p class="바탕글"><br></p><p class="바탕글">-안아드릴까요.</p><p class="바탕글"><br></p><p class="바탕글"><br></p><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