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b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움직이는 슬리퍼</b></div> <div><br></div> <div>우리 집에서 벌어진 일이다.</div> <div>나도 반신반의하는데, 우리 집은 뭔가 홀리기 쉬운 체질이라고 한다.</div> <div>그래서 그런 게 집 안에 한가득 있다고 한다.</div> <div>덕분에 이상한 현상이 종종 일어나곤 하는데, 나도 여러 체험을 겪은 셈이다.</div> <div>집에서 사진을 찍으면 반드시 둥글고 희끄무레한 것이 찍히거나</div> <div>아무도 없는데 발소리가 들린다거나 뭐 그런 흔한 것들읻.</div> <div>나로서는 태어날 때부터 겪은 일인지라 사실 꽤나 익숙한 일이라 아무 느낌 없긴 하다.</div> <div><br></div> <div>그런데 내가 종종 겪은 현상 중 하나가 슬리퍼가 움직인다는 것이다.</div> <div>이렇게 쓰고 보니 슬리퍼가 혼자 걸어다니는 걸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div> <div>그게 아니라 슬리퍼를 벗어두고 한참 뒤에 보면</div> <div>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거나, 오히려 반대로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거나 한다.</div> <div>내 기억이 혼동되거나 가족 중에 누군가가 한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div> <div>아무도 없을 때나, 한쪽만 저 멀리 다른 방에서 뒤집어져 있거나 한다.</div> <div><br></div> <div>그러던 어느 날, 씻고 나와서 바닥의 슬리퍼를 보니 흐트러져 있었다.</div> <div>그때 나는 의문점이 하나 생겼다.</div> <div>"왜 하필 내 슬리퍼를 움직이는 걸까?"</div> <div>깔끔하게 정돈해주는 날엔 고맙다는 생각이 들지만,</div> <div>엉망으로 해놓으면 짜증이 난다.</div> <div>'혹시 내가 뭔가 반응해주길 바라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한 마디 해줄까 싶었다.</div> <div>처음엔 지금 흐트러져 있으니 화내는 거라고 생각이 들어서 '미안'이라고 하려했다.</div> <div>그런데 찬찬히 생각해보니 "미안보다는 고맙다고 하는 게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에</div> <div>"항상 깔끔히 정돈해줘서 고마워"라고 했다</div> <div>그랬더니 다음날부터 슬리퍼는 정돈되는 일은 일어나도, 흐트러지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div> <div>그래서 역시 감사 인사를 받고 싶었던 거구나 생각했다.</div> <div><br></div> <div>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div> <div>우리 가족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영매사 아줌마 집에 가곤 한다.</div> <div>처음에 말했듯, 우리 집안 자체가 그런 집안이라서.</div> <div>그래서 그때 그 아줌마한테 슬리퍼 이야기를 했더니, 아줌마가 신묘한 표정을 짓더니 한 마디 했다.</div> <div>"큰일날 뻔 했네"</div> <div>뭐가요? 하고 물어봤더니 놀랍게도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div> <div>일단, 난 당연히 슬리퍼를 건드리는 게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두 사람이었던 것이다.</div> <div>한 사람은 정돈해주는 사람이었다.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한다.</div> <div>나머지 한 사람이 어지럽히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나에게 악의를 품었던 것이다.</div> <div>그 아줌마 말이, 귀신이란 건 사람이 "무서워" "제발 용서해줘" "살려줘" 이런 식으로</div> <div>공포와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는 틈을 타는 존재라고 한다.</div> <div>날 공격하려던 귀신은 내가 무서워하길 기다리고 있었는데,</div> <div>난 원체 익숙하던지라 무서워하기는 커녕 "고마워"라고 하니</div> <div>"이 놈은 글렀어"라고 생각해서 나간 거라고 한다.</div> <div>그때 만약 내가 "고마워"가 아니라 "미안"이라고 했다면 어땠을까.</div> <div><br></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