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br><font size="3"></font> <div style="text-align:left;">재미진 동유럽, 발칸이야기입니다. <br></div><br>3차에 걸친 폴란드 분할의 결과로 성립된 국가를 다룹니다. <br><br>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괴뢰국이라고 볼 수 도 있게지만, <br>근대 이전 유럽에서는 동양과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합병된 영토를 관리했습니다.<br>아예 새로운 작위를 만들어 군주가 겸임하던가 아니면 기존의 작위를 군주가 겸임하는 식으로 말입니다.<br><br><font size="5">1. 러시아령 폴란드</font><br><br> <font size="4"><b>Congress Poland (폴란드 의회왕국 혹은 폴란드 입헌왕국)</b></font><br><br><div style="text-align:left;"><img width="431" height="286" class="chimg_photo" style="border:medium none;" alt="Merchant_ensign_of_Vistula_ships_of_Congress_Poland.svg.pn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603/1457164883uGuyVBisv9RGf.png"></div><font size="3"></font> <div style="text-align:left;"><br>폴란드 의회왕국의 국기인데, 폴란드왕의 상징인 흰독수리가 인상깊네요.<br><br><br><div style="text-align:left;"><img width="478" height="408" class="chimg_photo" style="border:medium none;" alt="Karte_kongresspolen.pn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603/1457165385UG24RVjanDMqFZMno1rJAKxU.png">붉은 별이 있는 곳이 의회왕국의 영토입니다.<br><br><font size="3">폴란드 재분할이 이루어진 1815년의 파국 이후에 빈 회의에서 공인된 폴란드 의회왕국은 1867년 러시아에 의해서<br>사실상 통합된 이후에도 1915년까지도 명목상으로는 존재한다고 믿어진 국가였습니다. <br>이후 1차세계대전 도중 이곳을 점령한 동맹국이 1918년까지 존재할 괴뢰국인 폴란드 섭정왕국을 세울때까지.<br><br>1815년 통합 이후에 폴란드 의회왕국은 자유주의적 헌법이 유지되며 상당한 자치권을 보유한 상태였으나<br>1815년을 기준으로 보면 자유주의적 헌법아래 지배되된 폴란드는 독립적인 하원을 가지며<br>독립된 폴란드군을 보유하며 통화제도, 예산, 형법 또한 러시아와는 다른 독자적으로 운영하기로 명시되었고<br>폴란드는 러시아를 포함한 관세권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총독을 보좌하여 통치를 돕는 국가위원회를 <br>구성하는 등 통치에 있어서도 폴란드인들의 참여가 보장된 편이었습니다. <br>그러나 러시아의 짜르는 대개 그러한 자치권을 무시하는 편이었습니다. 비슷한 방식으로 통치된 <br>핀란드의 경우에는 자치권이 존중되는 편이었으나, 폴란드는 핀란드와 달리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강하고 <br>러시아의 지배기간 동안 끊임없이 불협화음을 냈기 때문이었습니다.<br><br>러시아의 짜르는 총독을 파견하여 폴란드 의회왕국을 통치하였는데, 1819년에는 헌법에 명시된<br>언론의 자유가 폐지되고 검열제도가 도입되었으며 비밀경찰제도가 운영되었습니다. <br>또한 이 시기 러시아어를 폴란드에 보급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는데 이것은 폴란드인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br>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br></font><br><font size="3">그나마 명목상으로 부여된 자치권도 1830년에서 31년 일어난 독립운동, 반란으로 상당히 축소되었습니다.<br>이 반란은 짜르에게 헌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었기 때문에, 이것이 진압된 직후인<br>1832년 짜르는 폴란드의 헌법, 의회, 군대를 폐지하고 총독이 사법권을 독점하여 재판없이 사형선고를 <br>내릴 수 있게 하는 등 폴란드와 러시아의 결속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br>1863년~1865년간의 폴란드 1월 봉기가 잔혹하게 진압된 후 1867년 폴란드 의회왕국의 모든 국가기관은<br>러시아제국과 통합되었으며, 폴란드 왕위는 명목상 작위로 남게됩니다.<br><br></font><font size="3"><font size="5">2. 프러시아령 폴란드(독일령 폴란드)<br></font></font><font size="3"><font size="4"><b> <br> Grand Duchy of Posen (포젠 대공국)<br> </b>ㅇ<b></b></font></font> <div style="text-align:left;"><b></b> <div style="text-align:left;"><b><img width="386" height="257" style="border:medium none;" alt="Flagge_Preußen_-_Provinz_Posen_(1815).svg.pn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603/1457167242xrnBZ8IPlxIBwq8ZCBM52NuIEt.png"><br><font size="3">백색 부분이 구별이 잘 안되서 검은선으로 표시했습니다.</font><br><br></b></div><b></b> <div style="text-align:left;"><b><img width="309" height="271" style="border:medium none;" alt="684px-Grand_Duchy_of_Posen_(1848).svg.pn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603/1457167241UBapWykzvtzUtHMjzR8XQRgvViZt9.png"><br><br></b></div><b></b></div><b></b><font size="3"> 프러시아왕국의 일부로 편입된 포젠대공국은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후 1815년 빈회의에서 성립된 국가입니다.<br>포젠 대공국 또한 빈회의에서 보장된 일정한 자치권을 누려야 했으나 실제로는 프러시아 종속되어있었습니다.<br>프러시아 정부는 이 지역의 독일화를 추진하고 독일인의 우월적 지위를 위해 사법, 교육 등의 분야에서<br>폴란드인을 배제하였습니다. 1824년에는 폴란드인들이 포젠에 대학교를 설립하려는 운동이 프러시아의 반대로<br>실패로 돌아갔습니다.<br><br>1830년에 폴란드 의회왕국에서 일어난 반러시아 반란에 포젠의 폴란드인들이 대거 참여하거나 지원하였기 때문에<br>프러시아 정부는 포젠대공국에서 유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과 폴란드 인들의 독립 열망을 꺽기 위해 <br>강력한 탄압을 가했습니다. 1832년에는 폴란드어의 사용의 억압되고 폴란드인들의 전통적인 지도자인<br>폴란드인 귀족들을 억압합니다. 폴란드인 귀족의 재산이 강탈하거나 가톨릭 수도원을 몰수 하는 등 폴란드인들의<br>구심점이 될 수 있는 세력들을 거세합니다. 또한 강탈한 지역에는 독일인을 이주시키거나 독일인을 중심으로하는<br>통치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폴란드인들을 억압하려고 했습니다.<br>이 결과 1848년에 이르면 포젠대공국 내의 1/3은 독일인으로 채워졌습니다.<br><br>1849년 2월 포젠대공국은 폐지되고 프로이센의 일부인 포젠주로 격하되기 때문에 포젠 대공은 1918년까지<br>명목상의 작위로 남게됩니다.<br><br><font size="5">3. 오스트리아령 폴란드<br><br><font size="4"> <b>Kingdom of Galicia and Lodomeria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b></font><br></font><br></font> <div style="text-align:left;"><img width="365" height="243" style="border:medium none;" alt="450px-Flag_of_Galicia_(Central_Europe,_1849-1918).svg.pn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603/1457168330lgrptXdUZ.png"></div> <div style="text-align:left;"><img width="441" height="333" style="border:medium none;" alt="Galizien_Donaumonarchie.pn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603/1457168331cPEKSBP1.png"><br><font size="3"><br>위의 2개의 국가가 1815년 이후에 성립된 것에 반하여 갈리치아-로도메리아는 1772년 제 1차 폴란드 분할때<br>오스트리아에게 넘겨진 조각에서 성립된 국가입니다. 또한 2개의 국가가 명목상의 국가가 된 반면에<br>이 국가는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차대전 패전으로 사라질때 까지 존재했습니다. <br>이것은 국가 운영에 있어서 보수적이었고 급격한 변화를 지양하는 전통적인 제국이었기 때문입니다.<br><br>이 지역은 위의 2개 국가와 여러가지 점에서 상이했는데, 그 중 하나는 왕국에서 폴란드인은 약 절반 정도이고<br>나머지 절반은 폴란드 귀족들에게 지배되는 루테니아(서부 우크라니아인)인 이었다는 점입니다.<br>이 지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에도 낙후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농노제가 상당히 잔존하고 있었습니다.<br>그렇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의 오스트리아 황제의 개혁은 농노제의 철폐와 봉건제도의 철폐에 집중됩니다.<br>폴란드인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키는 등 반발했지만, 폴란드-루테니아 하층민의 지지 속에서 개혁이 <br>취해지게 됩니다. 또한 위의 국가들과는 다르게 민족문제에 온건하고 미숙한 오스트리아는<br>독일어를 보급하거나 구제도를 강제로 변하게 하지 않고 많은 관습을 존중했고 언어를 비롯한 종교적 자유도<br>인정하고 자치도 어느정도 수준에서 허용했디 때문에 이 지역에사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제에 대한 지지는 <br>상당히 높은 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역의 하층민들은 제국군에 입대하는 비중도 상당히 높았습니다.<br>또한 이 지역의 저항운동의 난점은 폴란드인과 루테니아인의 관계설정에도 이유가 있었습니다.<br>폴란드인들은 루테니아인들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br>루테니아인들은 그런 행동을 불쾌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br><br>그러나 이 지역은 낙후된 농업지대였고 산업기반이 부족했기 때문에 지방정부의 부채수준이 높은 등<br>제국 운영에 상당한 난점이 존재했습니다.</font><br><br><font size="5">4. 자유영토<br></font><br> <font size="4"><b> Free City of Krakow (크라쿠프 자유시)<br></b></font><br><div style="text-align:left;"><img width="600" height="400" style="border:medium none;" alt="600px-Flag_of_Krakow.svg.pn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603/14571693273ySeVhVJtAmDWF.png"></div> <div style="text-align:left;"><img width="434" height="337" style="border:medium none;" alt="Rzeczpospolita_Krakowska_1815_EN.pn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603/1457169327SNymbpMpk1WJXCqKxEKbLVQl3PY.png"></div><br><font size="3">1815년 빈회의에서 성립된 크라쿠프 자유시는 1846년 폴란드 독립을 요구하는 크라쿠프 봉기가<br>러시아-프러시아-오스트리아에 의해 진압되어 갈라치아-로도메리아의 일부가 될 때까지 존속한 자유시입니다.<br>자유시는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에 의해 독립을 보장받았고 독자적인 자유주의 헌법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br>또한 크라쿠프에 있는 1364년부터 설립된 야기에우워 대학교는 분할된 지역의 폴란드인들이 몰려들었고<br>그렇기 때문에 자유시는 폴란드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830년 봉기가 실패한 후<br>자유시의 독립성은 훼손되었습니다. 자유시의 대통령은 선거를 거친 후 러시아-오스트리아-프러시아의 승인을<br>받아야했으며 경찰권은 오스트리아에 의해 박탈되었습니다. 직후 크라쿠프에서 일어난 봉기의 실패로<br>1836년부터 1841년간 오스트리아 군대가 크라쿠프에 주둔했고 1846년 일어난 크라쿠프 봉기의 실패로<br>오스트리아와 러시아와의 협약에 의하여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로도메리아의 일부가 되었습니다.<br><br>자유시는 독립기간 동안 폴란드의 상업 중심지 였으며 면세지역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br>풍요로운 지역이었습니다. 정치적인 이유와 경제적인 이유로 폴란드 전역에서 이주자가 몰려들었고 <br>유대인 또한 도시인구의 14%를 차지할 정도로 많이 거주했습니다.<br></font><br><br><br>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br></div><b></b></div></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