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b>태조는 발해멸망 초기에 발해유민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b></div> <div><b>남쪽으로 후백제와 대립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북방의 거란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b></div> <div><br></div> <div>그러나 두가지 측면에서 이 입장에 변화가 오게 됩니다.</div> <div><br></div> <div><u>첫번째는 북방변경에 자주 출몰하던 여진족 문제였습니다.</u></div> <div>발해가 존속하던 시기부터 남으로 퍼져 나오기 시작한 여진은 고려 건국초에 두만강유역과 그 이남 그리고 압록강 일대에 흩어져있었으나</div> <div>발해멸망이후 남하하면서 고려의 북방변경을 교란시켰습니다.</div> <div><br></div> <div><u>둘째는 북방개척을 위해 평양과 그 인근으로 이주시킨 패강진의 군사호족과 백성들로 인해 그 남쪽에 군사공백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u></div> <div>원칙대로 한다면 이 패서지역을 채우기위한 남방지역에서 사민이 필요하겠으나, 당시 백제와의 대치상태를 고려할때 이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div> <div>( 패서지역에서 서북방으로의 사민은 서북방을 강화시키긴 했으나, 동북방이 강화된게 아니었으므로 동여진이 경제적으로 활발한 패서지역으로 접근을 용이하게 만들었습니다 )</div> <div><br></div> <div>이 상황에서 패서지역을 수비하기 위한 자원으로서 발해유민의 역할이 부상하게 되었습니다.</div> <div><br></div> <div>고려사에 발해유민이 고려에 투항하는 기록이 나오는 시기는 발해가 멸망하기 전인 925년(태조8년)이었습니다.</div> <div>발해인의 투항은 태조대에 집중되었고 이후 예종 재위대까지 이어집니다.</div> <div><br></div> <div>태조는 고려로 귀순하는 발해 유민을 제한 없이 받아들였습니다.</div> <div>이때 귀순한 발해 유민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고려사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수 만명을 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div> <div><br></div> <div> <div style="text-align:left;"><im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602/14556090595XkG78mfn2BKefFtF5QtHZ.png" width="499" height="299" alt="1.PNG" style="border:none;"></div></div> <div><br></div> <div>일례로 조선후기 실학자 유득공 柳得恭 은『발해고 渤海考 』에서 발해 유민이 10여 만명이라고 기록했습니다.</div> <div>이러한 대규모 유민의 합류는 고려의 인구 증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걸로 보입니다.</div> <div><br></div> <div>고려가 발해 유민에 대한 대우가 달라지기 시작한 시점은 후삼국 통일 직전부터였고</div> <div>태조는 934년에 발해국 세자 대광현 大光顯 의 투항을 크게 환영하였죠.</div> <div><br></div> <div>태조는 대광현에게 ‘왕계 王繼 ’라는 이름을 내려 고려 왕족에 편입 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막료와 군사들에게까지 논밭과 집을 하사하는 특전을 내렸습니다.</div> <div>그리고 원보 元甫 라는 벼슬을 주어 북계의 전략상 요지인 배주 白州 황해도 배천 를 지키게 하는 등 각별한 우대를 하였습니다.</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