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형적혈구빈혈증이란 적혈구가 정상적인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뾰족하고 긴 낫 모양으로 발생하게 되는 유전병입니다.
헤모글로빈 단백질을 이루는 아미노산 한 분자가 정상과 다르게 바꿔치기돼서, 원래 따로따로 놀아야 할 헤모글로빈이 서로 사슬구조로 달라붙기 좋게 변해버린 병입니다. 길고 긴 DNA 코드 중 하필 그 자리의 알파벳 한 두 글자가 바뀐 것만으로 이런 영향이 생기기도 합니다.
작고 길쭉하게 변한 불량 적혈구들이 모세혈관을 막아 혈액순환이 어려워지고 정상 적혈구도 쉽게 파괴되는 병입니다. 빈혈이라고 단순히 기운만 없어지는 철결핍성 빈혈 같은 게 아니라 자주 전신적인 고통을 겪고 신장/비장 등 장기의 손상도 초래하는 심각한 병입니다. 산소분압이 떨어졌을 때 증상이 발생합니다.
현대의학의 수혜를 많이 누릴 수 있는 환경이라면 40~60세까지 살 수 있지만, 1973년 미국에서는 기대 여명이 14년밖에 안 되었다고 합니다. 말라리아 창궐 지역에서 자연적으로 지낼 땐 더 심각하게 낮겠죠? 흔히 말라리아 저항성으로 인해 진화적으로 선택된 특질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래서야 말라리아 저항성이고 뭐고 자체적인 피해가 너무 심각합니다.
말라리아 창궐 지역에서는 말라리아에 걸려 죽든가, 아니면 겸형적혈구빈혈증으로 고통받으며 비실비실 쓰러져 있는 채로 좀 더 살다가 역시 죽든가
둘 중 하나인 걸까요? 최악 아니면 차악?
말라리아 저항성 때문에 겸형적혈구 빈혈증이라는 '병'이 진화적으로 선택되었다고 오해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1 이렇게만 설명하고 끝내면 곤란하다는 것
보다 정확히 말하면
겸형적혈구빈혈증이라는 '병'이 자연선택에 의해 번성한 것이 아니라,
겸형적혈구빈혈증 '유전자'가 자연선택에 의해 번성했다고 해야 맞습니다.
말라리아 병원충은 겸형적혈구에만 못 들어가는 게 아니라, 겉보기에 거의 정상인 운반자carrier의 적혈구에도 못 들어가거든요.
(또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못 들어가는 게 아니라 들어가서 보금자리삼을 적혈구가 개복치마냥 픽 죽어버립니다)
이 병도 상염색체 유전자 하나에 의해 생기는 유전병이니 ABO혈액형처럼 유전형을 따져볼 수 있습니다.
정상 헤모글로빈 유전형을 A
겸형 헤모글로빈 유전형을 S라고 하면
AA인 사람은 정상인
SS인 사람은 겸형적혈구'빈혈증' 환자인데,
AS인 사람은 겸형적혈구'특성' 보유자라고 불립니다. 유전형으로 보면 운반자에 해당하죠.
이 사람들은 빈혈증 환자들과 달리 일상생활에 큰 지장은 없으나, 겸형적혈구가 약간씩 생겨나며
산소가 희박한 고산지대에 간다거나 격렬한 운동을 한다거나 해서 적혈구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쉽게 파괴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말라리아 병원충이 침입해서 적혈구가 스트레스를 받아도 적혈구가 쉽게 파괴됩니다.
바로 이 운반자들이 겸형적혈구 유전자S의 저항성 특질의 수혜를 온전히 받는 주역입니다.
유전병 유전자가 하나뿐이라 유전병을 일으키기엔 부족하지만 말라리아를 내쫓기엔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우열관계를 따져 볼 때, S는 A에 대해서 열성이라고 기계적으로 암기해왔던 분들이 많겠지만
말라리아 저항성은 오히려 우성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적혈구 형태는 정상/겸형 둘 다 있으니 공우성이구요.
도표로 정리하자면
유전적 우열관계란 이처럼 한 유전자 내에서도 어떤 특성에 관해 논하느냐에 따라 복잡하게 달라지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