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서자 출신으로 아무런 배경도 없이 배짱과 지략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고,</P> <P>예종 때는 남이의 역모사건을 처리하여 공신이 되고,</P> <P>성종 때는 인수대비와 한명회의 탄압으로 고생하면서도 폐비윤씨의 지킴이 노릇을 하며 성종을 보좌하고,</P> <P>연산군 때는 폐비윤씨를 죽인 세력들을 쓸어버리며 연산군의 충신노릇을 하다가,</P> <P>나중에는 연산군의 폭정으로 밀려나 있으면서 반정세력에 가담하여 중종반정을 성공시켜 공신이 되었지만,</P> <P>집단으로 달려드는 반대세력들에게 시라소니처럼 홀로 뛰는 유자광은 결국 꺾여서 귀양살이하다가 죽었지만 칠십이 넘어서 죽었으니,</P> <P>다섯 왕에게 유력한 신하노릇을 하며 버틸 만큼 버텼다고 볼 수 있다.</P> <P>훈구파나 사림 모두에게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로서 서자라고 멸시당하는 입장이라 왕의 신임만을 얻어서 지탱해야 하기 때문에,</P> <P>공격수 노릇만 하며 살았던 나름대로 아주 치열하게 살다간 사람이다.</P> <P> </P> <P>그럼 유자광이 주도한 사건이 남이사건, 무오사화, 갑자사화가 있는데 고정관념을 깨고 다른 관점에서 한 번 살펴 본다.</P> <P>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유자광에 대한 시각은 나쁜 것 일색인데 그 원인은 '남곤'이란 사람이 쓴 '유자광전기'의 영향이 크다.</P> <P>남곤은 남이의 친척으로 영남의 사림인데, 남이가 모함당해서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해서 유자광에 한이 맺혀 일방적인 비난을 하고,</P> <P>그 이후에 영남사림들이 주도권을 가졌기 때문에 그 시각이 지속되고 민간에서는 남이를 영웅시하는 풍조까지도 나타나며 유자광을 매도하였다.</P> <P>그런데 야사에서는 남이가 모함당했다고 하지만 정사에서는 남이는 역모를 기도한 것에 반론이 없고, </P> <P>유자광도 살아있을 때 이 일로 공격 받지는 않았다.</P> <P>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남이를 체포하려 갔을 때 남이는 담을 넘어 도망치면서 저항하다가 잡혀서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P> <P>떳떳했으면 도망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남이는 무인으로 성격이 거칠고 거만한데다 당시 정세에서 반역을 할 개연성도 충분히 있었다.</P> <P>남이는 나중에 일족의 고위층에 의해 복권된다.</P> <P>무오사화는 사림파들을 제거한 사건인데 경위는 이렇다.</P> <P>유자광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부하직원인 현감 김종직이 상사가 쓴 시현판을 불태워버리면서 시작한다.</P> <P>김종직은 유자광이 직속 상사이지만 서자이며 말단 향리의 사위이며 무관출신이 시를 써서 걸어놨다고 비웃으며 멸시하여 불태워 버리니,</P> <P>김종직이 먼저 원인제공을 한 것이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감정이 안 생기는 사람은 없다. </P> <P>그런데 마침 '조의제문'시가 문제가 되는데 항우가 죽인 초나라의 의제에게 조의를 표한다는 것이지만,</P> <P>한편으로는 단종을 죽인 세조를 겨냥한다고도 볼 수 있다. </P> <P>그러는 김종직은 세조 때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하다가 나중에는 부정축재를 한다고 탄핵을 받기도 한다.</P> <P>유자광은 이걸 자신이 사림들에게 당한 모욕을 복수할 기회로 삼고 김종직을 부관참시하며 사림들을 숙청해버린다.</P> <P>또 한편으로는 세조가 자신을 발탁하여 총애를 받았으니 세조와 대한 충성심도 약간은 작용했을 수도 있다.</P> <P>왕조시대에는 왕에 대한 이런 비판은 누구라도 대역죄에 해당하는 중죄로 다스려지는 풍토이다.</P> <P>갑자사화는 폐비윤씨의 지킴이 노릇을 했기 때문에 연산군이 실상을 알면서 앞장서서 폐비윤씨를 죽인 세력을 숙청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고.</P> <P>연산군 때는 초기에 신임을 얻고 잘 나갔지만 말기에 폭정으로 밀려나 있으면서 때를 기다리다가,</P> <P>반정주도 세력과 연결되면서 반정세력 측에서도 유자광 같은 유력자가 동조하니 큰 힘이 되어 또 공신이 되었다.</P> <P>이런 사건들 속에서 유자광은 절대적인 악인으로 행동한 것도 없고, 없는 사실로 무고한 한 것도 없다.</P> <P>당대의 지배세력들 간에 투쟁은 있기 마련이고, 다들 자신의 사리사욕과 당파의 이익을 위해 서로를 싸우고 있으면서 </P> <P>유독 유자광에게만 돌을 던지는 것은 불공평하다.</P> <P>유자광전기를 쓰면서 유자광을 간신이라고 비난한 남곤도 기묘사화의 원흉으로,</P> <P>'주초위왕'이라는 거짓 모함을 하여 더 악질적인 사람으로 평가 받는다.</P> <P> 김성일도 일본에 정세를 파악하는 부사로 갔다가 당파의 입장에 서서 일본이 침략 안할 것이라고 거짓 보고를 하여 </P> <P>임진왜란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으로 악명을 떨쳤지만 영남사림에서는 존경받는 인물로 받들여 모셔지고 있다.</P> <P>그러나 유자광은 국방대책에 심혈을 기울이고 좋은 일도 많이 했고 인품도 괜찮다.</P> <P>원래 무인 출신이라 국방에 신경을 많이 써서 진주성 남원산성 행주산성 의주성 등을 신축하고 보수하며 왜적에 대비하고 명나라도 견제했다.</P> <P>왜군의 배를 연구하고 동래에 귀양가서는 부산의 물길을 연구하여 후에 이순신장군이 이를 참고하여 승리를 거두는데 일조를 하기도 했다.</P> <P>예술에도 조예가 있어서 악학궤범을 성현 등과 함께 편찬하였는데, 성현이 작업 도중에 외직으로 나가게 되자 왕에게 진언하여 발령을 취소하고 책편찬에 전념케 하였으며 악학궤범 원본표지에는 유자광이 대표편찬자로 나오는데 유자광은 쏙 빼고 성현 저작으로만 인식되고 있다.</P> <P>연산군 시절에는 사옹원의 제조로 있으면서 부하직원들이 왕의 밥상을 너무 많이 차려서 무거우니 가볍게 하라고 했다가 연산군한테 혼나기도 하고 도공들을 아끼도록 건의하는 등 당시 양반들이 하인들을 사람취급도 안하던 시절에 애민정신이 있었던 사람이다.</P> <P>한글을 보급 장려하도록 상소도 올리고 귀양가서는 지역민에게 한글도 가르치고, 최초의 한글시 정읍사를 발굴하여 악학궤범에 실은 공도 있다. </P> <P>유자광이 위세가 있었을 때는 한글이 사용되는 분위기가 있었으나 힘이 없을 때는 사대주의자들에게 공격 당하며 한글이 배척된다.</P> <P>도예에 관심이 많아서 고향 남원에 도요지집단을 만들어서 우리나라의 도자기 실력을 높이고 이 출신인 심수관이 일본에 끌려가서 지금 일본의 도자기 명가가 된다. </P> <P>귀양가서도 탐관오리의 부정부패를 지적하며 상소를 올리기도 하고 한명회를 탄핵하다가 한명회에게 도리어 모함 당해서 곤욕도 치룬다.</P> <P>훈구파나 사림파나 서로 온갖 권모술수를 부리며 파벌싸움을 하고 사리사욕을 위해 혈안이 된 당시의 정치판에 유자광만 비난하며 악인으로 인식된 것은, 서자출신에 배경도 없고 파벌도 없어서 옹호해주는 세력이 없었을 뿐이다. </P> <P>남이는 집안도 좋고 배경도 좋아서 그들이 노력해준 덕분에 대장부로 인식되고 있는데...</P> <P>유자광에게 크게 당한 영남사림들이 그후로 정권을 계속 잡으면서 유자광 죽이기에 열을 올리고 민중들은 뭘 잘 모르니 그렇게 믿으면서 유자광을 희대의 간신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오히려 고리타분한 주자학이나 하면서 당파싸움만 하다가 족벌정치를 하며 결국은 조선을 말아먹는 사림들보단 훨씬 나은 인물이다.</P> <P>소설 '혼불'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자식을 낳으려면 유자광 같은 사람을 낳으라고"</P> <P>작가 최명희도 유자광의 진면목을 알았던 것 같다.</P> <P> </P> <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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