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간단하게 정리하면 만주족 역사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씌여진 책이고 만주족의 전신인 말갈이 고구려의 속신이었다는 사실을 지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신라에 고구려에 편입시켜, 신라의 영토를 과장하고 그 영향력을 과장했다는 말입니다.</div> <div>---</div> <div>만주족과 관련된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 역사를 다루는 사람들에게 “만약 만주족이 옛 고구려인과 발해인의 후손이라는 이론이 사실이라면, 왜 청나라의 군주가 편찬하라고 명령한 역사서(『만주원류고』)에는 고구려사가 독립된 항목으로 안 나오는 거야?”라고 묻는다.</div> <div> </div> <div>실제로 내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만주원류고』를 쓴 사람들은『구당서』를 인용하면서도 “대조영은 원래 고구려의 별종(別種)이다.”라는 구절을 “대조영은 처음에 영주에서 살았다.”로 고쳤고,『삼국지(三國志. 서진의 관리인 진수가 쓴 역사책을 일컫는다)』「읍루전」을 인용하면서도 “그 나라(읍루)는 배를 타고 남의 나라에 쳐들어가 약탈을 곧잘 하므로, 이웃나라는 이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div> <div><br></div> <div>동이(東夷)들이 음식을 먹을 때는 거의 다 조두(俎豆)를 사용하는데 오직 읍루만은 그렇지를 못했고, 법도와 습속에 가장 기강이 없었다.”는 구절은 쏙 뺐다. 그리고 삼한과 백제와 신라의 역사는 독립된 항목으로 자세하게 다뤘지만, 고구려와 고려의 역사는 독립된 항목으로 나오지 않고 스쳐 지나가듯이 나온다.</div> <div><br></div> <div>“역사서에 기술된 고구려의 위용이 엄청나고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서 장기간 존재했으니 중국 한족학자(漢族學者)들은 물론 만주족(滿洲族)에게 조차도 고구려 역사는 경외(敬畏)의 대상일 수도 있고 역사 콤플렉스의 대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div> <div><br></div> <div>건륭황제(이름은 ‘아이신교로 훙리’. ‘애신각라 홍력’은 만주어로는 ‘아이신교로 훙리’라고 읽는다. 아이신교로가 성씨고 훙리가 이름이다 - 옮긴이) 시절 간행된 흠정 만주원류고를 보면 고대국가중 유독 고구려는 빠져 있다. 청나라보다도 더 오래 길고 긴 세월동안 동아시아를 제패한 고구려를 역사의 강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고구려를 내세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div> <div><br></div> <div>오늘날 만주족의 조상인 말갈족이 고구려조(705년), 발해조(228년), 양조(兩朝), 약 933년간에 걸쳐 복속된 경험이 있으니 그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을 만하다(부여까지 합치면 그 기간은 더욱 늘어난다)."</div> <div><span style="color:#ff0000;text-align:justify;">―『金朝使硏究』, 윤명수(尹明洙), 59쪽.</span></div> <div><span style="color:#ff0000;text-align:justify;"><br></span></div> <div><span style="text-align:justify;">만주원류고를 직접 번역한 장진근씨 코멘트입니다.</span></div> <div><span style="text-align:justify;">"</span><span style="font-size:9pt;text-align:justify;"><b>만주</b></span><span style="font-size:9pt;text-align:justify;"><b>원류고』자체가 “여진(女眞)의 각부의 명왕조에 대한 예속관계에 대하여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고, 특히 명조의 통치하에 있었던 건주삼위(建州三衛)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으며, 고증에 있어서도 착오와 부당한 곳이 있을 수 있다</b>"</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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