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10년전에는 이게 파격이었는데, 지금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인정하는 정설이 됐습니다.</div> <div>이제 주류사학계에서 낙랑을 한나라 식민지로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div> <div>단지 처음 생길때 한나라가 주도한 것 뿐이죠. </div> <div><br></div> <div>이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였던 오영찬교수도 지금은 이대로 옮겨 교편을 잡고 있습니다.</div> <div>한마디로 도발적인 젊은 연구자에서 학계 주류가 된거죠.</div><a target="_blank" href="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1/09/2007010900001.html" target="_blank">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1/09/2007010900001.html</a> , 조선일보 2007년 1월 <div> <div>국내 연구자들은 대개 ‘낙랑=한나라(중국)’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낙랑실이 ‘3층 아시아관’에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영찬(39)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 학예연구관이 이 같은 통설에 반기를 들어 학문적 파장이 예상된다. </div> <div><br></div> <div>그는 최근 출간한 ‘낙랑군 연구’(사계절간)에서 “한나라 사람(혹은 문화)과 고조선 사람들은 낙랑군 설치 100여 년쯤 지나 융화됐다. 사서에 등장하는 ‘낙랑인’이 그들이다”라고 주장한다.</div> <div><br></div> <div> <div>반론의 근거는 발굴 결과에 대한 꼼꼼한 분석에서 출발한다. 일제는 1909년 평양 석암동고분을 시작으로 모두 88기의 낙랑 고분을 발굴 조사했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이나 유리건판 사진은 대부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어 연구에 유리했다.</div> <div><br></div> <div>“낙랑이 설치된 뒤에도 고조선의 대표적 무덤형식인 목곽묘(木槨墓·나무로 곽을 만든 뒤 그 안에 관을 넣은 무덤)가 100여 년 동안 지배적인 무덤 양식이었다. 낙랑의 무덤이 모두 한나라 사람의 무덤이라면 왜 이들이 고조선 무덤에 묻혔겠는가?”</div> <div><br></div> <div> <div>오 연구관은 “고조선계 사람들이 한화(漢化)되고, 한인(漢人)들도 고조선에 토착화되면서 벌어진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몇몇 역사서에 등장하는 ‘낙랑인’이라는 표현도 결국은 낙랑지역의 특수성, 즉 서기 1세기 후반에 형성된 ‘낙랑문화를 이룬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라는 것.</div> <div><br></div> <div>“낙랑군 설치 130여 년이 지난 서기 24~30년, 낙랑태수를 살해하고 독립세력을 형성한 왕조(王調)는 역사서에 ‘토인(土人)’으로 적혔다. 그만큼 고조선계의 힘이 컸다는 이야기이다. 낙랑시기가 우리 역사에 어떤 빛과 그림자를 던졌든 낙랑은 우리 역사의 일부분이다.”</div></div></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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