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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나토스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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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history_24357
    작성자 : 다나토스
    추천 : 13
    조회수 : 3173
    IP : 121.169.***.29
    댓글 : 15개
    등록시간 : 2015/12/02 22:07:32
    http://todayhumor.com/?history_24357 모바일
    식문화 5탄 - 전쟁 속의 식문화 (2부)
    이전 글 링크입니다.

    식문화 4탄 - 고대 일본
    식문화 5탄 - 전쟁 속의 식문화 (1부)


    6. 설탕을 유럽에 전파한 알렉산더
      '과거에 온 대륙을 점령하여 가장 큰 영토를 이룩했던 인물'을 꼽아보면 늘 뽑히는 투탑이 바로 칭기즈칸과 알렉산더입니다. 특히 알렉산더는 당시 유럽인들이 인식하는 나라는 '지중해 근처' 밖에 없던 시대에 페르시아까지 땅을 넓히며 헬레니즘 문화를 전파했지요. 하지만 알렉산더의 업적은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설탕, 즉 사탕수수를 유럽에 전파했던거지요.
      기원전 334년, 그리스 북방에 있는 작은 나라인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 알렉산드로스(현대에 이르러서는 부르기 편하게 알렉산더로 바뀜)는 마케도니아-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페르시아 정복에 나섭니다. 하지만 누가봐도 이 전쟁은 승산이 없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역사도 깊었던데다 매우 부유한 대국이었고, 그에비하면 마케도니아는 가난에 찌든 작은 나라일 뿐이었거든요.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알렉산더 왕은 세번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으며, 다리우스 3세의 30만 이상의 병력을 모조리 무찔러버렸습니다. 겨우 5만명 정도의 침략군만으로 말이죠. 이는 당시 페르시아 군대가 경시하던 기병의 육성과(페르시아로 원정을 떠날 때에 군마 약 3만필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페체타이로이' 라는 장창과 방패로 무장한 보병에 의한 최강의 보병 밀집대형(팔랑크스) 덕분이었지요.
    팔랑크스.jpg
    < 페체타이로이 병단에 의한 팔랑크스 전술 >

    이렇게 페르시아 제국을 점령한 알렉산더 왕은 다리우스 3세의 딸과 결혼하기까지 하면서 페르시아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이로인해 서양과 동양(페르시아)의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하게 됩니다.
      동쪽의 최대의 적이었던 페르시아를 무너뜨린 알렉산더는 이제 더 동쪽에 있는 인도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결국 인도를 점령하지는 못했지만, 인도로 쳐들어가는 과정에서 인더스강 유역까지 다다른 알렉산더는 그곳의 원주민들이 사탕수수를 끓여 갈색의 가루를 얻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 가루를 먹어본 알렉산더는 엄청나게 놀랐습니다. "벌 없이도 꿀을 얻을 수 있다니!!!"
    당시의 '단맛'이라는 것은 오직 꿀과 과일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기때문에, 얻기도 힘들뿐더러(제대로 된 보호복이 없던 당시에는 벌집 채집 역시 상당한 위험을 동반한 행위였습니다.) 돈이 많아도 대량생산하기 힘든 매우 귀한 맛이었습니다. 게다가 과일의 단맛은 꿀의 단맛보다 훨씬 약했기 때문에 '농축된 단맛'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곤 꿀 뿐이었던거죠. 하지만 의외로 원산지인 인도에서의 사탕수수의 취급은 그닥 중요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인도에는 꿀이 풍부했기때문에 설탕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거든요. 

    사탕수수.jpg
    < 홍콩 길거리에서 파는 사탕수수. 자른 단면에서 달콤한(사실 좀 구수한) 즙이 나옵니다. >

      이렇게 유럽에 전파된 설탕이지만 당시 유럽인들은 사탕수수에서 즙을 건조시켜 가루를 내는 방식을 몰랐었고, 특히 사탕수수의 재배는 유럽 기후에 맞지않아 전량 수입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설탕의 가격은 어마무시하게 비쌌습니다. 왕이나 귀족만이 먹을 수 있을 정도였으며, 로마시대에는 설탕이 고급 약으로 쓰였으며 같은 무게의 은과 교환 가능했다고 언급할 정도였지요. 설탕은 대상들이 돈을 벌기 위한 최고의 무역품이었으며, 도적이나 해적들은 이 설탕을 최고의 탈취 목표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로마가 분열되고 신흥 세력인 이슬람이 지중해를 점령하면서 설탕 역시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아랍인들은 설탕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사탕수수 재배가 가능한 지역마다 대규모의 설탕 공장을 세웠다고 합니다. 아랍인들은 설탕을 풍요의 상징으로 여겼으며, 술탄은 자신의 궁전 앞에 설탕으로 야자나무 모형을 만들어 전시하기까지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한 설탕으로 만든 과자도 즐겨 먹었는데, 여기서 파생된 상품이 바로 캐러맬입니다. 캐러맬이라는 이름은 "달콤한 소금으로 만든 공" 이란 뜻의 '쿠라트 알 밀' 이라는 아랍어에서 유래되었지요. 아랍인들은 이렇게 만든 캐러맬과 설탕을 독점하여 세계 각지로 수출하였는데, 이걸로 엄청난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설탕은 아랍인들이 생산하는 금과 같다" 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설탕은 유럽의 주식이었던 빵과 매우 어울리는 조미료였고 특히 설탕의 단맛은 오늘날에도 '중독된다' 라고 할 정도니, 당시 유럽인들이 너무 비싸 먹기도 힘든 설탕을 얼마나 원했을지는 짐작이 갈 것입니다. 16세기에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유럽인들이 인도를 찾아 나섰던 이유도 설탕 때문인데, 인도와의 길목을 막아버린 이슬람때문에 설탕과 향신료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다보니 새로운 경로를 찾아서 인도와 직접 거래에 나서려 했던 것입니다. 결국 찾은건 아메리카 대륙이었지만, 이쪽 기후 역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에 매우 적합했기 때문에 스페인은 이곳에서 대규모의 사탕수수 농장을 만들었습니다. 네덜란드 역시 인도네시아에 사탕수수 농장을 세웠고 영국 역시 서인도 제도의 섬 자메이카에 대규모의 사탕수수 농장을 세웠습니다. 영국은 후에 네덜란드를 꺾고 바다의 지배자가 되었고, 특히 영국인들은 홍차에 설탕을 넣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설탕의 재배로 막대한 이익을 보았습니다. 게다가 차를 마시는 풍습이 유럽에 퍼지게 되었고, 신대륙을 통해 초콜릿이 들어오고 과일을 갈아 만든 잼이 유행하게 되면서 무역에서 설탕의 비중은 그야말로 절대적인 히트상품이었습니다.
      한편 당시 별다른 식민지가 없던 독일(당시 프로이센)은, 사탕수수를 대체하기 위한 연구 끝에 새로운 작물을 찾아냅니다. 바로 사탕무이지요. 원래 이 사탕무는 식용이 아니라 소나 돼지의 사료로 쓰였는데, 이를 가열해 설탕을 추출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사탕무.jpg
    < 새로운 설탕의 재료가 되었던 사탕무 >

      사탕무에서 설탕을 얻는 방법은 사탕수수에 비하면 양이 적어 엄청나게 효율이 나쁘긴 했지만, 어쨌든 다른 방법으로도 설탕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보니 이로인해 국제 설탕 시장의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따뜻한 날씨에서만 재배되는 사탕수수와는 달리 비교적 습하고 찬 기후인 유럽대륙에서도 쉽게 재배할 수 있었고, 사탕수수보다도 더 빠르고 쉽게 자랐기 때문에 사탕수수처럼 노예들을 동원한 대규모 농장을 만들 필요도 없었거든요. 특히 사탕무는 프랑스에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 한층 더 각광받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영국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그 유명한 '대륙봉쇄령'을 선언하게 되는데(정작 영국은 식민지덕에 별 타격이 없었고 유럽만 더 타격받았지만), 그로인해 당시 사탕수수 무역의 중심이던 영국으로부터 설탕을 들여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설탕이 없어 홍차나 초콜릿, 커피, 잼 등을 먹을 수 없게 된 많은 사람들이 반발하기 시작했고, 이런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해 나폴레옹은 사탕무를 재배하는 농장은 4년동안 세금을 면제해주기 까지 하면서 적극적으로 사탕무 재배를 장려했던 것입니다. 
      그로인해 유럽은 이후 영국과 다시 교역을 한 이후에도, 사탕수수를 이용한 설탕보다는 사탕무를 이용한 설탕을 더 많이 사용한다고 합니다.


    7. 그리스와 로마 군인들이 즐겨먹던 소시지와 베이컨
      고대 그리스의 눈 먼 음유시인 호메로스가 남긴 <오디세이아>를 보면, 주인공인 아티카의 왕 오디세우스가 트로이로 원정을 떠나 집을 비운 사이 그의 아내인 페넬로페에게 구혼자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어 집을 점거하고 행패를 부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뒤늦게 고향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일단 집을 점거한 구혼자들의 신상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거지로 위장하고 자신의 집에 잠입하는데, 그러다가 마을의 불한당인 이로스라는 자와 시비가 붙어 싸우게 됩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구혼자들은 "저 늙은이(오디세우스)와 이로스 중 이기는 자한테 우리가 모닥불에 굽고 있는 창자 요리를 주겠다" 라고 제안합니다. 그 창자요리란 염소 위장에 돼지, 염소 등의 피와 비계를 넣어 만든 음식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순대 비슷한 건데, 이것이 바로 소시지의 원조입니다. 그리스에선 옛날부터 소세지 비슷한 것을 만들어 먹었던 거지요. 
      지중해의 주도권이 그리스에서 로마로 넘어가면서, 로마인들에게 소세지 만드는 법도 전해졌습니다. 이 소세지를 매우 좋아했던 로마인들은 이 소세지를 더욱 다양하게 발전시켰습니다. 원래 그리스식 소세지는 대부분 돼지 창자에 다진 돼지고기와 피를 넣어서 만들었는데, 로마인들은 돼지고기와 쇠고기를 섞어 만드는 '튀세타' 라는 소세지를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이 튀세타는 이탈리아식 소세지인 '살라미'의 원형이 되었지요.

    살라미-1038x576.jpg
    < 이탈리아의 얇게 썰어먹는 소세지인 살라미. 피자에 들어가는 페퍼로니가 살라미의 일종입니다. >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여 훈제하는 햄과 베이컨도 로마시대에 등장했습니다. 카이사르를 독재자라고 비난하며 로마의 공화정을 반드시 지켜야한다고 주장하던 정치인 카토는 금욕주의적인 인물로 유명했는데, 식탐만은 엄청나게 강했다고 하지요. 그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이 바로 올리브기름과 식초를 발라 훈제한 햄이었다고 합니다. 베이컨도 로마인의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특히 수분을 없애고 바짝 말린 베이컨은 장거리 원정을 자주 떠나던 로마 병사의 군량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역사에 기록된 내용 중 베이컨 먹는 모습이 기록된 일화가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유럽을 지배하는 대 제국을 이루었지만, 아직 가장 큰 적이 하나 남아있었습니다. 지금의 이란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파르티아였지요. 스키타이 계의 기마민족이 세운 파르티아는 사막에서 단련된 날렵한 대규모 기병 군단을 가지고 있었고,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함께 로마를 지배하던 크라수스의 로마군 4만 명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후로도 오랫동안 로마는 이 패배에 대한 설욕의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트라야누스 황제와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를 시작으로 파르티아의 수도를 몇차례 함락시켜 분풀이를 했지요. 파르티아는 이로인해 쇠약해지고 반란까지 겹쳐 멸망하지만, 그 뒤에 사산조 페르시아 라는 새로운 나라가 생겨나면서 또다른 적이 생겨나게 됩니다. 사산조 페르시아는 자신이 고대 페르시아의 정통 후계자라 주장하면서 로마가 점령하고 있던 터키지역과 시리아, 이집트를 내놓고 유럽으로 돌아가라고 선언했지요. 당연히 이 요구를 들어줄리가 없던 로마는 전쟁으로 대응했고, 이 두 제국은 400년에 걸쳐 긴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그러나 보병이 주력이던 로마는 기병이 중심이던 페르시아를 이기기 힘들었고, 결국 260년 로마의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전쟁에 참여했다가 완패하고 페르시아에게 생포당하는 치욕을 겪게 됩니다. 로마인들은 과거 파르티아에게 졌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고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지요. 이 복수의 선두에 섰던 이가 바로 페르시아 원정에 나선 카루스 황제였습니다. 카루스 황제가 페르시아 국경에 다다랐을 무렵 페르시아 사절단이 황제와의 회담을 요청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마침 저녁시간이라 로마군은 한창 저녁밥을 먹고있을 때였지요. 황제가 머무는 막사를 찾아간 페르시아 사절단은 제왕임을 나타내는 자줏빛 망토를 걸친 한 늙은 군인이 풀밭에 앉아 딱딱하게 말라붙은 돼지고기와 완두콩이 담긴 그릇을 들고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원래 군인이었던 카루스 황제는 평소에도 군인들이 먹는 검소하고 절제된 음식을 주로 먹었는데, 그가 먹던 돼지고기 조각이 바로 베이컨이었던 거죠. 카루스 황제는 로마군을 이끌고 페르시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거두었지만, 사막 한복판에서 번개를 맞는 기이한 죽음을 당해 결국 로마군은 후퇴하게 됩니다.
      이렇듯 햄과 베이컨은 군인뿐만 아니라 황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로마인들에게 사랑받는 식재료였고, "로마는 빵과 서커스로 유지된다.(로마 귀족들이 복지정책은 뒷전으로 미룬 채 자극적인 구경거리로 시민들의 시선을 돌리게 하는 것을 풍자함)" 라는 말을 했던 시인 유베날리스도 '손님이 오면 항상 베이컨을 꺼내 대접한다' 라고 했을 정도로 베이컨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 중세로 접어들면서 이 소세지와 햄, 베이컨은 유럽 전역에 퍼져 일상적인 음식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특히 독일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소세지를 만드는데, 그 종류가 무려 3천 가지나 된다고 하네요.

    베이컨.jpg
    < 베이컨을 사용한 이탈리아의 파스타 요리 >


    8. 메리 스튜어트와 오렌지 마멀레이드
      서양사람들은 아침식사로 주로 빵에 잼을 발라서 먹는데, 서양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잼 중 하나가 바로 오렌지로 만든 마멀레이드 입니다. 이렇게 과일을 달게 절여 만드는 과일 잼은 언제, 어디서 탄생했던 걸까요?

    마멀레이드.jpg
    < 오렌지 껍질과 과육으로 만드는 마멀레이드 >

      먼저 잼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에서였습니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후식으로 꿀에 절인 사과를 즐겨 먹었는데, 이것이 바로 잼의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를 정복한 로마인들은 곧 이 과일절임 요리법을 배워갔고,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비잔티움 제국으로 이어졌지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는 고관대작들과 연회를 벌일 때 유자껍질이나 사과, 배 등을 설탕에 절여서 후식으로 제공했다고 합니다. 11세기 말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면서 서유럽의 기사와 상인들이 비잔티움 제국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들을 통해 과일절임 요리법이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5세기 말에는 드디어 섬나라 영국에도 이 과일절임이 전해지게 되지요. 마멀레이드 라는 이름도 이 무렵에 생겼는데, 원래는 포르투갈어인 'marmelada'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마멀레이드는 주로 유자나 레몬을 설탕에 절인 유자차 같은 거였는데, 1561년에 이르러 오렌지껍질과 속살을 설탕에 절여 만든 오렌지 마멀레이드가 첫 등장하게 됩니다. 이 마멀레이드를 만든 주인공은 바로 영국 역사에서 유명한 여왕 메리 스튜어트 입니다.
      지금은 영국이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어있지만, 불과 3백년전만 해도 영국은 남부 잉글랜드와 북부 스코틀랜드의 두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지금도 두 지역의 사이가 매우 나쁠정도니, 당시엔 허구한날 전쟁을 하던 나라였지요. 재미있는 건 그렇게 사이가 나쁘면서도 두 왕실끼리는 서로 정략결혼을 자주 하여 가까운 친척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입니다. 뭐 중세유럽이 원래 그런 정략결혼이 다반사였지만 말이지요.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4세는 잉글랜드 왕 헨리 8세의 여동생인 마거릿 공주와 결혼하여 아들 제임스 5세를 낳았고, 제임스 4세가 잉글랜드 군대와 싸우다 전사하자 제임스 5세가 왕위를 잇고 프랑스 출신인 마리 드 기즈와 결혼하여 자식을 얻었는데, 그 아이가 바로 메리 스튜어트 였습니다. 하지만 메리 스튜어트가 태어난지 겨우 6일만에 제임스 5세까지 전쟁 중에 얻은 병으로 사망해버리자, 그녀의 어머니인 마리 드 기즈는 딸 스튜어트를 자신의 친정인 프랑스로 보내 어린 왕자인 프랑수아와 결혼시킵니다. 그리고 프랑수아는 14살의 나이로 프랑스의 왕이 되었고, 당시 17살이던 메리 스튜어트도 여왕이 되었지요. 하지만 기구하게도 남편인 프랑수아마저 1년 후에 사망하고 그의 동생이 왕위를 잇게 되자, 메리 스튜어트는 매우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남편도 없어, 아버지도 안계셔, 어머니는 딴 나라에 계셔, 게다가 자신의 출신은 스코틀랜드인데 지금 있는곳은 아무 연고도 없는 외국이었거든요. 권력을 잃어버린 채 과부 신세로 쓸쓸하게 궁정에서 지내던 스튜어트는 결국 아버지의 나라인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여왕이 되기로 합니다.
      그리하여 1561년 8월, 메리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하지만 저번 럼주편에서도 말했다시피, 당시의 선상생활이란건 전혀 쾌적한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스튜어트의 나이는 고작 19살이었기 때문에 한창 감수성이 민감할 나이었고, 선상 생활도 불편한데 뱃멀미까지 겹쳐 우울증이 깊어져버린 그녀는 나중엔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였지요.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보다못한 주치의가 한 가지 해결책을 내놓았습니다. 마치 상큼한 비타500으로 기운충전을 하듯이, 오렌지로 마멀레이드 잼을 만들어 매일매일 그녀에게 먹였던 것입니다. 단맛은 우울함을 없애주고, 설탕의 당분은 피로를 줄여주는 역할을 하지요. 덕분에 메리 스튜어트는 선상 생활을 무사히 이겨내고 스코틀랜드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 후 그녀는 300여명의 신교도들을 이단으로 몰아 화형에 처하는 등 '블러드 메리' 라는 이름으로 공포정치를 펼치다가 처형당하게 되니, 참 얄궂은 일이지요.
      메리 여왕은 죽었지만 그녀로부터 시작된 마멀레이드 잼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엘메1.jpg
    < 시대를 풍미하던 두 여왕,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좌)와 스코틀랜드의 메리 스튜어트(우)  >

      영국에서 사랑받던 마멀레이드는 1620년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미국을 세우게 되면서 한층 더 현대의 잼의 모습과 가까워지게 됩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했던 이주민들이 사과에서 짜낸 펙틴으로 젤리처럼 찐득찐득한 잼을 만드는 방법을 발견해냈던 것이었죠. 그리고 1805년에는 프랑스에서 병에 넣어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하는 병조림이 등장하였고, 이것을 계기로 과일 잼을 병에 넣는 방식이 시도되었습니다. 1917년 폴 웰치가 설탕에 버무린 포도를 끓여서 졸인 다음 펙틴을 첨가해 유리병에 넣고 봉했는데, 이것이 세계 최초로 상용화된 포도잼이었습니다. 

    포도잼.jpg
    < 빵에 발라먹는 포도잼 >

      1, 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잼은 전쟁터에 나간 미국인들에게 배급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서, 병에담긴 잼도 전세계로 널리 퍼져나갔죠. 한국에서 잼이 가공식품으로 정착되었던 것도 미군들의 영향이었습니다. 현재 전 세계 과일 잼 생산량의 80%가 미국이 만들고 있다고 하네요. 인기상품인 포도잼과 딸기잼, 마멀레이드 외에도 산딸기잼, 살구잼, 복숭아잼 등도 만들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9. 소주와 설렁탕을 고려에 전파한 몽골의 세계정복
      현재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술은 단연 소주일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술이던 막걸리와 청주는 소주의 인기에 밀린지 오래이지요. 이 소주가 한국의 '국민 술' 이라면, 설렁탕은 '국민 영양식' 정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설렁탕이 좀 비싸졌지만, 10여년 전만 해도 자장면과 함께 싸고 대중적인 점심메뉴였지요.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주와 설렁탕은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이 아닌 침략자인 몽골인들이 전해준 음식이었습니다.
      13세기 초, 고려는 새로이 등장한 강력한 몽골제국에 의해 수십년간 침략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당시 고려는 잔뜩 부패해가고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강화도로 도망쳐버리기까지 했지요. 그리고 방어는 커녕 자기들끼리 놀기 바빴지요. 결국 40년에 걸친 고려의 저항은 패배로 끝나게 되고, 고려 왕실이 몽골에 왕자를 보내 강화조약을 맺게 됩니다. 삼벌초를 위시한 무신정권의 잔여 세력들은 고려 조정에 반대하며 무장 봉기를 일으켰지만,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제주도에서 전멸하고 말지요. 한편 고려를 복속시킨 몽골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두 차례에 걸쳐 일본 해상 원정을 시도하는데, 커다란 폭풍에 의해 두 차례 모두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이를 '가미카제(신의 바람)'라 부르며 신성시하고 있지요. 오히려 일본보다는 일본 원정한다고 노예처럼 시달렸던(엄청난 숫자의 배를 만들어 바치도록 강요하기도 했지요) 고려가 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원정 때문에 오랜기간 고려 안동지방과 제주도에 머물러있던 몽골 군사들이 마시던 독한 술이 고려 백성들에게도 전해졌는데, 이게 바로 소주였습니다. 안동 소주가 유명한 것도 바로 한국 소주의 시작이었기 때문이지요.

    안동소주.jpg
    < 화학 증류 소주에 밀려 대신 고급화 전략을 펼치는 중인 안동소주 >

      몽골의 술이었던 소주는 사실 몽골의 오리지널이 아니라, 이슬람에서 얻은 술이었습니다. 1240년 무렵 칭기즈칸에 의해 멀리 페르시아까지 점령하게 되면서, 이슬람의 도수 높은 증류주인 아라크를 가져왔던 거지요. 물론 이슬람 율법으로 술은 금지되어있었지만, 그렇다고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술을 안마실리는 없으니 공개적으로 안마셨을 뿐 몰래몰래 마시는 사람들은 많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아라크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독한 증류주였지요. 물론 대놓고 술이라고 팔 수는 없으니 일단은 위장약으로 취급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아라크가 역사상 가장 넓은 제국을 이룩한 몽골에 의해 중국과 동남아시아에까지 널리 전파되었던 거지요.
      고려인들은 처음에는 도수가 높은 증류주에 거부감을 느꼈지만, 이내 독한 맛에 푹 빠져들게 됩니다. 고려 말 김진이라는 장수는 일하는 중에도 늘 소주를 마셔서 병사들이 한심하게 생각할 정도였지요. 심지어는 왜구가 쳐들어왔는데도 술에 너무 취해서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망쳐버리는 바람에, 문책을 당하고 유배형에 처해지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알콜중동이 사람망친 전형적인 예였던거지요. 그런가하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장남 이방우는 아버지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관하여 벼슬을 버리고 밤낮없이 소주만 마시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소주는 고려가 멸망한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꾸준히 사랑을 받았으며, 부자들 뿐만 아니라 양민들도 잔칫상 등에 쉽게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대중화되었습니다. 특히 소주는 제사에도 중요하게 사용되었습니다. 무더운 여름에 도수가 낮은 청주는 쉽게 상했지만, 소주는 도수가 높아 잘 상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조선왕조 내내 사랑받던 소주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뜻하지않게 탄압을 받게 됩니다. 주식인 쌀을 아끼기 위해 분식을 장려하고, 쌀로 만들던 막걸리나 소주, 청주도 값싼 밀가루와 고구마로 만들고 아스파탐 같은 단맛이 나는 화학 감미료를 넣게 했던 거지요. 이로인해 쌀과 누룩으로 빚어오던 우리나라의 전통주 산업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됩니다. 심지어는 1963년 정부는 양곡관리법을 근거로 쌀로 술을 빚거나 쌀로 만든 술을 파는 것을 금지해버렸습니다. 거의 전통주의 맥이 끊겨버린 셈이지요. 어찌보면 안동소주 제조법이 살아남은 것이야말로 기적같은 일이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전통주를 멸종시켜버리고 있을 때 일본은 오히려 사케를 장려하고 더욱 질을 높여 서양 사람들까지 좋아하는 고급 전통주를 만들어냈으니, 아쉽기가 이루 말할수가 없네요.

      한편 설렁탕 역시 몽골이 전해준 음식이었습니다. 당시 소떼와 양떼를 몰고 넓은 초원을 누비며 유목생활을 하던 몽골인들은 쇠고기에 야생 파를 넣어 끓인 '술렝(sulen)'이라는 음식을 즐겨 먹었는데, 이것이 고려 때에 전해져 설렁탕이 되었다고 합니다. 몽골의 지배를 받으며 생긴 음식들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식객에서도 등장해 유명해진 타락죽(우유죽)도 몽골이 전해준 음식이었지요. 당시 우리나라에는 젖소가 없었기 때문에 우유는 왕도 자주 먹기 힘들던 귀한 식재료였고, 타락죽 역시 왕실에서만 먹던 음식이었습니다. 이 타락죽때문에 명종의 외삼촌이자 영의정을 지냈던 윤원형이 탄핵을 당하기도 했는데, 타락죽을 만들 수 있는 요리사인 낙부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타락죽을 만들어 먹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윤원형은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는데도, 감히 신하가 임금만 먹을 수 있는 타락죽을 실컷 먹은 것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대죄였던 것이죠.

    타락죽.jpg
    < 우유에 곱게 간 쌀가루, 잣 등을 넣어 끓여 만드는 타락죽 >

      반면 몽골인들이 즐겨먹던 치즈나 버터, 요구르트는 한반도에 제대로 전파되지 못했습니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한반도에는 목초지가 적어서 젖이 많은 젖소를 키우기 어려웠고, 한반도 사람들은 우유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우유를 소화시키는 젖당 분해효소가 거의 없었거든요. 그러다보니 우유를 생으로 먹었다간 배탈이 나기 일쑤였습니다. 타락죽처럼 우유를 끓여먹었던 것도 그 이유에서였지요.


    10. 멕시코 독재자의 애환이 담긴 치클과 껌
      요즘 껌의 유래 라고 하면 보통 아메리카 대륙 쪽에서 치클을 씹던 게 전파되었다고 알려져있지만, 사실 처음 껌을 씹었다고 알려진 민족은 다름아닌 그리스인이었습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껌의 본래목적인 '씹기 위한' 껌은 아니었지요. 그리스인들은 매스틱나무에서 추출한 수액을 굳힌 수지를 자주 씹었는데, 간식거리가 아니라 '입안을 청소하기 위한' 행위였습니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거의 이를 닦지 않았고, 입냄새를 없앨 겸 입을 청소하기 위해 이를 닦는 대신 매스틱나무의 수액을 씹었던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입냄새가 엄청 났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그리스의 이러한 풍습은 다른나라가 보기에는 영 별로였는지, 그리스 이후로 다른나라로 전파되지는 못했습니다.
      한편 아메리카에서는 마야인들이 사포딜라나무 열매에서 뽑아낸 '치클'을 자주 씹고 다니고 있었습니다. 멕시코의 아즈텍인들과 카리브해 원주민들도 이 치클을 애용했으며,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대신 가문비나무의 수액을 씹으며 다녔지요. 1492년 쿠바에 도착해 이 광경을 본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여왕 이사벨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곳의 원주민들은 나무 수액을 말려 항상 씹고다닙니다" 라고 적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당시 아메리카 사람들의 껌 사랑은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사포딜라 열매.jpg
    < 치클의 원료가 되었던 사포딜라나무 열매 >

      그리고 이 껌이 본격적으로 널리 퍼졌던 것은 미국 역사상 유명한 알라모 전투(1836년 멕시코군과 미국 이주자들간의 싸움)에서였습니다. 당시 미국 텍사스 지역은 스페인이 지배하고있었는데, 특히 스페인은 아즈텍 왕국을 정복하면서 중남미, 텍사스, 뉴멕시코,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을 전부 식민지로 두고 있었지요. 그러던 중 1789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대혁명의 여파가 전 유럽에 퍼지게 되면서, 식민지 분위기가 급변하게 됩니다. 유럽에서 파견된 총독들의 억압적인 통치에 신음하던 식민지들이 들고일어나기 시작했고, 중남미에서도 이주민들의 독립 요구가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스페인과 포르투갈 본토가 프랑스에게 점령당하자 중남미 식민지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멕시코에서 식민지 태생의 백인들이 본토에서 파견된 관리들을 몰아내며 독립을 선언하게 됩니다. 스페인에서 독립한 멕시코는 처음에는 황제 아구스틴 1세로 즉위한 제국이었지만, 얼마 못가서 또 다른 혁명으로 황제가 쫓겨나고 장군인 산타 안나를 대통령으로 취임시켜 공화국이 됩니다.
      
    Santaanna1.jpg
    < 멕시코의 대통령 산타 안나(1794~1876) >

      산타 안나는 갓 태어난 신생 공화국인 멕시코를 발전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이민 장려 정책을 폈습니다. 이에 멕시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미국 이민자들이 몰려들었으며, 고작 8년만에 미국 이민자들은 3만명에 달하지만 멕시코 출신 주민들은 겨우 4천명 뿐이라는 상황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일이 이렇게되자 멕시코 정부는 미국 이민자들에 의해 멕시코가 미국의 세력권으로 편입되는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의 노예 수입을 강도높게 규제했고, 당시 텍사스로 몰려온 미국인들은 고소득 사업인 목화농장이 주 수입원이었기 때문에 일할 노예들을 수입하지 말라는 건 사업을 하지 말라는 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자 미국인 이민자들은 멕시코 정부가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멕시코에서 독립하여 텍사스 공화국을 세우겠다고 선언하게 됩니다. 목화 농장 사업과 노예 수입을 마음대로 하겠다는 내용도 빠트리지 않았구요.
      기껏 이민 도와주고 땅주고 돈 지원해줬더니 배신을 때려버린 셈이 되었으니, 격분한 산타 안나는 6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직접 텍사스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이민자들은 대부분 미국 본토로 도망쳤지만, 민병대 대원 186명만은 알라모 요새에 끝까지 남아 멕시코군과 싸우게 됩니다. 알라모 전투의 시작이었지요. 산타 안나는 알라모 요새를 공격했지만 무려 30배나 많은 병력을 가지고도 요새를 제대로 점령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산타안나는 요새의 보급로를 차단해 식량이 떨어져서 항복하기를 기다렸지요. 하지만 민병대는 굶주림과 싸우면서도 끝내 항복을 거부하고 계속 항전했습니다. 결국 멕시코군은 총공격을 감행했고, 굶주림에 지쳤던 민병대원 186명은 끝까지 총을쏘며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게 됩니다. 전투가 끝난 뒤 사상자 수를 세어본 산타 안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고작 2백명도 안되는 민병대를 잡기 위해 멕시코군이 무려 1600여명이 전사했거든요.

    알라모.jpg
    < 영화에서 묘사한 알라모 전투 >

      한편 장렬하게 전사한 알라모 전투 얘기가 미국 본토에 알려지자, 미국에서는 텍사스 이민자들의 원수를 갚고 멕시코에 보복해야한다는 여론이 빗발쳤습니다. 텍사스에서 탈출한 이민자들은 텍사스 독립위원회를 결성하였고, 텍사스가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텍사스 민병대에 자원하여 멕시코와 싸우는 사람들에게는 텍사스의 토지를 나누어주겠다고 선언했지요. 새로운 땅이 갖고싶었던 수많은 지원자들이 몰려들었고, 1835년 야신토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멕시코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당시 멕시코 군대를 지휘하던 이는 알라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산타 안나였고, 이 패전으로 인해 산타 안나는 텍사스가 독립국가임을 선언해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작 그 텍사스는 9년만에 자발적으로 미국과 합병하였지요. 결국 텍사스의 독립 전쟁은 미국의 배만 불려준 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산타 안나는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자국 영토를 잃어버린 그를 탄핵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산타 안나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독재정치까지 폈지만 결국 대통령직에서 쫓겨나 원수의 나라인 미국으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망명한 산타는 뉴욕에서 살게 되었지요. 그런데 어느날 토마스 애덤스라는 사진작가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산타 안나는 고국에서 했던 것처럼 치클을 씹으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이야기 도중 애덤스가 무엇을 씹고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산타 안나는 "멕시코 사람들이 좋아하는 간식입니다. 치클로 만들었지요." 라고 대답합니다. 그 순간 애덤스는 치클을 껌으로 만들면 지금까지 미국인들이 씹던 파라핀 왁스보다 훨씬 맛있고 건강에도 좋은 껌이 되리라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산타 안나에게 그가 가져온 모든 치클을 지금 당장 팔아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마침 산타 안나도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한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흔쾌히 수락했지요. 
      치클을 넘겨받은 애덤스는 연구를 거듭한 끝에 1871년 치클에 감초성분과 향기를 첨가한 껌을 만드는 기계를 발명하였고, 이 기계에 대한 특허권도 얻었습니다. 처음으로 껌을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죠. 크게 인기를 끌기 시작한 껌은 이후에도 꾸준히 발전하였으며, 1880년에는 윌리엄 화이트가 옥수수시럽과 박하 추출물을 첨가한 '유카탄'이라는 새로운 껌을 개발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내과의사였던 에드워드 박사는 소화에 도움을 주는 펩신 분말과 치클을 넣어 '비만스' 라는 츄잉검을 발명하였는데, 이것이 요즘 우리가 씹는 껌의 시초입니다. 현재는 가격과 보급 문제로 치클은 거의 사용되지 않으며, 주로 합성 고분자나 수지 등을 사용하여 만들고 있습니다.
    유카탄.jpg
    < 윌리엄 화이트가 개발한 박하향 껌 '유카탄' >





    출처 <전쟁이 요리한 음식의 역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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