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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자금사건은 사회주의운동 세력 내의 이르쿠츠크파, 상해파의 내부노선 투쟁을 불러왔고, 2차 자금사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의 한인사회당의 사회주의 노선과 민족주의 노선간의 분열을 불러왔다.[6] 특히 2차 사건에 의해 사회주의 세력인 한인사회당이 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축출되었으며, 임정 주류세력이 사회주의 계열을 크게 적대하게 되었다. 또한 국제적으로 임시정부에 대한 국제적 신용을 실추시켜 자금확보가 어려워지게 되었다.
참고로 김립은 사건 이후로 김구가 보낸 청년들에게 추격당하여 상해 거리 한복판에서 암살당했다.
후일 박노자는 "1922년 초기에 상하이 임시정부가 한인사회당의 간부인 김립(1880~1922)을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김구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이 1922년 2월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 이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한 <백범일지>의 권위가 절대적이기에 김립이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통설을 의심한 이들이 여태까지 거의 없었지만, 반병률 교수(한국외대)의 연구에 의하면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7]"고 평가했다.
임시정부에 자금을 내놓지 않고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의 자금으로 사용한 그의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한 <백범일지>의 권위만으로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설이 통설이었지만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8]
김립의 횡령 행위는 사실이라기보다는 한인사회당 등에 대해 적대적인 공산주의 세력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의 동지들에게 세 차례에 걸쳐 나눠서 전달된 200만루블의 자금은 한인사회당과 고려공산당 등에 어렵게 운반해 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혁명 사업비로 활용되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던 것으로 보고 있다.[4] 김립의 암살 등으로 나머지 140만루블은 구경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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