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본문의 내용은 'KBS 파노라마'를 보고 제 스스로 요약한 것이므로 정확한 인명은 기억하기가 어려워 보통명사처럼 적은 대상들이 있으므로 이점 양해부탁드립니다.)</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br></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3300여명의 조선인 청년들이 일본이 점령한 지역의 포로수용소로 사실상 끌려갔다. </span><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하지만 이들은 자랑스런 신민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망망대해를 건너간 것이었다. </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br></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포로감시원이었던 한 조선인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 재판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span></div> <div>"내가 오지 않으면 배급을 끊는다고 하였다.... 천황폐하께 충성하지 않은 죄로 죽이겠다고 하였다."</div> <div><br></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시골에 살았다고 진술했던 한 조선인감시원도 비슷한 말을 했다. </span></div> <div>"면장이 불렀기에 찾아갔더니 포로감시원을 하라는 것이다. 그 당시에 권유가 아닌 명령에 거절할 힘이 없었다."</div> <div><br></div> <div>생존한 포로감시원 이학래氏께선 부산에서 자신들이 받았던 교육은 총기를 다루는 훈련과 같은 조선인 감시원 훈련병끼리 뺨을 때리는 것이라고 구술하였다. 각 나라 포로들의 습성이나 풍속 등에 관한 것을 배우기를 기대했었는데, 이런 것들은 일절 교육받지 못하고 상호간의 구타만 배우고 온 것이다.</div> <div><br></div> <div>전쟁이 종결되고 전범재판이 열렸다.</div> <div>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BC급 전범이 되어, 연합군이 점령한 각 지역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148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div> <div><br></div> <div>살아남은 포로감시원들은 일본과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조약 이후 일본국적이 말소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일본국적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교도소에서 내보내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일본인 전범으로서 일본 본토 내의 형무소에서 죄값을 받고 있었던 것이지, 일본인이 더 이상 아닌 채로 죄값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조선인들은 일본인으로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포로학대 혐의로 전범이 된 것이었으니 말이다.</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br></span></div> <div>교도소를 나와 이방인이 되어 일본에 있게 된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 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택시조합을 결성하여 살아남은 감시원들끼리 연대하기 시작했다. 1955년부터 2014년, 지금까지 보상문제로 싸우고 또 싸웠다.</div> <div><br></div> <div>그러나 1965년 한일협정으로 민간인청구권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그 이전까지는 검토해보겠다면서 만나주던 일본인 정부측 인사들이 더 이상 마주보는 것조차 거부하기에 이른다.</div> <div><br></div> <div>1991년부터 1999년까지 보상청구권에 대한 일본 내의 모든 재판에서 모든 식민지 조선인 피해자들이 패소하게 된다.</div> <div>이를 두고 일본인 변호사는 "일본의 사법부는 국적이 다른 자들이 차별을 받는 것은 정당하고 일본 헌법의 취지에 어긋나지 않는다." 라고 담담하게 대답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이며 인터뷰를 종료했다. </div> <div>"일본 사법부는 입법부에서 법안이 만들어지지 않는 이상 지금까지 있었던 결과를 답습할 것이다."</div> <div><br></div> <div>2014년 5월, 살아남은 5인 중 1분이신, 이학래氏는 일본 정치권 인사들에게 권리회복과 보상문제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한다.</div> <div>그는 자신과 함께한 일본의 양심세력 여교수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div> <div>"법이 없으니 법을 만들어서라도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겠다."</div> <div><br></div> <div>`</div> <div><br></div> <div> <div><font face="돋움">퇴계 이황 선생께선 15세에 자신의 학문적 스승이었던, 작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font></div> <div><font face="돋움">"스승님, <font size="3">올바름이 이치입니까?</font>"</font></div> <div><br></div> <div>아리스토텔레스는 동등하지 못한 자들에게 동등한 몫을 주는 것과 동등한 자들에게 동등하지 못한 몫을 주는 것은 결국 갈등과 불만으로 인해 싸움으로 변질된다고 하였다.</div> <div><font face="돋움"><br></font></div> <div> <div><font face="돋움">식민지 조선인이 일본인으로 강제적으로 둔갑되어 식민지 지배의 치부를 감췄던 일본의 전범재판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정의로운 것이었을까?</font></div> <div><br></div></div></div> <div><font face="돋움">왜 일본의 전범재판을 최악의 위선이라고 하였는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font></div> <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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