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막내고모한테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어.
막내고모, 나한텐 얼굴조차 기억 나지 않는 사람이야. 그 만큼 안 본지 오래됐다는 뜻이지.
막내고모가 이런 나한테 연락한 이유는 아마 아빠랑 연락이 되지 않아서겠지.
우리아빠는 현재 무직에 신용불량자이며, 과거엔 도박 중독으로 우리가정을 풍비박산내고 3억이라는 어마무시한 빚을 남겨준 장본인이야.
엄마와 결혼하고 직후부터 월급의 반은 우리 가족 생활비 통장에, 나머지 반은 자신의 명의로 된 통장에 넣었어.
그리고 그렇게 빼돌린 돈으로 우리한텐 회사간다는 거짓말을, 회사엔 우리 엄마가 위독하다는 같잖은 거짓말을 하며 도박장으로 향했지.
왜 십년 동안이나 우리를 속였어? 왜 생판 모르는 회사 직원들한테 엄마가 암에 걸렸다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도박을 했어? 왜 화목했던 우리 가족 이렇게 불행하게 만들었어?
난 그때 처음으로 엄마가 어린 아이처럼 우는 걸 봤어. 그때 내 나이는 불과 열살 남짓.
엄마는 십 년이 넘는 세월동안 원래 아빠 월급의 반 밖에 안되는 돈이 월급인 줄 알았고, 없는 가정에 두 딸들 먹여 살린다고 새벽까지 일을 했어.
그 결과는 3억이라는 빚. 난 아직도 빚쟁이들이 우리집 현관문을 두드릴 때, 엄마와 나와 언니가 집 안에 불을 다끄고 아무도 없는 것 처럼 숨죽이던 모습을 잊지 못해. 그때도 너무 무서워서 의지하려고 아빠를 찾았어. 근데 아빤 어디에도 없었지.
엄마는 대출을 받고,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돈을 구했어. 그리고 밤마다 엄마는 갚아도 갚아도 끝이 없는 고지서를 손에 쥐고 울었어. 난 엄마가 우리 듣지말라고 숨죽여 우는 새벽이 제일 무서웠어. 그마저도 새벽까지 일을 하고 지친 얼굴을 하고선. 엄마가 잘못된 생각을 할까봐 맨날 새벽마다 깨서 엄마 방을 확인했어. 아마 엄마는 몰랐겠지.
그렇게 급한 빚을 어느 정도 갚고 나선 아빠가 우리집에 왔어. 엄마는 우리한테 절대 아빠가 집에 찾아와도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하고 비밀번호도 바꿨어. 그러곤 아빠가 머리는 덥수룩하고 꾀죄죄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왔어. 아빠라는 게 참 뭔지, 우리 엄마가 누구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 지 모르는 것도 아닌데 아빠의 처음보는 초라한 모습에 난 그만 문을 열어줘 버렸어. 그러곤 두 달만에 본 아빠한테 물었어 왜 왔냐고. 근데 아빠가 하는 말; 내 집에 내가 오는데 무슨 문제가 되냐.
그때 난 아빠를 더 이상 아빠로 대하지 않기로 했어. 우리 집에 오자마자 씻고 라면을 끓여 먹더니 집 안 곳곳을 뒤져서 내 돌잔치 때 맞춘 금반지, 내가 좋은 성적을 받아올 때마다 엄마가 선물로 준 귀걸이, 엄마 폐물 반지까지 모조리 가져가서 팔았어. 뒤늦게 안 사실인데 엄마가 아빠 명의로 들어놨던 생명보험 등 각종 보험까지 해지하고 그 돈까지 가져갔다며? 아빠의 끝은 도대체 어디야? 어디까지 해야 직성이 풀려?
엄마는 그런 아빠의 모습을 보고 집을 나갔어. 나랑 언니는 그때 아빠랑 한 집에서 지냈는데 죽고 싶을 만큼 지옥이었어. 그래도 그나마 언니가 있어서 의지할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언니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타지로 유학가면서 난 혼자가 됐어. 그래서 나도 집을 나와서 엄마를 찾아서 아는 이모집에 얹혀서 살았지. 아는 이모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 엄마랑 우리 언니랑 나는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 아직도 이모한테 고마워서 우리 세 식구는 그 은혜를 갚고 있는 중이야.
나도 고등학생이 돼서 언니를 따라 타지로 유학을 가면서 자연스럽게 아빠랑 연락을 끊었어. 아빠는 그 때까지도 무직이었어. 내가 아빠랑 같이 살 때 그래도 밥은 굶지 않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아빠가 도둑질을 했던 거더라.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아빠는 초범인데도 벌금을 낼 여력이 없어서 교도소에 갔다왔어. 그 후에 아빠는 나한테 연락이 와서 차가 고장났는데 수리할 돈이 없다고 고등학생인 나한테 돈 10만원만 빌려달라고 하더라.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아빠가 빚을 남겨주고 두 달만에 찾아왔을 때처럼 난 내 한 달 용돈의 절반인 10만원을 아빠한테 줘버렸어. 그 후로도 계속 주기적으로 연락와서 나한테 돈 3만원, 5만원씩 달라고 하더라. 난 그때 고등학생이었는데 말이지..
아빠가 연락이 없길래 오랜만에 아빠집으로 찾아갔어. 역시나 일은 안 하고 누워서 티비만 보고 있더라. 휴대폰은 요금이 미납돼서 정지된 지 오래더라. 그래서 아빠랑 연락할 방법은 없어. 가끔 집에 들려 생사를 확인하는 정도, 그정도야. 그 마저도 내가 성인이 되면서 시간이 없어 안 간지 오래됐어. 그러다가 오늘 막내고모한테 연락이 왔어.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혹시 아빠랑 연락되냐고. 아뇨, 아빠랑 연락 안 한지 오래됐어요.
아빠네 식구들은 아마 우리 가정사를 모르겠지. 아빠가 그렇게 엄마에 대해 안 좋게 말하고, 자기 자신은 그렇게 포장을 해댔으니. 아직도 친가에선 우리 엄마만 썅년이겠지. 당신네들이 우리 얘기 듣고도 우리 엄마 욕을 할 수 있는 지 모르겠어.
근데 이 와중에도 난 무슨 생각이 드나면, 내가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알게 된 이상 아빠한테 적어도 알려는 줘야할 것 같다는 거야.
근데 아빠한테 연락할 방법은 직접 찾아가는 것 밖에 없고, 문제는 아빠를 찾아가서 이 사실을 전달한다고 해도 아빠는 절대 장례식장에 가지 않을 것 같단 거야. 왜냐면 아빠는 엄마랑 멀어진 뒤로 친할머니를 찾아 뵈러 가지 않았어. 고모들이랑 할머니들이 그 간에 일어난 일들을 물을까봐서. 우리한테도 우리 가정사에 대해 고모들한테 말 하지 말래. 마지막 자존심인가 뭔가 그런거라지? 아무튼 그것 만은 지켜주기로 했어.
우리아빠 참 답 없지? 우리 아빠 곁엔 그 흔한 부모도, 아내도, 자식도, 형제도 없어. 난 어떻게 해야 돼?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십 여년 동안 안 봐서 그런 지 아무런 감흥도, 생각도 들지 않아. 장례식에 가야할까? 십년이나 지나서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다시 글로 회상하니까 가슴이 너무 아프고, 그동안 우리 세 식구 고생한 게 생각나서 너무 슬퍼. 소소하게 벚꽃 구경가서 엄마가 싼 김밥 먹던 기억. 첫 눈 오는 날 엄마랑 아빠랑 눈사람 만들면서 눈 싸움 했던 기억. 할머니 앞에서 재롱떨면 날 흐뭇하게 바라보던 엄마랑 아빠 표정. 우리 참 행복했었는데 그치? 이젠 그 행복했던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지네.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