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

잿빛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 많은 빗방울이 아스팔트에 반사되는 소리가 발자국 소리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 중 유독 빛나는 한 방울이 있다. 이내 처연한 몸짓으로 아스팔트를 향해 곤두박질치는 한 방울은 자신의 모습이 시각에서 청각으로 바뀌는 그 찰나의 순간 자신을 뒤덮는 발자국에 대항하고 싶어졌다.

잿빛 아스팔트가 새까맣게 물들고 나서야 빛났던 한 방울은 정신을 차렸다. 이내 희미한 태양이 빌딩 중턱에 매달린 것을 보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끈기 없는 사람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쉽게 싫증 내고 포기하는 아이를 보고 어른들은 호되게 꾸짖는다. 종현은 어른이 된 지금, 자신보다 어린 후배에게 똑같은 꾸짖음을 듣고 있다.

“선배, 이게 다 선배 위해서 하는 말 이에요. 봐요. 우리는 대한민국 젊은 청년이에요. 우리가 가장 생산성이 높다 구요. 우리가 취직해서 일을 하는 건 선배 개인 뿐만 아니라 선배 부모님, 나아가서 대한민국의 공익을 위해서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일 이에요. 제발 좀 주위 사람 속 그만 썩이고 이제 취직해봐요.”

종현은 데자뷰 현상을 느꼈다. 그에게 이런 충고는 일상 이었던 것이다. 그의 검지 손가락은 꼬불꼬불한 그의 곱슬머리를 더욱 세차게 휘감았다. 동그란 안경 속에 숨어있던 그는 안경을 벗고 자신의 옷에 문지르며 힘 없이 대답했다.

“나는 어디에 취직해야 할 지 모르겠어.”

“그게 무슨 배부른 소리에요. 요즘 취업 시장 모르세요? 서류 100개 넣어서 30개 되면 동메달이 구요. 거기서 5개 면접 보면 은메달이에요. 마지막으로 1개 합격해서 취직하면 금메달이란 말이에요. 어디에 취직하는 지가 뭐가 중요해요. 일단 필요한 스펙 쌓아서 어디든지 찔러보란 말이에요. 요즘 취직은 확률 싸움이에요.”

“그렇게 취직하면 무슨 의미가 있니?”

“그러는 선배는 지금처럼 정체 되어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요. 최선이 아니면 차선으로 가는 거 아니에요? 어린애처럼 언제까지 그럴 거에요.”

애꿎은 담배만 연신 태워 대던 종현은 목이 타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앞에 놓인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러나 그의 갈증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인간의 본능이다. 누구에게 비판 받는 것을 쉽게 견디는 사람은 없다. 거꾸로 누구에게 칭찬 받는 일을 싫어하는 사람도 없다.

종현은 항상 진리에 대해 생각해왔다. 그리고 나름의 답을 얻었다. 진리는 곧 균형이다. 그는 한쪽으로 쏠린 무게의 균형을 맞추고 싶어졌다.

“내 장점은 뭐야?”

느닷없는 질문에 미경은 당황했다. 종현은 항상 궁금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질문에 항상 어색해 한다. 부모님에게 행복이 뭐냐고 물었을 때도, 선생님께 정의가 뭐냐고 물었을 때도, 친구들에게 사랑이 뭐냐고 물었을 때도 누구도 그의 속을 시원하게 해준 사람은 없었다. 머리로는 이해되었지만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철이 들고 짝사랑하던 여자에게 고백한 것이 거절 당하고 나서야 종현은 깨달았다. 자신의 궁금함은 남의 조언을 통해서 해소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각 개인에게 특화된 경험적 답이 존재했다. 종현에게 사랑은 시작은 행복이요, 마지막은 불행이었다. 세상에 시작되는 모든 일에는 마지막이 있고 사랑도 예외일 수 없었다. 종현은 불행이 두려웠다. 종현은 더 많은 경험을 하면, 더 많은 답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 즈음 대학에 진학한 종현은 자취를 하게 되었다. 시작부터 그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부모로부터 독립이라니 꿈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경험 욕망을 채워주진 못했다. 부모로부터 경제적, 정서적 독립을 꿈 꾸었다. 종현은 학업을 잠시 멀리하더라도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 길로 시내에 있는 분식집에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오토바이를 한 번도 타본 적은 없었지만 자신 있었다. 자전거 타는 것을 아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받은 일당은 4만원이었다. 10시에 출근해서 8시까지 10시간, 시급 4천원, 그것이 그가 처음 번 돈이었다. 분식집이라 점심, 저녁 다 가게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 700원 짜리 이온 음료를 하나 사 먹고 지하철에 앉아 하루를 정산했다. 처음 치고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온몸의 근육이 울부짖을 때, 종현은 이 일을 평생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배, 똑똑하잖아요. 생각도 깊고요. 처음 선배 봤을 때는 말도 없고 굉장히 평범해 보였어요. 어느 날 선배가 페이스북에 올린 영화 감상문을 읽었는데 선배가 달라 보였어요. 허세라고 느껴지지 않았어요. 전문적인 영화 평론 같은 날카로운 맛은 없었지만, 읽는 내내 눈을 뗄 수 없게 했어요. 어려운 용어를 나열하는 것도 아니고 독자를 가르치려고 들지도 않았어요. 그냥 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어요. 결국 전 그 영화를 볼 계획도 없었는데, 선배 글 하나로 그 영화를 봤어요. 그건 확실히 장점이에요. 그리고 선배한테 그런 느낌이 들어요. 뭔가 있는 것 같다. 근데 그게 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마지막은 뭐야? 칭찬이야? 생각이 깊다는 말은 듣기 좋네. 난 어떤 걸 볼 때 처음에 눈을 뜨고 보고 그 다음에 눈을 감고 봐. 그러면 보이는 게 더 많아. 난 거기서 희열을 느껴. 한정적인 걸 보는 데 될 수 있는 한 많이 보는 거 굉장히 생산적이지 않아?”

미경은 움찔 했다. 그녀에게 치우쳐 있던 대화의 균형이 역전된 것 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쉽게 물러날 만큼 물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생산성으로 도대체 뭘 생산하는데요?”

종현은 텅 빈 술잔에 소주와 맥주를 채웠다. 그리고 젓가락으로 휘휘 젓기 시작했다. 남은 한 손은 기름이 떨어진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였다. 불이 잘 붙지 않자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향해 연신 고개를 내밀었다. 미경은 종현의 그런 모습이 한심해 보였다.

“그 놈에 담배도 좀 끊어요. 요새 누가 담배를 펴요. 돈은 돈대로 쓰고 본인은 물론 주위 사람 건강도 해치잖아요. 취직 할 때도 불리해요.”

“담배 회사에나 취직해볼까?”

“빈정거리지 마요. 선배가 무슨 사춘기 소년이에요?”

미경은 술집 조명에 그을린 빨간 손을 뻗어 종현의 담배를 낚아 챘다.

“금연을 요구하는 사람이 두 가지 종류라는 거 알아?”

종현은 빼앗긴 담배 대신 새로운 담배를 꺼내 물며 미경 에게 말했다. 미경은 한숨만 내쉬었다.

“첫 번째는 본인이 담배 연기가 싫어서 주위의 흡연자에게 금연을 요구하는 사람들이야. 그들은 담배가 백해무익 하다는 점에 주목하지. 그래서 흡연자에게 더 이상 국민의 건강을 해치지 말라고 요구해. 그런데 실제로는 국민까지 갈 필요도 없어.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건강을 해치지 말라는 거야. 더불어 그들의 눈빛은 역겨운 담배 연기로 내 기분을 망치지 말라고 말하고 있지.

두 번째는 직접 흡연을 하고 있는 흡연자 당사자의 건강이 걱정되어 금연을 요구하는 사람들이야. 주로 가족이나 진심으로 아껴주는 지인이지. 이 두 종류의 사람을 어떻게 구분하는 지 알아?”

술집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처음 코를 찌르던 담배 냄새는 점점 옅어져 이제 일반 공기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미경의 코는 마비 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정부는 언제부터 실내 금연을 실시 하는 지 생각하는 동시에 종현과의 선문답 같은 대화를 쫓아가던 그녀의 사고도 멈춰버렸다.

‘말할 때 눈빛을 보면 알아. 어린애도 본능적으로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을 구분 할 수 있거든.’

‘선배는 지금 제가 첫 번째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군요?’

눈을 마주치지 않던 종현은 고개를 들어 미경을 빤히 쳐다보았다. 미경도 종현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미경은 자신이 윗입술을 깨물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아니, 넌 세 번째 종류야. 나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사람이야. 사실 세상에 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세 번째 사람이지.’

둘 사이에 적막감이 감돌았다. 미경은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을까 끊임없이 생각했다. 순간 깨달았다. 오늘 선배를 만나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끝까지 하자.

‘집에서 놀고 있는 백수에게 취직을 하라고 요구하는 백수의 대학 후배는 자신을 위해서 그런 말을 할까요? 백수를 위해서 그런 말을 할까요?’

미경의 입에서 알 수 없는 과일 향이 났다. 종현의 담배냄새를 희석시키는 듯 했다.

종현은 더 이상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부모님이 원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억지로 부모님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지어냈을 때가 떠올랐다.

종현은 혼란스러웠다. 미경은 자신의 부모님이 아니다.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든 그녀가 원하는 것을 말하든 그녀는 실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종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에 실망하는 것 이다. 그런데 왜 자신은 머뭇거리는 것 인가,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 인가, 이때 종현은 깨달았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부모로부터의 경제적, 정서적 독립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신은 부모 핑계를 대는 비겁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부모님을 실망 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제대로 못해내서 스스로 실망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종현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 필터를 씹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