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일이다. 얼마나 어릴 때냐면, 전국의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을 때였다. 그때 난 국민학교 3학년이었다.
국민학교 때부터 나는 엉뚱했다. 상상력이 풍부했다고 할지, 당시 나는 일기장에다 내가 상상하는 미래 일기를 쓰길 즐겼다. 당시 내 꿈은 과학자였고, 자연히 내 일기장에는 내가 장차 개발하고 싶은 온갖 해괴한 물품들의 내용이 가득했다.
이것은 그중, 나 스스로 멀티 고글이라 이름 붙인 상상속 발명품 얘기다.
이것은 그 생김새가 커다란 렌즈 두개가 안경처럼 생긴 본체에 붙어있는 일종의 이미지 출력 기기였다.
텔레비전과 선으로 연결된 이 고글은 채널을 바꾸느라 가족끼리 싸울 일 없이, 각자가 원하는 채널만 볼 수있다는 게 최대 장점이었다. 그리고 고글에 헤드셋이 내장되어 있어 사운드도 각 채널에 맞게 나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지금의 VR 기기에 대한 프로토타입의 기기가 당시 어린 내 상상속에서 나왔던 것이다. 어찌보면 단순한 아이디어에 불과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나는 비디오 보길즐겨하는 아이였고, 보고싶은 비디오 채널을 사수하느라 가족에게 맘상한 적이 있었기에 그런쪽으로 상상하길 좋아했다. 그런고로 모든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 하겠다.
각설하고, 요즘은 모르겠지만 당시 일기장에 선생들은 '검사필' 도장을 찍어주거나 하나씩 답글을 달며 일기를 제대로 썼는지 확인하곤했다. 내가 이 일기를 썼을 때 담임선생은 후자였다. 난 아직도 이 내용 밑에 달렸던 선생 답글을 잊지 못한다.
'애가 너무 딴생각을 많이 합니다. 집에서 지도 바랍니다.'
그러니까, 선생 딴에서는, '이 애새끼 숙제하라고 일기써오랬더니 소설쓰고 앉았네'가 아니였을까.
그때부터 나는 소위 '찍힌' 아이가 되었고, 학년을 거듭할때마다 바뀐 담임들은 그 선생에게 주의당부를 듣기라도 했는지 매번 내게 '수업에 집중하고 딴생각 좀 하지마라'며 경고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건, 그런 말을 할때마다 바뀐 담임들은 서로 모임이라도 가졌는지 3학년 담임을 거론하며
'그 선생님이 너 얼마나 신경쓰면 학년바뀌어가면서까지 네 얘길 이렇게 하겠냐. 감사하게 생각해라'
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읽는 사람은 혹여 나더러 '피해의식 있냐? 과잉반응 아니냐'며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맹세코, 내 구겨진 유년시절의 기억에는 한점의 창작도 없으며 오직 당시의 트라우마로 재현된 기억 그대로 서술했음을 알린다.
어쨌거나 난 그때 답글이 달린 이후로 더 이상 일기에 상상 속 과학 물품의 얘기를 쓰지않게 되었다. 쓸게 없으면 차라리 가지도 않았던 놀이공원 간 일, 보지도 않은 만화영화 얘기를 지어내는 게 그럭저럭 무난하게 일기장 검사를 통과하는 꼼수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당시 일기장에다 온갖 거짓 일기 내용을 꾸미며 써대던 경험이 훗날 내게 글쓰기의 기쁨을 알려주었으며, 이후 난 진학해서 몇번인가 글짓기 상을 타기도 하고, 대학생 때는 소리소문 없이 절판되었을지언정 양판소 책도 한권 출간하게 되었다.
이제와 옛날 일이기에, 그때 담임을 크게 원망하거나 욕되게 하고픈 생각은 없다. 이 세상 사람인지 아닌지도 모를만큼 시간이 지났으니까.
그래도 가끔, 그러니까 진짜 어쩌다가 생각하게 된다.
만약 그때 담임이 내 일기에다 좀더 온화하게, 진심은 담기지 않았을지언정 어린 제자의 상상 속 물건에 대해 조금이라도 칭찬해주었다면, 그때의 나는 어떻게 자랐을까, 하고. 어쩌면 다른 삶을 살았을까? 이제는 없는 일기장 속 물건들을 만들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있지도 않은 나를 상상하며 이만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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