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기를 그렇게 났고 내가 증오하는 그 사람에게서 났다 물론 처음부터 증오하는 심정은 아니었다
10년 전쯤 내가 입을 다문 이유는 아직 가족을 걱정했기 때문이었으며
8년 전쯤 내가 말을 삼킨 이유는 평생 볼 사촌오빠가 두려워서다
그 후로도 나는 지금껏 계속 입술을 짓이기며 목소리를 숨겼다
내가 너무도 혐오스러웠고 그 사람들이 너무도 역겨웠고 그 날 지하주차장의 그 남자가 너무도 추악했다
그래서 나는 호도했고 묵인했다
어쩌면 그 날의 나처럼 내가 한 일이 잘못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애꿎은 손등을 파고들며 그를 따라나서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의 나도.
멈춰 있다 나는.
서 있는 걸까
앉아 있는 걸까
누워 있는 걸까
거꾸로 매달려 있는 걸까
죽어 있는 걸까
살아 있는 걸까
알고 있는 걸까 모든 것을?
물론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아직도 나는 여섯 살인 채 그때 그 아파트 그 동, 그 라인 앞의 자전거 끈 소년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애석하고 나는
어리석고 나는
이제는 그 자전거가 네발이었는지, 두발이었는지도 생각나지 않는 게 한스러울 따름이다
이제는 내가 그의 친구가 2층에 살았던가 3층에 살았던가, 하며 고민하면서도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게 한스러울 따름이다
이제는 내가 '그 일이 있은 후' 그와 2층 혹은 3층에 살았던 친구 무리를 보고 손등을 파고들며 달렸던 그 씨름장이 사라졌다는 게 한스러울 따름이다
그 소년은 잘 살고 있을까
평생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 평생의 '생'이라는 것이 지구의 생이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죽고 생물마저 죽고 지구만 삐걱삐걱대며 돌아가는 그때 너만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
이왕 사는 거 잘 살아버려라
내게 했던 짓 하지 말고 괜히 교도소 같은 데 들어가지 말고 잘 살아버려라
그 영생을 너무도 잘 살아버려서
그 잘 사는 게 너무도 지겨워져버려서 미쳐버려라
미쳐버려라 그래 너는 원래 미친 인간이고 나를 그렇게 해먹었으니 더더, 미쳐 돌아버려라
너는 내가 겪었던 인간 중에 가장 짧은 시간으로 날 알았고 가장 길게 내게 남아 있다
너의 이름을 나는 모른다
나의 이름을 너는 그때 알았던 것 같다
불공평하다
너의 이름이 두 자일지 석 자일지 넉 자일지 혹은 그 이상일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불공평하다
나는 너 덕분에 미쳐버렸을 뿐이고 그저 흔한 어지럼증이 생겨버렸고 우울을 안고 살아간다
너는 나 덕분에 친구들 사이에서 무용담 하나가 늘었을 뿐이고 그저 재미난 놀이를 즐겼고 그것을 추억이라 부르며 살아간다
이건
불공평해
불공평하다고
너는 왜 나 때문에 미치지 않는가
아니 10년 전 일을 기억이나 할까
내가 그때 자전거를 탔었지, 바퀴에 동그란 것들이 우수수 달린. 하며 생각이나 할까
넌 나를 생각이나 할까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몇 년 간 잊고 지내왔다 너를, 그 일을, 주차장을
하지만 재작년 그 아파트 주자창 입구를 보고 어지럼증이 심해졌고 토기가 쏠렸다
아무 변기에나 가서 게워냈다
몸은 게워졌는데 왜 머리는 다시 떠올려냈을까
10년 주차장 수영장 내 친구 모래 리본 분홍색 자전거 저녁 전화 거짓말 폭탄 가족
-다 죽을 거야.
-정현이요? 집으로 잘 돌려보냈습니다.
당신은 모른다
집에 있었던 당신도 모르고
그저 날 버스에 태워 보냈던 당신도 모른다
그래 이 일은 나랑 그 소년 빼고는 모르는 거야
그의 어설픈 협박에 내가 약속했으니까. 은폐하자.
아니면 폭탄이 펑, 할지도.
나는 그 날 저녁에도 내가 당한 일을 말할 수 없었고
다음 날에도
다다음 날에도
일주일 후에도
한 달, 1년, 몇 년
지금도 말할 수 없다
아마 이대로라면 평생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내 몸의 폭탄은 잘 살아 있을까
정말 그게 어설픈 협박이 아니었다면
지금 당장 아무에게나 이 모든 걸 말하고 나는 폭파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폭파된 사실을 그 소년이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10년 전 네가 설치해 둔 폭탄이 끝내 터진 꼴을 보고 뭐라고 할까
눈물 한 방울 흘리기는 할까
혀나 끌끌 차고 있을까
결국 비밀을 못 지켰구나, 하며 나를 한심하다는 듯 흘기고 또 다른 10년 전의 나를 찾으러 다닐까
10년 전 학교 친구를 만나 술 한 잔 하며, 어쩌면 담배나 태우며 나를 추억 삼아 이야기할까
아, 그런 애도 있었지.
하며
나로
놀던
그 날을.
이 이야기의 끝은 없다
내가 죽는 날까지 이 이야기의 끝은 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너무 늦어버렸다
이제는 너의 얼굴도 목소리도 옷차림도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 너무 늦어버렸다
하지만 너무 늦어버렸는데,
나만 그 여섯 살 그때 그대로라서
아무도 나를 동정해주지도 존중해주지도 알아주지도 않는다
내가 이제 와서 엄마라는, 한 때는 의지했던 그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봤자
-그 때 이야기하지 그랬어.
하는 '너무 늦어버린' 반응을 들을 것이 뻔하다
나는 아직 여섯 살 그대로인데
나는 아직
너무 어린 여섯 살 그대로여서 눈물 하나 못 참고 10년 전 일 생각하며 훌쩍거리는데
세상은 나만 빼고 돌아간다
나만 빼고 잘만 돌아간다
세상은 너무 빠른데 내가 흘리는 눈물은 내 발목을 콱콱 잠기게 만들어서 나만 너무 느리다
숨을 못 쉴 것 같다
내가 한 일에 내가 흘린 눈물에 숨을 못 쉬고 있다
가끔은 숨 쉬는 방법을 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엎드려서 헉헉 숨을 뱉어던진다
폐에 무언가 덩어리져 있는 느낌이어서 그런 걸까
이 덩어리는 나의 어지럼증이 심해질수록 커지고 내가 숨 쉬는 방법을 잊어버릴 때마다 나를 죽이려 든다
몸만 자라버린 나를, 여섯 살 나를 덩어리와 몸의 폭탄은 죽이려 든다
아
내가 죽는 게 빠를까
덩어리에게, 폭탄에게 죽임 당하는 게 빠를까
어느 쪽이든 그 소년은 몸도 마음도 자란 채로 날 비웃어 줄 것이 눈에 선해 가슴 아플 뿐이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는 없었을까
아
글을 쓰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
자꾸만 가해자를 잊어버리고 잃어버린다
여섯 살의 내게 가해자는 네가 분명하다
하지만
너인 걸까
열여섯의 나에게 가해자는 나인 걸까
잃어버렸다
가해자를
모두가 행복해질 수는 없었을까
아
글을 쓰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
자꾸만 가해자를 잊어버리고 잃어버린다
여섯 살의 내게 가해자는 네가 분명하다
하지만
열여섯의 나에게 가해자는 나인 걸까
너인 걸까
가해자를
잃어버렸다
눈물이 멈췄다
숨을 다시 뱉고 생각해보니
열여섯의 가해자는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