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열심히 키웠다.
퇴근 후 졸린 눈을 비벼가며 몇번을 죽였는지 모를 아귀를 잡고 또 잡고 모든 주말을 쏟아부어 호라드림 상자를 까고 또 깠다.
다들 성전사가 약하다고 했다.
진노 수급도 어렵고 스킬들의 일관성도 부족하고 전설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고 했다.
그렇다면 템이 나올때까지 해 보겠다는 의지로 덤볐다.
그 결과 하나 뿐이지만 아크칸 세트도 주웠고 전설의 검 막시무스도 얻었다.
이제 솔플은 접고 나도 공방에서 타 클래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거다!
공방에 들어간 나는 열심히 싸웠다.
성전사의 명예를 위해 가장 먼저 정예몹에게 뛰어들어가 심판을 깔고 포격을 요청하고 막시무스로 악마를 소환해 수겹으로 깔리는 똥덩이 장판들을 피해가며 컨트롤을 해서 사슬을 걸치도록 노력했다.
정예몹의 피가 서서히 떨어지는걸 보며 전의를 불태우려는 순간 뒤에서 내 정복자렙 절반도 안되는 쪼렙 법사 하나가 날아오더니 순식간에 몹 후장을 털어버리고 지나갔다.
 
2. 성전사는 정말 안되는 것일까.
공방을 한참 돌아봐도 보이는건 법사, 법사, 부두, 악사, 야만, 법사, 수도, 악사, 악사, 부두, 수도, 야만...
삼백여명 남았다던 성전사는 너무 구려서 모두에게 버림받은 나머지 그 명맥이 끊기고 만 것일까...
...하고 좌절하는 순간 비어있는 한 자리에 새로운 성전사가 들어온다.
렙은 나와 비슷하고 템도 큰 차이 없어 보이지만 그는 나보다 더 강해보였다.
아마 내가 성전사가 구리다며 불평 불만이나 쏟아놓고 있는 사이 그는 조금이라도, 아주 약간이라도 더 모저를
올리고 보석을 합치고 극피를 올리기 위해 수없이 마부를 하고 레어와 전설을 갈아댔을 것이다.
나는 대체 그동안 뭘 하고 있었는가.
그는 법사와 야만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용감하게 돌진했다.
그리고 법사와 야만이 딜을 넣는 동안 혼자 즉사했다.
 
3. 네팔렘의 균열을 돌던 중 게이지를 잘못 맞춰 비좁은 수로에서 균열 마지막 보스가 나타났다.
비좁은 수로 한가운데 갑자기 보스몹과 정예몹 한 무리가 나타나자 모두들 본능적으로 스킬을 난사했고 엄청난 이펙트 효과가 화면을 뒤덮자 순간 마우스 포인터는 물론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거라고는 화면 왼쪽 상단에 아군 프로필 창 4개 뿐.
야만과 법사는 멀쩡했다.
나와 그 또다른 성전사는 이미 죽어있었다.
 
4. 또 다른 공방.
열심히 망치를 돌리고 포격을 요청하며 악마들을 사정없이 베어나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악마들이 자비를 모르는 내 검에 베여나가는 것인가 아니면 저 쪼렙 법사와 부두와 악사가 던진 똥덩이에 맞아 죽는 것인가.
화려한 이펙트가 화면에 수놓아지는 틈에 나는 전투 현장에서 살짝 나왔다. 한걸음 빠져나와 모든 공격을 멈춘채 렙업 버스탈때의 쪼렙 캐릭터처럼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서서 구경했다.
넷이 싸우다 셋이 되었지만 몹들이 녹는 속도는 변함이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셋이 싸우고 있었던 것처럼.
그래도 나는 오늘도 공방을 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쉼없이 심판을 내리고 율법을 외워 동료들이 언제나 네팔렘의 구슬 3중첩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며 성전사의 명예를 지킨다.
언제될지 모르는 버프 패치를 기다리며 나는 오늘도 성전사의 영광의 역사의 한 페이지에 작은 흔적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