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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art_8068
    작성자 : 웨지감자
    추천 : 6
    조회수 : 856
    IP : 125.129.***.196
    댓글 : 1개
    등록시간 : 2013/02/19 03:50:00
    http://todayhumor.com/?art_8068 모바일

     



    창백한 여름이었다. 내 눈에는 파란색 막이 한겹 덧씌워져 있었다. 만나는 것들은 죄 파리한 낯짝으로 나를 반겼다. 내 눈은 생명보다 먼저 죽음을 보았다. 그해 여름은 늘 죽음이 날 따라다녔다. 사람들 속에서도 지독하게 외로웠다. 얼마나 외로웠는지 나도 모르게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쥘 정도였다. 체온 정도로는 그 창백함을 물리칠 수 없었으나 한 뼘만큼 기분이 나아졌다. 그래서 나는 늘 내 손을 잡고 다녔다. 오른손이 왼손을, 왼손이 오른손을 잡도록 놓아두었다. 선배들은 날 이상한 놈으로 여겼고,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동아리방들이 모여있는 학생회관 뒤는 무성한 측백림이었다. 실연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여학생의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 곳은 가끔씩 남자들이 호기를 부리는 장소로 쓰일 때 말고는 기본적으로 아무도 찾지 않는 빈 숲이었다. 나는 내리 며칠동안이나 그 숲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그 숲에서 부는 바람이나 나뭇잎들의 색이 그 때만큼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꿈 속에서 나는 더 이상 내 손을 잡고 있지 않았다. 여학생이 목을 매달았다는 그 숲의 두터운 나무가지들을 하나하나 재어가며 껍질을, 뿌리를, 흙을 만졌다. 눈물이 날 정도로 따뜻하였다.

    현실에서의 창백함이 더는 견딜 수가 없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숲으로 갔다. 꿈처럼 푸른 나뭇잎들이 꿈결같은 소리를 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숲 곁으로 난 나무 계단에는 일군의 학생들이 농구공을 허리에 낀 채 지나가고 있었다. 그 나무 계단의 끝에 서서, 나는 차라리 농구공이 되고 싶단 생각을 했다. 아직까지 내 양손은 서로를 꼭 부등켜안고 있었다. 여름의 긴 해는 드디어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몇 십년이나 됐을 나무의 등걸과 껍질을 눈으로만 훑고 있었다. 숲이 내게 말했다. 들어오라고. 황혼의 따스함이 내 눈의 푸른 막을 잠시 걷어간 듯 하였다. 나는 두 손을 풀어 나무 껍질의 따뜻함을 더듬었다.

    일종의 의식이었다. 내 손가락들은 그 숲의 나무들을 더듬었고, 석양이 지나가기 전에 나는 눈의 창백함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윽고 어둠이 주위를 완전히 감쌌다. 여학생의 원귀가 애인을 찾아 떠돈다는 그 숲에 서 있어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되려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샘솟아 두터운 나무 등치를 소리나게 주먹으로 내려쳤다. 형체가 일그러진 새가 다른 가지로 날아갔다. 숲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진동이 멎자 가방을 둘러메고, 신발을 고쳐신고 숲을 나왔다. 아마 그녀가 묻지 않았다면 평생 이 일은 숲과 내 두 손과 나만의 비밀로 간직될 터였다.

    나도 그 숲에 가봤어. 잊을 일이 있었어. 부탁할 일이기도 했고.

    그녀는 나와 조금 다른 방식으로 그 숲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마도 과마다 다른 전통대로 숲을 해석하고 있는 듯 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숲에는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주는 힘이 있는데, 여학생의 귀신이 그 소원을 듣고 이뤄주고 싶다면 숲이 흔들리며 응답을 한다는 것이었다.

    너도 분명히 그 숲에 구원을 받은거야. 나처럼.

    그녀가 숲에 빈 것은, 채 생명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가버린 뱃속의 작은 무언가를 위해서였다.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도, 병원에 끌려가 뱃 속을 도려내야 했을 때도 울지 않았던 그녀지만 나지막히 아기에게 용서를 빌던 목소리에 숲이 떨리던 때에는 눈물이 터졌다.

    무엇이 그 숲에 있는 걸까?

    우리 둘의 대화의 시작이자 끝인 질문이었다. 무엇이 살든 중요한 것은 그 숲의 무언가가 우리 둘을 구원했다는 점이었다.




    .. 계속...

    웨지감자의 꼬릿말입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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