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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antivirus_71
    작성자 : 파이리♨
    추천 : 3
    조회수 : 1064
    IP : 121.189.***.173
    댓글 : 0개
    등록시간 : 2012/11/18 22: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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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군 전쟁

    1 개관 

    1095년부터 1291년까지 일어난, 가장 유명한 유럽권과 아랍권(혹은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의 전쟁이다. 유럽의 팽창주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드러낸 대표적인 전쟁이며, 의 뜻이란 이름 하에 벌어진 철저히 이득이 계산된 전쟁이라는 평가가 많다.

    1071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로마누스 4세가 만치케르트 전투에서 대 셀주크국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 대패한 뒤 혼란의 시기가 오고, 비잔티움 제국의 밥줄이던 아나톨리아 지역의 대부분을 잃었다. 1081년 새로운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즉위한 다음 다시 제국을 일으켜 세운다. 하지만 제국의 힘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성스러운 교회를 수호할 수 있도록 이교도들에게 맞설 원군을 보내달라."란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우르바노 2세는 이 편지를 받은 것을 기점으로 성지를 보호하고 탈환할 십자군을 모집하게 되었으며 이후로 약 200년간 4차[1]에 걸쳐 십자군을 파견하여 중동 지역을 침공하게 된다.

    2 왜 벌어졌나? 

    십자군 원정의 목적을 나열해 보면...

    1. 성지의 회복과 무슬림에 대한 신성모독 단죄. 여기에는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교 순례자가 이슬람 세력에게 박해를 받는다는 점이 포함되었다. 사실 이것은 비잔티움 제국에서 원군을 얻기 위한 날조한 내용이었지만, 최소한 대단히 효과적인 선동이기는 했다. 여기에 우르바노 2세가 사람들을 동요시키기 위해 다소 과장한 점도 있다.
    2. 서유럽의 인구증가로 인한 식량부족해결과 인구감소효과.-> 당시 유럽은 농업기술 자체가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에 식량생산성이 형편없었으며, 지배자들은 인구를 획기적으로 감소시키는 방법이 전쟁임을 알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 토머스 매든 교수와 자크 르 고프 교수의 의견에 따르면, 서유럽은 카롤링거 르네상스와 수도원 운동에 힘입어 느리긴 하지만 식량공급이 차츰 개선되고 있었으며, 전쟁 같은 대규모 학살을 통한 인구 감소 효과를 불러일으킬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이미 십자군 전쟁 이전에 서유럽은 지방 영주들의 끊임없는 소모전으로 서유럽의 인구가 유지되고 있었기에 십자군 전쟁을 통한 인구감소는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3. 교회 재산을 증대시킬 수 있다. 당시 십자군 원정은 굉장히 길었으며, 어차피 돌아올 가능성도 낮을거라고 예상한 교황과 사제들이 원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재산을 위탁받으면 그냥 자기네 것이 될 거라고 계산했었다. 실제로 교회가 원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영지의 관리를 위탁받은 것은 사실이고, 당시 교회는 서유럽에서 가장 발달한 관리 시스템이라서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수도원들은 영주들에 비해 효과적으로 땅을 관리하고 운영할 줄 알았다.
      그런데 교회에서 멋대로 영주들의 땅을 먹튀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우선 영주들은 원정 이전에 유사시에 자신이 사망할 경우를 대비하여 제2, 3, 4의 상속권자까지 설정해 두었으며 자신의 영지는 교회가 신속하게 상속권자에게 양도할 것을 문서로서 약속해뒀다. 또한 영주의 사망시 상속권자가 없을 경우에는 교회보다는 영주와 계약을 맺고 있는 상위의 영주에게 그 영지가 몰수되었다.
    4. 교황권의 신장과 동방으로의 권력확대, 동시에 비잔티움 제국을 누를 수 있는 기회라 판단했다. 이와 함께 세속 권력자의 세력을 약화시킬 목적이었다.
    5. 2와 연관된 목적으로 사람들을 내보냄으로써 유럽의 내적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서유럽 안에서의 지방영주간의 다툼은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이에 따라 교회는 따로 전쟁을 하면 안 되는 날까지 만들어서 반포할 정도였다. 오히려 실력자들의 부재로 인한 왕권찬탈 음모가 성행하였고, 각 왕조간의 대립이 성행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의 대립이다.
    6. 이 외에도 무장 순례 기원설이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십자군 원정이 원정이 아니라 무장을 하고 성지를 순례한다는 개념인데, 그에 대한 근거로 "1차 십자군 원정이 예루살렘을 탈환한 뒤에 대부분의 원정군이 유럽으로 돌아가버렸다."를 꼽는다. 말 그대로 "성지순례 왔습니다." 하고 집에 가버렸다는 것이다.
    이 외에 참여한 사람들의 동기는

    1.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주는 면벌부(대사)를 획득할 목적으로 참여했다. 성지탈환의 성전에 참여하면 교회에서 천국에 갈 수 있는 면벌부를 준다고 홍보했었다. 그래서 1차 십자군의 경우 유달리 부랑자,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우선적으로는 교황청의 선언에 열성적으로 반응한 수사들이 이것을 자극했다. 특히 은수자 피에르의 화려한 말빨에 의해서 우르바누스 2세가 계획한 1차 십자군보다 몇달 빠르게 민간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그 뒤에 교황청에서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사람은 고해성사의 보속을 없애주는 '대사'를 행하겠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2. 당시 유럽은 장자 상속제였으며, 차남 이하로는 권력이나 재산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영지를 얻기 위해 많은 기사들이 참여했다. 농민들은 새로운 농경지를 얻기 위해, 상인은 동방무역의 길을 뚫기 위해 많이 지원했다. 뭐 왕이 가면 부하들은 당연히 따라오긴 하고, 상속권을 가진 영주도 많이 참여하긴 했지만.
    3. 성지와 성자들의 묘에 대한 환상이 지원 동기로 나타난 사람도 있었다.
    4. 순수한 신앙으로 일어난 귀족들도 있었다. 오로지 신을 위해서였기 때문에 어떤 의미론 영광스러운 자들. 가톨릭은 물론 이슬람도 칭송했었다. 허나,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십자군 전쟁을 위해 많은 토지와 재산을 헌납하거나 처분했기에 전쟁 후에는 몰락해 버리기 일쑤였다.

    3 본편 

    서막. 정확하게는 저기서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는, 은자 피에르가 이끈 속칭 '빈자의 십자군'이 어떤 의미에서는 0차 십자군 원정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쪽은 그야말로 흑역사인 십자군 전쟁에서도 다시 흑역사이기 때문에 카운터에서 제외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에 대해서 그나마 대중적으로 다룬 것은 십자군 이야기 정도.

    별별 짝퉁 십자군들도 많았다. 양치기 십자군(정말로 양치기들로 구성된 십자군들인데 아랍지역에 가긴 커녕, 프랑스에서 도적질이나 하다가 열불난 프랑스 기사단들에게 끔살로 토벌당했다.)이나 소년 십자군 등등. 여하튼 십자군 전쟁 와중에 별 유행같지도 않은 게 나돌았던 모양.

    3.1 1차 십자군 원정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선동으로 유럽의 제후들이 '십자군'에 대거 참가했다. 동로마 제국령을 지나 아나톨리아를 가로지르며 셀주크 제국의 분파들을 격파하고 시리아로 진군하여, 당시 시골 마을 하나까지 왕국을 자처할 정도로 분열돼 있던 시리아를 어렵지 않게 제압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이후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크 공국, 에데사 백국, 트리폴리 백국 등의 기독교 십자군 국가를 세웠다.

    성지 대신 엉뚱한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한 4차를 제외하면 가장 막장이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제대로 성공한 유일한 십자군(...)

    이 때의 이슬람권은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가 한창 막장테크를 타던 중이고, 페르시아에서 시리아, 아나톨리아까지 차지했던 대 셀주크 제국은 갈갈이 찢겨지던 시점이라 십자군의 대규모 침공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불로뉴 백작가의 차남인 '부용의 고드프루아'가 최초로 예루살렘 성벽을 넘었으며, 후에 예루살렘국의 초대 왕이 된다. 고드프루아는 샤를마뉴의 후손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힘과 용기와 솔직함으로 전설적인 인물이다. 고드프루아는 차남이면서도 많은 재산을 지닌 실력자였는데, 오직 예루살렘에 가기 위하여 분쟁을 모두 손해보는 방향으로 수습하고 재산을 정리하여 십자군에 참가하였다.

    이 외에 유명한 제후로는 안티오크 공국의 시조인 '타란토의 보에몽'이나 트리폴리 백국의 시조인 '생 질의 레몽' 등이 있다.

    유럽인들의 이슬람권에 대한 첫 공격이다 보니 유혈과 학살도 이 때 가장 심했다. 유명한 예루살렘의 대학살 외에도 1차 십자군 당시 점령당한 도시들은 대부분 학살을 면치 못했으며, 식량이 떨어진 십자군이 식인을 자행했다는 이야기가 유럽인들과 아랍인들의 기록에 모두 등장한다.

    3.2 2차 십자군 원정 

    알레포와 모술의 영주인 장기가 에데사 백국의 수도인 에데사를 점령함으로써 제 2차 십자군이 촉발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콘라트 3세, 프랑스의 루이 7세 등이 중심이 되어 중동으로에 쳐들어갔으나 중동 정세에 무지했던 서유럽 왕들의 고집 때문에 막대한 물자와 사람 목숨만 까먹고 땅은 한 뼘도 점령하지 못했다. 결국 원정은 장기의 후계자인 누르 앗 딘(누레딘)의 권위만 세워 준 채 대실패로 막을 내렸다.

    대실패로 끝난 2차 십자군 원정의 유일한 성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은, 1147년 원정을 떠나는 도중에 이슬람 무어인들의 영역이었던 리스본을 공격해 함락시켰던 점이다.

    3.3 3차 십자군 원정 

    하틴의 뿔 전투로 예루살렘 왕국이 사실상 궤멸되고 성지 예루살렘이 1187년 이슬람 군주 살라딘에게 점령당하자, 그에 따라 성지를 탈환하고자 해서 결성된 십자군이다. 1189년 부터 3년 동안 계속되었다.

    사상 최대 전력을 가진 십자군으로 당시 참가했던 왕의 능력, 군대의 질, 수, 참가국으로 따질 때 모든 십자군 원정 중에서도 최고 수준이라 할 만 하다.[2] 후세에 호사가들에 의해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가장 많기도 한데, 살라흐 앗 딘과 리차드 1세의 대인배 배틀[3]이나, 이 십자군을 전후하여 벌어진 유럽의 권력 이동등등.

    그러나 1차 십자군 시기에는 이슬람권이 사분오열되어 십자군이 쉽게 승리를 차지할 수 있었으나, 3차 십자군 시기에는 살라딘의 주도 아래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부터 시리아와 예멘자지라에 이르는 영토가 단일 제국으로 뭉쳐져 있었다. 더군다나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와 영국왕 리처드 1세의 분열, 신성 로마 황제의 어이 없는 사고사로 인하여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4] 그리고 예루살렘 왕국의 왕으로 선출된 몬페라트의 콘라드는 대관식도 하기 전에 두 명의 어쌔신에게 칼을 맞고 사망하고 만다.[5]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는 프랑스 영토 내에서 형식상 리처드의 주군이었는데[6], 유능한 인물이었지만, 사나이답고 열정적이고 마쵸한 리처드에 비해 찌질한 인상이 강해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필리프는 십자군 원정 내내 리처드와 반목하다가 결국 귀국해 버렸고, 게다가 리처드가 없는 동안 프랑스 내 리처드의 영토의 박탈을 선언 했다. 분노한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1193년 부활절에 돌아와서 전쟁을 끝내자'는 약속을 남기고 필리프와 싸우러 가는데, 전장에서 갑주도 걸치지 않고 순시하다 저격당해 죽었다. 또, 살라딘도 1193년 부활절 3주전에 죽었다. 참으로 드라마틱한 결말이라 하겠다.

    사실 전장에서의 살라딘은 리처드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이긴 적이 없다. 또한, 이러한 리처드의 활약으로 3차 십자군은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하틴의 뿔' 전투에서 기독교도들이 대패하면서 3차 십자군이 모집되었는데, 그 하틴의 뿔에서 살라딘이 대승한 이래 잃거나 위험해진 땅들 중 해안선에 있는 도시들은 리처드의 활약으로 대체로 되찾거나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비롯한 내륙의 도시들은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으므로 전세 자체를 역전시키지는 못하였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이 이 3차 십자군 직전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게임 어쌔신 크리드의 1편 배경이 이 시기 이다.

    3.4 4차 십자군 원정 

    가라는 성지는 안 가고 엉뚱하게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희대의 막장 전쟁.[7]

    흔히 4차 십자군 자체를 베네치아 공화국의 대상들이 결성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거나 심지어 베네치아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위해 십자군을 만들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4차 십자군의 전개는 우연에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어마어마한 연쇄작용을 이루게 되었다. 다만 그 연쇄작용이라는 것은 같은 기독교 국가인 비잔티움 제국을 파멸로 몰아넣게 된다.

    본래 베네치아는 4차 십자군을 중동까지 실어다 주기로 했었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이미 알렉산드리아에서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받는 대신 십자군에 협조하지 않기로 살라딘의 후계자 알 아딜과 밀약을 맺은 상태였다. 즉 양다리를 걸친 것이다.

    둘 중 하나라도 포기하기 싫었던 베네치아는 잔머리를 굴려서, 십자군에게 성지까지 실어다 주는 뱃삯을 요구했고, 돈이 없던 십자군은 결국 뱃삯을 몸으로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베네치아는 십자군에게 아드리아 해의 헝가리 왕국의 자러(Zara, 현 크로아티아의 자다르-Zadar)시를 공격할 것을 요구했다. 자러는 원래 베네치아의 도시였으나 헝가리인들에게 빼앗겼었다. 머지 않아 도시는 십자군에게 점령되고 약탈당했다. 애초에 자다르는 로마 교황에게 충성하는 가톨릭계 헝가리 왕의 영토였기 때문에 이때부터 4차 십자군은 막장테크를 탄 것이다.

    하지만 한 번 약탈의 맛을 본 십자군은 성지 따위는 잊어버리고[8] 비잔티움 제국의 제위계승전에 용병으로 뛰어들었고,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직접 점령하고 약탈하기에 이르렀다. 구체적으론 삼촌에 의해 쫓겨난 비잔틴의 황태자 알렉시오스가 십자군에게 막대한 보상을 약속하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를 요청, 공격은 성공하여 알렉시오스는 알렉시오스 4세로 즉위하였으나 애초에 막대한 보상은 무리였으며 곧 반대파에게 살해당했다. 이에 십자군은 알렉시오스 4세의 복수를 한다는 명목으로 아예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대가를 받아낸 것이다.

    그리하여 십자군에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동로마 제국은 일단 멸망했으며, 동로마 제국을 대체하여 라틴 제국과 그 부속국가가 들어섰다. 비잔티움의 잔존 세력은 각지로 흩어져 망명국가를 건설하여[9] 콘스탄티노플 탈환을 위해 진력했으며 결국 니케아 제국이 라틴 제국을 축출하는데 성공하여 비잔티움은 다시 부활하였지만 이렇게 국력을 소모해버린 그들은 오스만의 성장에 대응할 수 없게 되었다.

    흔히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 것 때문에 파문당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4차 십자군이 파문당한 것은 같은 기독교 국가인 헝가리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이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자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단순히 동방 교회를 굴복시키려고 했을 뿐이라 크게 분노했다. 거기다 교황 특사가 십자군이 성지까지 향하기로 했던 맹세를 자의로 방면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에 대해 그리스 교회는 로마 가톨릭에서 오로지 지옥의 본보기와 암흑세계의 소행을 보았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곧 콘스탄티노플 점령이 큰 이익이 된다는 것을 파악했다. 거기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귀중한 보물들을 약탈해서 일부를 교황에게도 진상헀을 뿐 아니라 가톨릭과 갈라선 동방정교회의 중심지에 가톨릭 국가인 라틴 제국을 세웠다. 4차 십자군은 도덕적으로는 변명할 말이 없을 정도의 큰 수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로마 교회의 세력을 크게 늘리게 되었다.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로 향한 탓에 몰락하고 있는 십자군 국가들은 4차 십자군으로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예루살렘 왕국의 수명을 늘려주었다. 이들은 무슬림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는 중개무역지로 기능하였기 때문에 멸망시키지 않는 것이 더 득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 아딜은 우트르메르를 그냥 내버려두었다.

    3.5 5차 십자군 원정 

    아크레 왕국의 장 드 브리엔이 이슬람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공격하나 실패하였다. 한편 동방의 수수께끼의 기독교 왕국인 프레스터 존이 십자군을 도운다는 전설이 퍼져있었으나 그 정체는 사실 몽골군이었다.

    3.6 6차 십자군 원정 

    교황인 그레고리우스 9세가 십자군 파병하는 것을 조건으로 신성 로마 황제로 임명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원정을 재촉하나 이를 하려고 하지 않자 그를 파문한다.

    프리드리히 2세는 파문되고 나서야 십자군을 일으켰으며 아이유브 왕조의 알 카밀 무함마드 빈 알 아딘[10]이 내란을 겪는 상황이자 외교 정책으로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받게 되었으며 이에 그레고리우스 9세의 공격을 받으나 이를 격퇴한다. 참고로 이때 외교정책이란, 간단히 말해서 예루살렘을 산 것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모스크는 여전히 이슬람교도의 지배하에 둔다는 조건이었다. 누이좋고 매부좋은 결정이었으나 당연히 교황이 납득할리는 없었을테지. 사실 알 카밀도 성지를 팔아넘겼다는 이유로 이슬람권에서 거센 비난을 받았다.

    프리드리히 2세는 그레고리우스 9세로부터 파문이 무효가 되고 제6차 십자군은 성공을 거두게 되었으며, 조약이 만료된 1239년까지, 그리고 그 후에도 5년간 예루살렘은 기독교 세력하에 있었다.

    3.7 7차 십자군 원정 

    1244년 예루살렘은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와 동맹을 맺은 호라즘군에 점령당하고, 이에 맞서기 위해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당시 아이유브 왕조는 시리아와 이집트로 분열되어 있었다.)와 동맹을 맺은 십자군은 라 포르비에(La Forbie) 전투에서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와 호라즘군에게 포위섬멸 당한다. 라 포르비에 전투는 하틴의 뿔 전투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즉 유럽에서의 원정군이 아닌) 십자군이 대규모 전투를 벌인 유일한 사례였으며 최후의 사례이기도 하다.

    이렇게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 2세가 이끄는 이슬람 세력에 예루살렘이 넘어가자 프랑스의 루이 9세는 7차 십자군을 일으켜 다미에타(Damietta)를 점령하고 카이로로 가는 길목인 만수라(Mansura)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바이바르스(Baibars)의 작전에 말려 십자군은 전멸당하고 루이 9세는 포로가 되어 배상금을 지불하고 석방된다. 그 해에 살라딘 2세는 살해되고 아이바크(Aybak)가 맘루크 왕조를 열었으며, 만수라 전투를 지휘한 바이바르스는 10년 후에 술탄이 된다.

    3.8 8차 십자군 원정 

    프랑스의 루이 9세는 다시 십자군을 결성하여 바이바르스가 주도하는 맘루크 왕조를 공격한다. 이에 시칠리아 왕인 샤를이 원군으로 출병하나 루이 9세는 튀니스에서 병사한다.

    3.9 9차 십자군 원정 

    루이 9세가 튀니스 공격에 실패하자 영국의 에드워드 왕자(후에 에드워드 1세)가 십자군의 마지막 거점인 아크레로 진군하였고 일 한국에 원군을 요청하여 1만의 기병대를 지원받는다.

    십자군은 맘루크의 공격으로 리마솔, 트리폴리 등을 잃었으며 십자군을 지원하는 몽골군은 아파미아, 알레포 등을 공격하며 서남쪽 방향으로 진격하면서 많은 무슬림들을 학살하나 칼라운이 반격을 개시하여 몽골군을 몰살시킨다.

    그 때 십자군은 쿠칸에서 패배하였으며 최후의 거점인 아크레가 함락당하여 칼라운이 거점이 될 만한 곳은 모조리 파괴하였으며 십자군은 막을 내리게 된다.

    4 외전 

    4.1 소년 십자군의 원정 

    4차 십자군 원정 이후 프랑스와 독일에서 소년 소녀들의 신앙의 힘으로 이슬람 교도를 기독교도로 개종시킨다는 목표로 유럽 각지 수만명의 소년들이 십자군을 조직하였다. 성지 탈환의 기치를 걸고 배를 타고 출발하였으나, 그 후 오랫동안 이들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결국 한참 후 이 계획 자체가 어른 사기꾼들이 꾸며낸 낚시로 밝혀졌는데, 배를 모집한 상인들이 이들을 알렉산드리아에 노예로 팔아 넘긴 것. 물론 성지에는 근처도 가지 못했다. 이들 중 불과 수십명만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소년 십자군의 대표주자는 독일의 니콜라스와 프랑스의 에티엔이 있다. 이들은 모두 사적계시에 의한 십자군이라고 볼 수 있다. 독일의 니콜라스는 십자군 원정의 실패가 어른들의 영적 불결함에 있다고 보았고 성서의 계시대로 천국이 아이들에게 열려있듯이 성지도 아이들에게 열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니콜라스는 또다른 사적계시를 받아, 지중해가 갈려서 도보로 성지까지 갈 수 있을 거라 주장했다. 하지만 이들 무리는 이탈리아로 가던 도중에 대부분이 공중분해 되었으며,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는 교황의 명령에 의해 남은 무리의 대부분이 고향으로 반송되었다. 게다가 약속한 지중해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닷길은 갈리지 않았고 이에 실망한 상당수의 무리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니콜라스와 남은 극렬 빠돌이들이 배를 얻어타고 성지로 가려고 했으나. 그때 노예 상인의 떡밥에 물려서 노예가 되었다.

    프랑스의 에티엔은 자신을 십자군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예수의 메신저로서 어느날 예수가 자신에게 나타나 프랑스왕에게 편지를 전하라고 한 메시지를 들었다. 그에 따라 자신은 프랑스의 왕 필리프에게 편지를 전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고 다니며 추종자들을 모았고, 이 추종자들과 함께 필리프에게 편지를 전해줬다. 그게 끝이다. 에티엔은 자신의 편지가 필리프에게 전해지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해산되었으며 "이게 다야?" 하며 실망한 추총자들은 알비파 십자군에 참전하는 정도로 끝났다. 사실 소년 십자군의 기록은 그렇게 많지 않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피가 발목까지 차올랐다.", "그분의 영을 받은 용맹한 기사가..." 하는 식의 감상적 기록을 남긴 수사들의 기록인지라 자료로서 객관성이 부족하다.

    양치기 소년으로 위장한 노예상의 부하인 소년이 프랑스 북부에서부터 마르세유까지 소년 소녀들을 낚아서 끌고 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유명한 이야기인 피리부는 사나이는 이 사건을 풍자한 것으로 추측된다.[11]

    4.2 알비주의 십자군 

    12세기 후반부터 남프랑스의 도시 알비(Albi)를 중심으로 금욕주의와 청빈사상을 내세운 알비파(카타리파)가 창궐했다. 가톨릭 교회를 거부하는 그들은 이단으로 선언되었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알비파를 토벌하기 위해 십자군을 일으켰다. 주로 프랑스 북부의 기사들이 참가했으며, 남프랑스의 알비파 영주들이 대항해서 싸웠다. 십자군은 남프랑스를 깡그리 엎어서 알비파의 씨를 말려버렸다(...)

    도시를 점령하기 전에 병사 하나가 도시안에 있는 독실한 가톨릭인과 알비파를 어떻게 구별할지 의문을 던지자, 교황특사 아르노 아모리(나중에는 시토대수도원장까지 올라감)는 이렇게 대답했다.

    모두 죽여라. 주께서 가려 내실 것이다.
    (원문: Caedite eos. Novit enim Dominus qui sunt eius)
    (영어번역: Kill them all. For the Lord knoweth them that are His.)
    (현대영어번역: Kill them all and let God sort them out)
     
    이...이뭐병.

    알비파는 당시 기준으로 보나 지금의 기준으로 보나 정통 기독교라기 보다는 마니교에 가깝다. 그들은 구약의 성부를 육신을 만든 거짓 신으로 보았고 영혼을 중시한 신약의 예수를 진짜 신으로 보았다. 그들이 금욕주의와 청빈사상에 지독하게 목매단 이유는 육체적 세계는 거짓이기에 육체를 즐겁게 해는 쾌락 역시 거짓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는 육체라는 감옥을 만드는 공장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천시받았으며 성관계는 철저하게 금지당했다. 

    혹자는 다빈치 코드를 인용하여 알비파가 여자에게 글도 가르친 현대적인 계몽운동가라고 주장하지만. 알비파가 여자에게 글을 가르친 건 "니들이 왜 임신을 하면 안 되는지 알려줄게. 이 감옥공장아!" 하며 여자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알비파는 남프랑스 지방에서 인기를 끌었고 후에는 알비파 영주들이 늘어나자 알비파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성서를 자의적으로 번역 해석하기도 하여서[12], 후에 프랑스의 툴루즈에서 이와 관련된 지역주교회의(시노드)가 열렸다.

    한편 스페인 바르셀로나 지방의 아라곤 왕국은 아이러니하게도 국토회복운동의 선봉이면서도 가톨릭에서 이단으로 찍힌 알비파의 툴루즈 백작 레몽의 후원자였으며, 또한 톨루즈의 알비파 영주들을 자신의 보호령으로 두고있었다. 그러나 레스터 백작이 아라곤 왕국의 보호령들을 이단이라는 이유로 차례차례 뺏어가자, 아라곤 왕국의 왕 하이메는 레몽과 동맹을 맺고 3만의 군사로 레스터 백작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이것이 바로 뮈레 전투(Battle of Muret)이다.

    당시 레스터 백작의 군대는 고작 870명의 병사(270명은 중기병)로 3만의 군대와 맞서싸운다는 비교도 안되는 숫적 열세에 처하였으나, 알비파와의 전쟁으로 단련된 그들의 정예 중기병들은 순식간에 아라곤 왕국군의 방어선을 뚫고들어가서 아라곤 왕국의 왕, 하이메를 죽이고 겁을 먹고 도망치는 아라곤군을 신나게 썰어댄다.

    결국 이 전투는 레스터 백작의 승리로 끝났으며(레몽은 도망쳤다.), 알비주의 십자군의 리더였던 이 백작의 이름은 바로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13]. 동명이인이자 영국의 왕 헨리 3세에 대항하여 남작전쟁을 일으킨 시몽 드 몽포르의 아버지였다.

    4.3 국토회복운동 (레콩키스타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도 왕국이 이슬람교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벌였던 수백년간의 전쟁. 엘 시드 등이 활약했다. 아라곤, 카스티야, 레옹, 포르투갈, 나바르 등등이 있었으며 결국 아라곤+카스티야로 성립한 스페인 제국이 그라나다까지 쓸어버리고 국토회복운동을 완성했다. 보통 현대의 시점에서는 십자군에 포함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국토회복운동에 종군하는 것도 십자군과 대등한 책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여겼다.

    4.4 동방십자군 

    동유럽의 프로이센 일대(현재의 폴란드 서부)에 잔존하고 있던 이교도를 상대로 한 토벌 겸 개척전쟁. 주로 독일기사단이 싸웠다. 이때 독일 기사단이 정복한 땅이 나중에 독일 기사단이 세속국가화 되면서 프로이센 왕국의 근간이 되었다. 이때의 주요한 기독교 세력으로는 튜튼 기사단이 있었고, 주요한 이교도 세력으로는 리투아니아가 있었다. 당시 튜튼 기사단은 리투아니아를 들쑤시는 것으로 영토, 관광비(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기사들이 동방에서 튜튼 기사단에게 얼마의 돈을 지급한 뒤 성전을 뛰었다.), 무역 등으로 증흥했으나 튜튼 기사단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폴란드에 의하여 리투아니아는 기독교로 개종했고, 이후 1410년 탄넨베르크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연합군에게 튜튼 기사단이 대패하면서 100년에 걸친 튜튼 기사단의 쇠락이 시작되었다.

    4.5 대 오스만 제국 십자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성장하여 팽창함에 따라 그들을 막기 위한 전쟁도 십자군 취급을 받았다. 술탄 바예지드 1세가 1396년 불가리아의 니코폴리스 전투 에서 십자군 연합군을 대파시켰다. 이 십자군은 사실상 마지막 십자군 취급을 받는다. 물론 그 후의 계속된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막기 위한 전투도 공식적이지는 않았지만 십자군과 동등하게 여겨젔다.


    5 영향 

    십자군 전쟁은 오래 지속되었지만 4차까지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성지인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함으로써 유럽권이 패배한 전쟁이 되었다. 전쟁이 교황권이 예상과 달리 실패했기 때문에 교황권의 몰락과 신앙의 약화를 가져와 결과적으로 교회의 권위가 떨어졌다. 한편으로 기사와 영지를 기반으로 한 장원경제의 붕괴가 찾아왔고,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의 탄생이 이루어졌다. 동방으로 향하는 무역로를 새롭게 개척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도시경제와 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십자군 전쟁 이후 이슬람권 지역에 건설된 '십자군 국가'들을 통해 이슬람권의 발달된 과학과 문화가 유럽으로 유입되어, 고대의 찬란한 문명과 단절되었던 유럽에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이슬람권에서는 분열된 상황에서 갑자기 유럽이 쳐들어와 개발살을 냈기 때문에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렇게 몰아낸 유럽이 제국주의 시대에 다시 돌아와서 중동을 공격해 식민지로 만들고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제2의 십자군이라고 자화자찬하자, 이슬람은 십자군을 사악한 악의 화신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가 현대 중동의 시대정서를 형성하는데 이바지하였고 지금도 이슬람은 이스라엘과 미국을 제2의 십자군으로 여기게 되어 증오와 폭력을 더욱 증폭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다.

    실제로 이 전쟁 와중에 이슬람과 기독교는 종파와 이해관계로 사분오열되어 서로서로 싸우는 일이 빈번했다. 이슬람의 영웅이라던 살라흐 앗 딘조차도 다른 종파에서 고용한 자객들에게 죽을 뻔했고, 십자군이 헝가리로 쳐들어갔다가 되려 깨져버린 일이나, 알비주의 십자군 같은 내부의 충돌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이 서로 손을 잡고 적을 공격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6 평가 

    개관 문단에서 설명한 대로, 오늘날에는 유럽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드러낸 대표적인 전쟁이며 신의 뜻이란 이름 하에 벌어진 철저히 이득이 계산된 전쟁이라는 평가가 많다. 리처드 도킨스는 예리코의 전투와 더불어 종교가 빚어내고 미화한 참극이라 평가했다.

    물론 견해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다. 토머스 매든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세계의 기독교 침공에 따른 반작용이라고 한다. 토머스 캐든 교수는 그에 따른 주장으로 무어인들의 이베리아 반도 점령과 투르크군에 의해서 동방정교회의 영역이 점령당해, 기독교 세계는 동서 할 것 없이 샌드위치 식의 압박을 당했다는 것이다.

    단 이 주장은 일반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가톨릭과 동방정교회는 갈라섰기 때문에 동방정교회가 받는 위협이 '기독교 세계'라는 이름으로 가톨릭에게 위협이 되었다고 보기도 어렵고, 셀주크 제국은 이미 팽창기를 지나서 지역별로 철저하게 분열되어 더이상 군사적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이슬람 세력의 공세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나고 기독교 측이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는 구호 아래 일방적으로 공세를 펴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셀주크의 도래 이전에도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은 내내 이슬람권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십자군을 전후해서 이슬람권의 기독교권에 대한 특별히 강력한 공세가 진행된 적은 없었다. 실질적의 위협의 수준을 따지자면 이슬람권 전체가 단일 왕조의 지배하에 있으며 적극적으로 팽창했던 우마이야 왕조나 압바스 왕조 때가 훨씬 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 서유럽권은 이슬람권보다는 동로마와 신경전을 벌이느라 바빴다.

    이 주장에 대하여 옹호론을 펴는 사람들의 근거를 들어보면, 일반적으로 "동서대이교(대분열)가 있었던 후에도 여러차례, 서유럽교회와 동방교회가 교류가 있었고, 그들 사이에 같은 기독교도라는 어떤 공통분모와 그것에 따른 동질감을 느꼈다."를 먼저 내세운다. 처음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가 교황에게 구원요청을 할 때도 이와 같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비잔티움의 동방 교회가 로마의 서방 교회를 정말 신앙에서 벗어난 이단으로 봤다면, 애시당초 이러한 요청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세계 위기론도 위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 가능하다고 한다. 서유럽은 물론 동유럽의 기독교도들은 셀주크 투르크가 지역별로 분열되던 말던 솔직히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혹시라도 이슬람 세력에게 포위당할까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슬람세력들이 서유럽세력이 반격할때까지 얻은 땅들은 무혈로 얻은 땅들이 아니었다.

    그나마 정신을 좀 차린 20세기 중후반 이후에는 그 당시의 원흉인 유럽에서도 십자군을 비난하기도 하고, 가톨릭 역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가톨릭이 과거에 저질렀던 범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할 때 십자군 전쟁 역시 가톨릭이 저지른 범죄 중 한 가지로 언급했다.

    대한민국에서 일부 기독교 성직자들이 위대한 전쟁이라고 헛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조금만 파고들면 기독교끼리도 죽어라 싸운 전쟁, 심지어 정교회 나라인 동로마 제국에선 같은 기독교라고 칭하는 십자군을 사람으로 생각하느니 차라리 이단자인 이슬람인들이 더 사람이고 십자군은 짐승이라고 증오하는 기록까지 가득 남긴 걸 정도로 이들 짓은 악랄 그 자체였다. 그걸 단지 기독교-이슬람 전쟁이라고 가볍게 여기는 이들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셈.

    7 대중매체 속의 십자군 

    십자군 전쟁은 영화의 소재로서 관심있는 분야지만, 기독교와 얽혀 있기 때문에 쉽게 건드리기 힘든 소재 중 하나이다. 현재로서는 킹덤 오브 헤븐이 가장 균형잡힌 시각으로 제작되어 있으니 볼 만하다. 단, 킹덤 오브 헤븐 시청시에는 반드시 감독판으로 찾아서 보는 것을 권한다. 무려 40여분 가까이 차이가 나는 건 둘째치고, 그 40분이 대부분 본편(편집본)의 '엉성한' 스토리 서브플롯을 연결해주는 부분들이다.

    물론 킹덤 오브 헤븐도 영화이니만큼 실제 역사와 차이나는 점이 있다. 애초에 주인공 이벨린의 발리앙은 20대의 간지남이 아니라 50대의 늙은이였으며, 예루살렘 왕국 공주 시빌라와의 로맨스도 구라이다. 영화에서 시빌라 공주는 무능한 악역 기 드 뤼지냥과 억지로 결혼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얼굴만 잘 생긴 희대의 무능남 기에게 홀라당 빠져서 왕관을 들어다 바친 골빈년(…)이다. 단, 발리앙이 살라딘과 싸웠던 예루살렘 공방전에서 "썩을...덤벼! 덤비면 주민이고 포로고 뭐고 다 죽이고 모스크 전부 때려부술 거야!" 하고 협박했던 것은 사실이고, 발리앙이 군사들에게 기사 작위를 줬다는 것도 사실이다. 모든 인원을 기사로 서임한 건 물론 아니고, 60명 정도를 날림으로 기사로 서임했다. 이는 당시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기사 숫자가 터무니없이 부족했기 때문. 말하자면 장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병사들을 대충 골라서 장교로 임명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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