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들어가며
-청소년기를 앙드레 지드나 헤세와 함께 통과해온 세대가 있었다면 90년대 이후엔 일본 작가들의 소설이 청년기의 사랑의 열병과 성장통을 대변하는 것을 보며 뭔가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신경숙)
90년대 이후, <상실의 시대>로 대표되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들의 약진에 힘입어, 간결한 문체와 독특한 소재, 감각적인 묘사를 무기로 삼은 일본 소설들이 한국 문학계에 물밀듯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무라카미 류, 츠지 히토나리, 가네시로 가즈키, 미야베 미유키,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등의 현대 일본 작가들과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나쓰메 소세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 <금각사>의 미시마 유키오 등 근대 일본 작가들의 소설도 널리 사랑받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의 문학이 외국의 문학에 비해 열등하거나 널리 읽혀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박완서, 박경리, 공지영, 신경숙, 이문열, 황석영 등의 글을 보면 분명히 번역으로 한 차례 걸러진 외국의 문학들보다 마음에 직접 와 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만 그 특유의 진지함과 무게감이 감각적인 젊은 세대가 선택하기에 조금 부담이 될 수도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면에서 소위 말해 '잘 나가는' 현대 소설가인 김영하, 김연수, 박민규, 정이현 등의 존재는 참으로 다행이지요.) 그런 젊은 층이 한국 소설에 대해 가진 가려운 부분을 일본 문학은 효과적으로 긁어준 셈이지요.
어쩜 한 국어로 된, 한국 문학을 하는 한국인 작가로서 신경숙은 작금의 젊은이들의 청춘과 사랑, 열정과 감동을 책임지는 문학의 기능을 상당부분 일본의 것에 빚지고 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과 일말의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외딴 방>, <깊은 슬픔>, <리진>, <바이올렛> 그리고 밀리언 셀러에 등극한 <엄마를 부탁해>까지. 한국 현대 문학사에 많은 족적을 남기고 있는 작가로서 느끼는 당연한 책임감과 시대유감이겠지요.
이에 신경숙은 스스로 밝히듯 '여러 개의 종이 동시에 울려 퍼지는 것 같은 사랑 이야기'를 하나 쓰게 됩니다. 한국어로 쓴 아름답고 품격 있는 청춘 소설. 작가가 소망하는 목표치에 얼마나 다가갔을 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신경숙표 청춘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_차별화 : 삼각형과 사각형.
작가가 스스로 밝힌 사랑이야기의 포부와는 달리 소설에는 애절한 사랑에 대한 묘사나 언급이 그닥 등장하지 않습니다. 제가 읽은 이 소설에는 오히려 죽음과 상실, 어두운 시대와 고독 같은 것들을 실컷 맛볼 수 있었지요. 게다가 분명 작가 스스로 일본의 문학과 차별성을 두고 우리말로 된 청춘 소설을 목표로 썼다고 밝혔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겹쳐서 떠올랐습니다. 물론 이야기나 시대 배경 등 어느 하나 겹치는 내용은 없지만, 소설을 지배하고 있는 분위기가 특히나 주변인들의 연이은 죽음과 갑자기 찾아온 고독을 견디며 소수의 인물들만 소통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상실의 시대>의 와타나베의 그것과 상당히 흡사했습니다. 배경만 서울과 80년대의 운동권이지 도쿄와 60년대 일본의 전공투 운동으로 치환한다면 상실의 시대의 한국버젼이라고 부를 만한 소설이 등장할 지도 모를 일입니다. 특히나 '소꿉친구'가 죽음으로 상실된다는 점에서도, 그걸 통해서 남은 자들이 겪어내는 아픔이나 슬픔까지도요. 개인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신경숙은 상실의 시대를 읽었을 것이고, 무의식 중에서 그와 비슷한 청춘의 상실을 이야기하려 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히 차별화는 있었습니다. 흔히들 <상실의 시대>를 대표하는 시각적인 아이콘으로 삼각형을 꼽습니다. 화자인 와타나베와 관계하는 다른 2명의 인물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그 위태한 삼각형의 어느 한쪽이 무너지며 나머지 2명에게도 영향을 미치죠. 얼핏 오나벽해 보이지만, 한 쪽이 없어지면 결국 나머지 2쪽도 허무하게 무너지게 되는 삼각형의 불완전함이 <상실의 시대>를 관통하는 이미지입니다. 반면, 신경숙의 <어디선가..>은 도형으로 치자면 사각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디선가..>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도는 항상 사각형을 그립니다. 정윤 단이, 명서, 미루, 그리고 그 외에 윤교수나 에밀리가 한 명의 자리를 대신하기도 하며 사각형을 유지해나갑니다. 이렇게 삼각형에 비해서는 둔해보이지만, 한 쪽의 상실로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탄탄한 관계인 이 사각형은 상실의 시대와의 차별성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상실의 시대>의 와타나베가 결국 자신마저 상실한 것과 달리 <어디선가..>의 정윤은 끝까지 자신의 고독과 상실을 안고 꿋꿋하게 살아나가게 되죠.
삼각형과 사각형. 더 뾰족하고, 더 날카롭고, 더 감각적인 삼각형에 비해서 덤덤하고 둔하지만 끝까지 변함없이 지속되는 청춘들의 이야기. 어쩌면 같은 '상실'이란 테마를 다루면서도, 암울한 청춘들의 이야기를 신경숙만의 감각으로 풀어내고자 했던 점은 이런 점이 아닐까요. 저는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_사각형의 관계 : 닮은 꼴
앞서 <상실의 시대>와 달리, 화자인 정윤과 관계하는 인물들의 관계가 늘 사각형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럼 3명의 관계와 4명의 관계는 실질적으로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친구 3명이 모이면, 의견이 한 쪽으로 쉽게 결정됩니다. 2대 1의 결정이 나오니까요. 하지만 4명이라면 상황은 좀 달라집니다. 보통 2대 2로 팽팽히 맞서는 경우가 많이 나오지요. 바로 이 차이입니다. 4명의 관계는 삼각 관계와 달리 서로 닮은 모양들로 양분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각형은 어떤 축이라도 가운데를 가르면 대칭의 모습으로 나눠지게 되지요.
소설에서는 4명의 관계가 2개의 닮은 꼴로 자주 등장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소꿉친구 사이인 정윤-단이, 또 다른 소꿉친구 명서-미루가 등장하지요. 그리고 애정의 관계로는 정윤-명서, 미루-윤교수의 짝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정윤-엄마, 미루-언니의 관계도 비슷하게 정리가 되네요. 찾아보면 이 보다 훨씬 다양한 닮은 꼴들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경숙표 네모난 소설의 인물들은 자신과 닮아 있는 반대편의 누군가를 보며 아픔을 위안받고 치유해갑니다. 소꿉친구를 잃은 정윤은 마찬가지의 상처를 가진 명서를 보며 위안을 받습니다. 상실의 치유는 같은 상처를 지닌 누군가에게서부터 시작됩니다.
저는 소설 속의 가장 중요한 닮은꼴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이 소설의 리뷰를 본론으로 끌고가고자 합니다. 그게 <상실의 시대>와 차별되는 이 소설을 말하는 방식이며, 또 더 나ㅓ아가 일본 소설을 벗어나고자 했던 신경숙의 '한국형 청춘 소설'의 주제이기도 하니까요.
_닮은꼴 하나 : 크리스토프와 그리스도.
"그럼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기로 하지. 지금 이곳에 있는 여러분 각자는 크리스토프일까? 아니면 그의 등에 업힌 아이일까? (....) 여러분은 불어난 강물을 삿대로 짚고 강을 건네주는 크리스토프이기만 한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 전체이며 창조자들이기도 해. 때로는 크리스토프였다가 때로는 어린 그리스도이기도 하며 서로가 서로를 강 이편에서 저편으로 실어 나르는 존재들이네. " (<어디선가..>, p.60-63)
소설 속 작은 이야기로 상당한 비중으로 등장하는 것이, 성경 속의 이 '크리스토프와 그리스도' 이야기입니다. 크리스토프(christoph)는 그리스도(christ)라는 단어에 '옮기다'라는 접미어(ph)가 붙은 이름으로, 말 그대로 사공인 크리스토프가 어린 그리스도를 등에 업고 강을 건넌 이야기입니다.
윤교수의 입을 빌어 작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업은 크리스토프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라는 주장도 하지요. 강의 이 편(치안)에서 저 편(피안)으로 건너가는 것을 인생에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누군가의 등에 업히기도 하고, 누군가를 등에 업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때론 누군가를 책임지기도 하면서 살아가니까요.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동안 그리스도가 크리스토프로, 크리스토프가 그리스도가 되기도 하죠.
_닮은꼴 둘 : 정윤과 명서
소설은 정윤의 1인칭 시점과 갈색 노트에 써놓은 명서의 독백이 번갈아 등장하는 구조입니다. 그만큼 소설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화자인 정윤과 명서라고 할 수 있지요. 두 인물은 닮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닮은이 똑같은 것이 아니라 빛과 어둠, 태극의 양과 음처럼 서로 다른 부분이 합쳐져 전체를 이루는 종류의 닮음입니다.
정윤과 명서는 각각 단이와 미루라는 소꿉친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그 소꿉친구와 자기도 모르는 미묘한 이성적 감정도 가지고 있지요. 소꿉친구를 죽음으로 잃은 상처도, 그 상처를 서로를 통해 치유하는 모습도 닮아 있습니다.
"아마 나는 너를 사람들로부터 외딴 섬처럼 고립시킬 거야. 다른 사람들과 너를 차단시킬 거야. 오로지 나를 통해서만 너를 알 수 있도록 만들고 말거다. 나는 네가 그 무엇하고도 관계되지 않기를 바라게 될 걸. 항상 너와 떨어져 있지 않으려고만 해서 우리는 둘 다 흉해질 거야." (위 책, p.357)
하지만 닮은 그들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명서는 정윤을 사랑했던 단이의 죽음을 통해서, 또 언니를 사랑했던 미루의 죽음을 통해서 닮은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결국 누군가의 파멸로 이어지고 말 것이라는 확신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사랑했기에 헤어지고, 너무 닮았기에 결국 틀어져버린다는 모순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소설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각각 '내가 그 쪽으로 갈까' 와 '내가 그 쪽으로 갈게'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그 쪽으로 갈까라는 물음은 즉, 강의 건너편으로 건너는 행위, 그리스도가 크리스토프로 크리스토프가 그리스도로 변하듯이 내가 당신을 닮아도 되냐는(혹은 당신을 사랑해도 되냐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그 쪽으로 갈까'라는 물음에 대해서 '내가 알아서 한다'라는 대답을 한 명서. 그는 정윤이 그를 향해 오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평생 함께 있고자 했던 정윤과 명서는 8년에 한 번씩 만나는 사이로 변하지요. 하지만 소설은 명서의 갈색 노트에 '내가 그 쪽으로 갈게' 라는 문장을 써넣는 정윤의 모습으로 끝이 납니다.
에필로그의 내가 그 쪽으로 갈게는, 결국 서로를 향해 닮아가겠다는 의지이기도 하지요. 결국 우리는 자신의 반대편을 향해 건너가는 행동이, 반대편의 누군가를 닮아가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행동임을 알게 됩니다. 정윤은 결국 끝까지 명서를 사랑하고, 명서를 닮아 그에게 향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이며 소설은 마무리 됩니다.
_닮은꼴 셋 : 나와 당신.
정윤과 명서의 복잡하고 우울한 사랑 이야기를 통해서, 결국 신경숙이 우리에게 하고자 했던 말은, 결국 나와 당신은 서로를 향해 닮아가고 있는 존재들이란 것입니다.
정윤은 윤교수가 죽은 뒤, 윤교수처럼 강당에서 학생들에게 '크리스토프와 그리스도' 이야기를 해줍니다. 젊은 시절 자신이 들은 것처럼, 그의 이야기를 똑같이 젊은 누군가에게 이어주는 것이지요. 신경숙의 한국형 청춘 소설은 우리 모두가 어젠가는 청춘이었고 지금도 청춘인 사람들도 추억처럼 청춘을 이야기하는 세대를 닮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지만 그 각자의 청춘과 사랑의 빛이 바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당신과 닮아감으로서, 각자의 사랑과 청춘은 더욱 빛을 발합니다. 결국 윤교수와 같은 나이대와 직위에 오른 정윤이 명서를 향해 '내가 그 쪽으로 갈게' 라는 문장을 남긴 것처럼.
우리 모두는 강을 건너는 그리스도이자, 크리스토프이기도 합니다. 저 건너를 향하려면 당신은 그리스도가 되었다가 크리스토프도 되어야 합니다. 서로를 향해 건너가려면 서로를 닮아야 하니까요.
_마치며
신경숙의 소설을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와 유사함을 지적하면서, 하지만 삼각형과 사각형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면서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사각형 내의 닮은꼴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소설은 이틀만에 읽었지만 리뷰는 끈질기게 썼군요.. 꽤..
제가 찾아낸 것이 맞는지, 제가 읽은 이 소설의 내용이 정확한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제가 이 소설을 읽고 느낀 점이 리뷰를 쓰면서 더욱 확고한 모스븡로 제 마음 속에 자리 잡았다는 것은 확실하네요. 누구나 같은 책을 읽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훌륭한 책일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어디선가..>를 읽었다면, 혹은 읽게 될 것이라면 어떻게 읽을지 궁금하네요. 정윤은 자신을 찾는 명서의 전화를 받고 '내가 그 쪽으로 갈까' 의문에서 '내가 그 쪽으로 갈게'라는 확신으로 바뀌었듯이, 내용의 의미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하여 확신으로 끝난 리뷰였습니다. 못나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징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