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bed width="560" height="315" allowfullscreen="true" allowaccess="always"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src="//www.youtube.com/v/KowzT2VNHKo?hl=ko_KR&version=3"></embed><br /><br />무례하게도 저는 직설적으로 답변부터 먼저 좀 하겠습니다.<br />왜냐하면 투우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에 맞서 싸우는 반론을 제시하는게<br />사실을 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투우는 예술입니다.<br /><br />희생되는 소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지만,<br />제 감각은 그러한 연민보다는 생사의 영역선상을 넘어서는 <br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전해져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강렬에 감탄합니다.<br /><br />왜 헤밍웨이와 피카소, 달리 같은 예술가들에게 투우가 그토록<br />강렬한 영감을 주는지 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br /><br />투우의 잔인성에 분노하는 이들의 주장도 충분히 이해는 합니다.<br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모든 존재들에게는 마땅히 천수를 누릴 권리<br />가 있습니다. 소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지요.<br /><br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평생 소고기를 한번도 먹지 않을 정도로<br />강력한 동물박애주의자가 얼마나 될까요? 몇 되지 않겠지만 저는 <br />그런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br />존중받아야 합니다.<br /><br />하지만 이 세상에는 인간 사회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합리성과는 별개로<br />자연의 이치라는 어쩔 수 없는 섭리또한 존재합니다. 야생의 세계를 <br />설명하는 법칙이라 할 수 있는 약육강식, 생존경쟁과 같은 개념으로 <br />설명할 수 밖에 없는 그런 것들요.<br /><br />인류가 이념으로 극복하려 하고 문명또는 문화라는 시스템으로 통제하고<br />어떤 면에서는 승화시키려는 시도를 해왔지만, <br />인간 사회의 합리성은 자연의 섭리를 넘어서지는 못합니다.<br /><br />그게 우리의 한계죠. 인간의 한계, 실존의 한계, 우리의 존재와 자아를 넘어선<br />곳에 있어서 도저히 닿지 않는 영역,<br /><br />그 섭리라는 이치 안에서 우리 존재가 벗어날 수 없는 울타리안에 죽음이란<br />가장 숙명적인 한계 조건이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br /><br />대부분의 종교가 이 죽음에 대한 인간의 공포감을 극복하고자 하는 고민에서<br />출발한 것입니다. <br /><br />하지만 종교에서 우리가 원하는 대답을 얼마나 찾아올 수 있을까요?<br /><br />수천년 인류의 역사에서'죽음의 조건'에 대한 극복이란 질문에 대해서 그 어떤<br />종교도 완벽한 대답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기독교에서의 부활은 아직도 다가오지<br />않은 미래의 가능성이고, 불교는 차라리 그런 질문 자체를 중단하라고 말합니다.<br />불교는 차라리 가장 완벽한 죽음에 도달하라는 답을 내놓습니다.<br />그 어떤 해석을 달리 해도 열반의 의미는 곧 자아 작동의 중지라고 할 수 있죠.<br />그것은 곧 삶속에서 죽음을 체험하라는 의미입니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더 다가가기힘들죠.<br /><br /><br />그러나 우리는 인간입니다. 인간 존재의 모순을 벗어날 수 없죠.<br />죽어야 하기 때문에 불멸을 소망하는 욕망또한 우리들이 평생 벗어날 수가 없는 짐입니다.<br /><br />피할 수 없다면 그 죽음이란 문제를 즐기는 방식으로 감내하기 위해 인간을 그것을 또한<br />문화화 시키는 겁니다. 사람을 직접적으로 죽이지 않는 검투 경기는 사라졌지만 여전히<br />우리는 격투기를 통해서 자신의 강함을 타인을 통해 대리체험을 할려고 합니다. <br /><br />사실 모든 스포츠의 경쟁 심리 속에는 헤겔이 말한 '인정투쟁'과 같은 기제가 숨어있는<br />것입니다. 그 문제를 보다 더 깊이 파고들면 결국 타자와의 대결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br />싸움으로 귀결된다는 변증법적 역설에 도달하게 되죠. 결국 어떤 의미에서 모든 스포츠<br />는 죽음과의 대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br /><br />그 뿐만 아니라 암벽등반(혹은 야마카시)이라든지 모터 레이싱이라던지 죽음과 직접적으로 <br />대결하는 스포츠가 우리들 곁에는 얼마나 많습니까? 투우또한 그것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br /><br />단지 문제가 된다면 죽음을 바로 눈앞에서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존엄성을<br />바로 눈앞에서 거스르게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죠.<br /><br />민주주의 시대로 오면서 인류는 생명의 가치를 그 어느 때보다 높이 사게 됐습니다.<br />어떤 경우에도 '생명의 존엄성'을 거스르는 경우를 제외하려 하고, 그 가치를 인간의<br />영역을 넘어서서 세계 전체에 적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 자체는 의미가<br />있습니다.<br /><br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사라지는 세상이 오는 것인가요? 우리 인간이 죽음을 정복<br />할 수가 있나요? 어떤 문화학자는 인류가 죽음을 기피하는 관념에 너무 집착하면<br />그럴 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감은 강화되고, 육체와 젊음에 대해 병적으로 열광하는 문화가<br />도래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습니다. 아도르노, 칼 융들이 대표적이죠.<br /><br />이미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생명연장의 꿈을 그토록 열망한다는 것은 <br />곧 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br /><br />우리 시대는 죽음의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상일지도 모릅니다.<br /><br />그래서 저는 투우를 '신성한 죽음의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투우는 인류가 문명화를<br />통해 잊어버리고자 하지만 결코 본능적으로 잊을 없는 어떤 것에 대한 향수를 일으<br />키는 무엇이 있습니다. 투우는 낭만적이고 아름답습니다.<br /><br />물론 모든 이들이 제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겠죠. 하지만 저는 투우가 영원하기를 바랍니다.<br /><br /><br /><br /><br /><br /><br /><br /><br /><br /><br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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