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고교 시절 국사교과서를 보며 항상 의문을 품었던 부분이 조선 후기에 신분제의 해체로 당시 양반 호구수가 50%에 이른다는 부분이었습니다. <BR>대구지역 호적을 근거로 들었던 교과서에서는 이와 함게 호적상 노비 호구가 점차 소멸해 가는 점을 들어 양반층의 비대화와 노비의 양인화를 통해 <BR>조선 후기 신분제가 해체되는 과정에 이른다는 설명이 함께 하는 내용이죠. </P> <P> </P> <P>하지만 특정 사회 내에서 지배계급이 무려 50~60%에 이른다는 통계는 다수의 사람이 모두 지배층이 될 수 없다는 </P> <P>상식적인 이해차원에서도 그러하거니와 한 지역에서 모두가 양반임을 지배층임을 주장하는 그러한 상황이 성립할 수 있다는게 </P> <P>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P> <P> </P> <P>이러한 내용은 얼핏 양반층의 비대화와 신분제의 해체로 단순화 시켜 이해할 수 도 있겠지만 <BR>좀더 파고들어 생각해 보면 좀 복잡한 조선시대 신분제의 양상을 가늠하게 합니다. </P> <P> </P> <P>우선 이러한 조선 후기 "신분해체론" 논리의 기원은 일본인 학자 '시카타 히로시'가 호적에 기재된 직역을 분류 취합하여 </P> <P>조선후기 신분제를 연구한 것에서 유래합니다. <BR></P> <P>그는 조선 후기 조선의 신분사회를 양반-평민- 노비라는 사회계층으로 분류하고 </P> <P>18세기 이후 조선의 양반 계층 비대화 현상을 조선사회의 후진성 내지 정체성에서 그 원인을 찾았죠. </P> <P> </P> <P>이후 연구자들 역시 그의 연구에서 크게 벗어 나지않아. </P> <P>호적상 양반호구의 증가를 양반계급의 증가로 보아 18세기 이후 양반층 비대화와 더불어 노비의 감소현상에 주목하며 <BR>조선후기 신분제 자체가 허구화 되며 조선사회가 해체되어가는 현상으로 재해석 하였습니다. </P> <P> </P> <P>하지만 일정한 틀로 조선의 신분제를 바라보기에는 조선사회의 신분제는 그 특이점이 많습니다. <BR>우선 우리가 인식하는 지배계급으로써의 양반이란 존재와 조선후기의 호적에 나타난 양반의 존재는 양자간 개념에서 서로 차이점을 지닌다는 것이죠</P> <P> </P> <P>기본적으로 양반이라는 지배계급은 단순하게 족보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성립 되는 것이 아닙니다. <BR></P> <P>현대에 우리가 아는 자세한 족보가 나타난 것은 조선 후기에 일어난 일로 특정 계급의 정체성은 족보만으로 증명되는 성질이 아닙니다. <BR>양반이란 그 이름에서 알듯 과거제도를 통해 입직한 문반, 무반직을 지칭했던 말이며 </P> <P>이들 계급은 고려말 부터 시행되었던 과전법과 조선성립 후 시행된 <BR>각종의 수조권을 바탕으로 점차 토지를 늘려가며 성장했던 지주 계급을 지칭합니다. </P> <P> </P> <P>즉 양반은 본원적으로 향촌의 지주계급이자 지식인이었던 집단으로 </P> <P>그들은 향촌의 경제적 여건을 기반을 점차 중앙관직으로 나아가며 국가권력을 형성하였던 조선의 특수한 지배계급을 말합니다. </P> <P>더불어 이러한 지위를 유지하고자 오랜 기간에 걸쳐 그러한 특권을 유지하고 강화하며 500년을 성장했던 계급이죠.</P> <P> </P> <P>처음 조선 초기 양반 계급은 관직에 3대 이상 나아가지 않으며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P> <P>이후 그 범위가 친인척으로 확대었음에서 나타나는데 이들이 조선사회에서 지배계급으로 <BR>지위를 누릴 수 있던 것은 단순하게 족보와 호적같은 추상적으로 명시된 신분이 아닌 </P> <P>관직과 경제적 기반인 지주라는 실질권력이 상호조화를 이루며 성장한 세력이 때문입니다.<BR></P> <P>현직으로 관직에 근무하며 정계에 영향을 끼친 경반들과 향촌의 지주로 군림하며 </P> <P>향임직을 통해 지방수령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향반들 까지 모두 경제적 여건과 정치권력이란 <BR>양자를 통해 영향력을 실질적으로 행사했던 계급으로 이런 계급적 성격상 </P> <P>이들 양반계급이 호구의 50%에 이른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P> <P> </P> <P>그렇다면 조선 후기 호적에 등재된 양반호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P> <P> </P> <P>이른바 "모칭유학 (冒稱幼學)"의 문제입니다. </P> <P> </P> <P>유학(幼學)이란 과거를 보기 위해 당분간 군역을 면제받는 자를 말하는 것으로 <BR>처음 유학을 이유로 군역을 면제받는 경우는 일시적 면제에 불과 했으나 점차 죽을때 까지 유학임을 호적에 등재하며 면제받는 경우가 흔했졌고. <BR>이 때문에 국역을 피하는 수단으로 유학의 호적 기재가 점차 늘어가게 되었습니다. </P> <P>과거시험을 공부하는 이러한 호구가 즉 우리가 교과서에서 통계로 보았던 양반호의 정체인 것이죠. <BR></P> <P>호적을 통해 살펴 보면 17세기 유학을 호적에 등제한 자의 수는 10% 내외였던 반면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이들의 비율이 50%에 달하게 되는데. </P> <P>이는 조선 후기 군역의 징수 방식 변화라는 세제의 변경과 그 궤를 같이 합니다.<BR> <BR>애초 지방주민들이 유학이라는 직역명을 얻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였습니다. <BR>유학을 모칭하는 자가 늘어나는 것은 곧 국역대상자가 감소함을 뜻하기 때문인데 </P> <P>지방수령 또한 국가에서 배당된 수치 만큼의 국역 대상자를 확보해야만 했기에 <BR></P> <P>단지 과거를 이유로 호적에 이를 등재하는건 결코 쉬운게 아니였죠 </P> <P>때문에 당시 지역주민이 국역을 피해 유학을 모칭하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막대한 댓가를 지불했어야만 가능했습니다. <BR></P> <P>예를 들어 국역에 상응하는 비용을 관청에 한번에 제공하거나 국역을 져야하는 본인 대신 </P> <P>사노비등을 국역자로 대신 세우는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했던것이죠 </P> <P> </P> <P>하지만 양란 이후 재정이 악화되며 조세확보 수단으로 이러한 유학이 활용되며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BR></P> <P>조선 후기 당시 지방관은 일정 수치의 국역자만 확보하면 되었기에 </P> <P>이러한 유학 등의 면제 액수를 열어두고 이를 통해 지방운용의 여지를 넉넉히 확보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P> <P>이 때의 유학으로 등재된 호적은 당연히 실제 양반호가 아닙니다. </P> <P>양반의 신분과 국역을 피하기 위해 등재한 "유학"의 명분으로써 양반호는 상이한 것이로 <BR>이때 이미 호적상에서 어느정도 괴리가 발생하게 됩니다. </P> <P> </P> <P>이러한 "모칭유학"의 문제는 18세기 중엽 군역정액이 중앙정부의 총액이 아닌 지역단위로 확정이 된 이후 심화되게 됩니다. </P> <P>당시 지방관은 재결획득(자연재해를 입은 논밭으로 감세대상 토지)과 함께 군역징수의 어려움을 호소하는데 정렬을 쏟게 되는데 <BR>이는 곧 지역 주민의 조세와 직결 되는 것으로 지역에 할당된 조세를 줄이고자하는 지방관의 노력이 성과를 얻으면 <BR>지역주민은 지방관이 지역에 할당된 조세를 줄여주는 선정을 베푼 것으로 여겼습니다 </P> <P> </P> <P>때문에 당시 지방 수령의 호소는 대부분 "반호와 노비호가 많아 군역을 부과할 호가 적다"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BR>즉 호적에 등재되는 "모칭유학"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 날수록 지역에 할당되는 중앙정부에 대한 조세부담은 줄어들게 되고 <BR>지방재정은 한결 여유롭게 되며 지방관은 선정을 베푸는 수령이 되는 구조가 된 것이죠. </P> <P> </P> <P>물론 중앙정부에서는 이러한 현상은 곧 군역의 감소와 중앙정부 재정악화를 의미함으로 <BR>실록상에서 보면 당시 이 문제에 대해 중앙 정부에서 대책논의가 활발히 논의되는 것으로 나타나며 <BR>1870년 이후 "유학"의 통계수치를 정액으로 고정하는 조치를 통해 이들이 늘어나는 것을 억제하고자 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합니다 </P> <P> </P> <P>하지만 당시 이미 취약해진 재정구조와 사회여건상 이러한 모칭유학을 사용하는 자는 계속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P> <P>이를 통해 생각해 보면 모칭유학을 통해 조선 후기 호적에 양반으로 등재된 양반호의 수와 그 의미는 <BR>우리가 알고 있는 지배계급으로써의 양반호와는 전혀 다른 성격임을 을 알 수 있습니다. </P> <P> </P> <P>하지만 더불어 호적상에 등재되는 모칭유학자의 수가 늘어나며 흥미로운 현상이 새롭게 나타나게 됩니다. <BR>유학으로 등재된 양반호의 경우 장정 말고 그 아내 역시 사대부의 아내를 의미하는 "씨"로 기재되감이 그것인데. </P> <P>조선시대 호적을 찾아보면 18세기 까지 장정 말고 여자들이 "씨"로 등재되는 경우는 드문경우로 <BR>초기 모칭유학을 하여 양반호로 기재가 되더라도 부부 모두가 양반호를 참칭하는 것은 억제된 듯 보이나 <BR></P> <P>19세기에 이르게 되면 아내를 “씨”등재하는 수치가 50%를 넘기며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P> <P>이는 19세기에 이르게 되면 실제 양반계급이 증가한 것은 아니지만 오랜기간 호적의 등재를 <BR>이유로 모칭유학을 넘어 양반을 지향하는 양민의 수가 늘어나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P> <P> </P> <P>이는 경국대전에서 이미 양반호의 기록방식을 정형하고 있음에서 찾아 볼수 있는데 <BR>호적에서 양반호의 기재의 경우 부부에게는 남편의 "직"과 아내의 "씨"를 등재하고 솔하 자식과 함께 부리는 노비를 등재하는 당시 양식이 그것으로.</P> <P>때문에 양반흉내를 내는 양인호의 증가는 서류상의 노비를 등재하면서 까지 이러란 양식을 형식적으로 따르게 하였으며 <BR></P> <P>조선 후기 19세기 쯤에 이르면 호적에서 양반호를 흉내내는 형태가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BR>애초 극소수의 지배계급만이 기록하던 호구양식은 19세기 중엽이 되면 거의 대부분의 양인들이 기록하는 일반적인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죠. <BR></P> <P>당시 중앙정부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두고 </P> <P>호적상에 이러한 직역의 기재를 통해 호구의 이탈없이 백성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한 듯 싶습니다 </P> <P> </P> <P>생각해 보면 교과서에서 보았던 양반호의 50%라는 것과 신분제의 붕괴라는 설명은 실제상황과 조금 다른 괴리를 지니게됩니다. <BR>이는 또한 보다 깊게 생각해 보면 조선 신분제가 지닌 특수성을 이해하여야만 가능한 것이기도 합니다. </P> <P> </P> <P>조선의 신분제는 양천제를 형식적으로 제도화 하기는 했으나 양인과 천인의 구분이 모호하였습니다. <BR>조선시대 신분구조는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 천인이 도주하여 양인이 되기도 하였고 양인이 생활고를 이유로 천인을 자처하기도 하였죠 <BR>이런 현실에서 조선은 이들을 국역의 부과를 통해 호구를 통제하고자 하였습니다. </P> <P> </P> <P>조선은 후기에 이르며 세제가 난잡해 지고 정치의 혼란 속에 호구의 이탈도 가속화 되며 <BR>양인이 되고 천인이 되는 구분이 더욱 유동적이며 모호와 되어갔습니다. </P> <P> </P> <P>더불어 신분의 정점에 있는 지배계급인 조선시대 양반계급의 성격역시 태생 자체가 특정한 인신적 성질을 지니는 귀족 계급 아닌 <BR>이들 역시 양인으로 출발하여 지역의 지주계급을 이루고 조선 성립과 함께 그들의 성리학적 교양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하며 이룩한 <BR>사실상 혈통적 귀족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른 실질적인 영향력을 바탕으로 지배계급이 된 조선의 특수한 신분제에 기인하는 것입니다.</P> <P><BR>때문에 조선시대 양반계급의 영향력은 그 성질이 전국적이며 획일적인 것이 아니였으며 </P> <P>양반계급이란 성격은 애초 자신이 지주로 영향을 끼치는 한 지방에서 세력을 가지는 계급이었습니다. <BR></P> <P>때문에 특정 지역의 양반은 다른 지방에서도 인정받는게 아니었으며 양반계급의 영향력이란 지역적으로 국환된 것이었죠 </P> <P> </P> <P>이를 통해 생각해 보면 조선의 신분제는 결코 장기적으로 고정된 신분제가 아니었으며. </P> <P> </P> <P>더군다나 조선이라는 국가가 유교적 이상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적 왕권을 이상향으로 하는 유교의 지배 이데올로기 구조라는 특수성은 <BR>모든 백성이 균등하게 왕권으로 상징되는 국가에 수렴하는 것을 지향하는 체제의 성격을 형성했습니다. </P> <P> </P> <P>따라서 이런 조선의 신분제는 이러한 특수성으로 인해 애초부터 각 신분들간의 상하격차가 분명하지 않았고 </P> <P>무엇보다 상호간 이동이 가능하였다는 점에서 여타 다른 문명의 신분제와 차이점을 지니는 독특한 신분제였습니다. </P> <P> </P> <P>이를 동시대 이웃나라와 비교해 보면 중국의 경우 일찍부터 신분제가 해체되어 각 가문을 중심으로 가문의 특수성만 존재하는 사회였고. <BR>오히려 가문의 일이 곧 공의 영역이 되고 관직을 통해 국가에 나아가는 것은 개인이 입신양명하는 사의 영역이 되었던 개방적 신분제 사회였던 반면 <BR>에도시대 일본의 경우은 무사계급과 하층계급의 격차가 분명하고 지역공동체 단위에서 신분제의 구분이 엄격해 신분간 이동이 불가능한 </P> <P>철저한 봉건 사회였죠. </P> <P> </P> <P>조선의 신분제는 이들 양자의 특징이 보이는 신분제의 중간에 위치한 신분제 사회라 여겨집니다. </P> <P> </P> <P>형식적으로 엄격한 신분제 구조를 지향하되 그 내부적으로 경계가 명확하지 않고 </P> <P>또한 이동이 가능했던 신분제 사회가 조선시대 신분제의 특징인 것이죠. </P> <P> </P> <P>조선 후기 양반호의 증가를 두고 단순하게 신분제의 붕괴와 해체로 평가하는 것은 <BR>일본식 혹은 서구식의 엄격한 신분제의 잣대를 특수한 조선의 신분제에 적용해서 발생한 오류가 아닌가 합니다. </P> <P> </P> <P>조선의 신분제란 애초 모호하고 유동적인 신분제 사회였고 조선은 국가운영 차원에서 이를 인위적으로 구분하며 </P> <P>국역과 조세의 부과를 통해 통제하고 "유지"하고 있었을 뿐입니다</P> <P> </P> <P>따라서 조선 후기 양반호의 증가는 이러한 국역의 부과방식과 경제여건의 변화에 맞추어 </P> <P>그러한 유동적인 신분제가 변화에 맞춰 그 형식을 바꾸었음을 의미합니다. <BR></P> <P>조선후기를 보면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자세한 족보들과 대성, 본관을 참징한 족보가 증가함을 볼 수 있습니다. </P> <P>오늘날 누구나 성과 본관을 가지고 있는 한국사회가 어찌 형성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인데 <BR>이러한 변화 역시 조선 후기의 조선 신분제가 지닌 특수성을 살펴본 이후에 비로소 명확한 이해가 가능하지 않을까합니다</P> <P> </P> <P>생각해 보면 조선시대 한,중,일 삼국이 보여준 신분제의 모습은 지금 현대사회에도 내려와 그 일면을 보여 주는 듯합니다. <BR>일찍히 신분제가 해체되고 가문중심으로 재편되었던 중국의 경우 지금도 대가족 중심의 가족문화를 중요시하는 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BR>엄격한 신분제 구도 속에 계급에 복종하는 양식을 이어온 일본의 경우 세습제 국회의원직, 관료들의 존재와 </P> <P>철저한 관료주의 기업문화 같은 영향을 지금도 보여줍니다. </P> <P> </P> <P>한편 한국의 경우 정치하는 높으신 분들이란 인식 또는 돈, 권력이 있는 계층을 경외하는 계급구분에 익숙하면서도 <BR>대학입시나 고시공부 등을 지금도 여전히 신분상승의 기회로 여겨지며 어려운 가정에서 성공해 사회지도층 인사가 되는 과정과 같은 <BR>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익숙한 사회이기도 하죠. </P> <P> </P> <P>또한 마치 양반이 향촌 사회에서 영향력을 끼치듯 지금도 한국사회에서 성공이란 개념은 개인의 성취 차원이 아닌 <BR>자신을 아는 주변인들 고향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금의환향의 개념이기도 합니다. </P> <P> </P> <P>조선시대의 신분제가 단지 먼 옛날 일어난 모습이라 여기기에는 지금도 비슷한 점이 너무 많은게 사실이죠. </P> <P>조선 말 양인들이 겉으로 양반인척 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들여 양반호로 호적에 등재하고 </P> <P>가짜 족보를 만들고 심지어 호적상에만 등재되는 가짜 노비를 세우며 <BR>주변에 보여주고자 했던 모습은 어찌 상상할 수 있을까요?</P> <P> </P> <P>지금 우리 사회에서 외제차를 몰고 다니면 그 사람을 다르게 본다거나 족보를 보듯 학벌을 따지고 </P> <P>소득에 비해 터무니 없이 비싼 명품을 사용하며 <BR>외부로 보여지는 것에 치중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지금도 반복되는 한국사회의 풍경을 통해 </P> <P> </P> <P>조선시대 양인들이 꿈꾸던 양반지향 성향을 가늠할 수 있을 듯 합니다. </P> <P>한국사회에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고 한국 사회에 부유층이 실제 다수를 차지 하는게 아니듯 <BR></P> <P>조선 후기 양반호로 등재되어 있다 한들 조선의 실제 양반계급이 급격히 증가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P> <P>교과서와 책에 나온 조선후기 양반 50%의 전설과 소위 신분제 붕괴는 이렇게 파악된다고 생각합니다. <B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