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번에 조사할 일이 있어서 반기문 UN 사무총장에 대해 정리하다
아무리 봐도 뭐 까는 글은 거의 없더군요
그래서 오유에서 검색해보니 몇 개 욕하는 글이 있더라구요.
그리고 그걸 토대로 검색해보니 한쪽으로 편향된 인터넷 신문들의 기사도 몇개 보이구요.
그런 것을 보고 반기문 총장에게 다소 실망하였으나
조금 더 알아보고자 하였고, 그 결과를 정리했습니다.
우선 저는 뭐 반기문 총장에게 핫바 하나 얻어먹은 적 없고
그냥 순수한 대학생입니다. 개인적으로 존경한다거나 그런것도 아닙니다.
저는 그 사건들에 가까이 있지도 않았고, 그땐 어렸기에 진실은 잘 모릅니다만
그 당시 신문이나 책등을 찾아보고 대략적으로 정리한 내용일뿐입니다.
대부분의 출처는 반기문 총장에 대한 책입니다.
이 것 역시 조작된 것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무작정 한쪽 면만 보고 매도해버리는 몇몇 분들에게 바칩니다.
① 반 총장의 별명이 기름 바른 장어 (slippery Eel)란 것은 치사하게 잘 빠져나가서 생긴 별명이다? -
외교보좌관 시절, 민감한 질문에 대해 매끄럽게 잘 빠져나간다는 의미로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붙여준 것
이는 다른 장관급 인사들이 설화를 일으키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으로, 지나치게 중립적이라는 평을 들을 수도 있으나, 그가 있던 자리를 감안하면 그의 발언 한마디가 국가를 대변할 수도 있다. 그만큼 그는 중립적인 화술을 지향한 것이라고 볼수 있다.
② 그저 출세지향형이 아닌가 ? - 사실 그는 막힘없이 쾌속 승진을 한 사람이다. 이것은 자신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운이 좋았던 까닭도 있다. 하지만 그가 지나치게 출세지향형이라는 것은 결코 옳은 말이 아니다. 유능했기 때문에 그의 선배들이 파격적으로 그를 기용하려고 한것이고 , 노신영 전 총리도 당시에 3급이었던 그가 1급의 자리인 총리의전 비서관으로 일할 때 그를 일찍 승진시키려 했다. 하지만 반 총장은 승진을 늦춰달라고 요청했을 정도이다. 또한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다는 것도 그의 일대기를 보면 알 수 있다. 2006년 2월 김영삼 정부에서 차관급 직위인 의전수석 비서관에 오른 후, 2004년 1월 외교부 장관이 될 때까지 약 8년간 차관급 자리를 옮겨 다녔다. 그리고 그는 인도 총 영사관, 대사관 근무와 주미 총영사 근무 등 외교부 내에서 “남들이 원하지 않는 곳에 가서 빛을 발하는 사람” 이라는 평판을 받기도 하였다.
③ 지나치게 친미 아닌가 -
"외교부, 국방부 등 '용산기지 이전협상팀'이 '반미주의자'라는 이유로 노무현 대통령과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배제한 채 협상을 진행했다는 내용의 청와대 보고서가 21일 밝혀져 파문이 예상된다.
특히 외교부는 △노무현 대통령이나 NSC 인사들은 반미주의자들이므로 개입을 최소화시킨다 △용산기지 이전은 미국이 원하는 대로 얼마의 돈이 들든지 추진해야 한다 △용산기지 이전 합의각서(MOA), 양해각서(MOU)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협상이 진행될 수 없다 △국회와 국민이 문제삼지 않는 수준에서 합의 형식과 문장 표현을 바꾸는 것을 협상 목표로 한다는 등의 협상 기조를 내부적으로 마련한 것으로 드러났다."
- 이것이 문제의 인터넷 기사입니다.
진실은 다음과 같다.
그 당시는 외교부에서도 소위 ‘자주파’ 와 ‘동맹파’ 의 갈등이 심화되던 때이다.
그리고 용산기지 이전 협상등에 관련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미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는 투서가 청와대에 접수된 사건인데, 이 주최는 윤영관 장관 및 차관, 국장 과장등이다.
이 일을 계기로 윤영관 외교부 장관과 위성락 북미국장이 경질되고 2004년 1월 16일 반기문 보좌관이 투입된 것이다. 당시 노대통령은 반 총장을 신임함을 밝혔고 반총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노무현 대통령이 자주외교를 하지 못했다 고 한 논란을 불식시키는 것이었다.
이 발언은 외신에서 독립적 외교라고 번역되어 동맹국인 미국내에서 민감한 반응을 일으켰고, 21세기에 자주외교를 외치는 나라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노무현 정부의 자주외교 구상은 외교안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유보적이거나 비판적이었다. 이로 인한 문제를 키우지 않기 위해 반 총장이 그러한 ‘자주’의 개념을 취임사에서 아예 읽지 않고 넘어갔고 기자가 ‘자주 외교’와 관련된 질문을 하자 그 사실을 정 수석의 월권 혹은 실수로 격하시키고 넘어가고자 발언한 것이다.
④ 지나치게 중립적 - 자리가 자리인 만큼 그런 것도 있었고 , 그 당시에는 한미관계가 벌어지고 있었고 북한 문제, 일본 문제가 대두되는 어려운 시국이었다. 보수진영은 중립적인 반 총장의 태도에 적잖은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2005년 4월 국회 통일외교통상 의원회에서 이러한 불만이 표면화 되었고, 홍준표 의원은 “반 장관은 외교부의 역량이 모자랄 때 대통령이 명쾌하게 가르쳐준 것을 감사드린다고 말했는데, 대통령의 외교 선생인 외교부 장관이 어떻게 이런말을 하느냐”고 질타했다. 반 총장은 “외교부 장관은 대통령의 외교 참모일뿐, 대통령의 외교 선생이 될수는 없다. 외교의 최고 책임자는 대통령이며, 나는 대통령의 외교 철학이나 방침을 집행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 라고 말했다.
또한 “대통령의 철학, 비전이 당대의 외교 흐름을 이끌어 가는 것이 국제사회의 관례”라고 말했다. 반 총장이 노 대통령의 자주외교 노선을 그대로 따른 것은 아니었지만, 대통령의 철학을 존중하고 욕을 먹더라도 정부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을 하는 것을 택한 것 뿐이다.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꼭 필요하다 싶으면 고비마다 한미관계의 중요성을 언급해 왔고, 그 때문에 정부에서 소수파에 머물때가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노무현 정부에서 외교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여러 기록을 남겼다. 2년 11개월동안 외교부를 이끌어 전두환 정부 이래 역대 최장수 외교부 장관이 됐다. 국외 순방은 46회로 105개국을 방문하였고, 임기중 3분의 1을 국외에서 체류할 정도로 많은 국가의 외교사절을 만나는 적극적인 외교를 펼쳤고 한국 방문을 원하는 타국 외교부 장관들의 요청을 거절하는 법이 없어 주말에도 공관에서 자주 회담을 갖곤 했다. 이는 아까도 말했듯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태도였고, 보수나 진보진영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였다.
⑤ 김선일 사건의 책임 - 이라크에 선교를 하러 갔던 김선일 씨가 과격 무장단체에 의해 참수된 사건이 발생하였고, AP통신이 납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외교부에 전화 문의 했으나, 외교부가 이를 묵살했다는 의혹이었다.
미숙한 외교통상부의 대응으로 국민 보호 책임을 방기했다는 비난이 쏟아졌고, 청와대 일부 참모들에 의해 반 총장에 대한 인책론도 제기되었다. 여론이 거세지고 야당에서 외교부 인책론을 제기하자, 비밀리에 노대통령을 독대한 자리에서 사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사표를 수리하지 않자, 반 총장이 스스로 책임지고 사태를 수습하기로 결심하였다. 당시 상황은 잘못의 크기에 비해 너무나도 큰 비판에 매도당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외교부가 잘못한 점이 있지만, 미국같은 경우는 이라크에 많은 병력과 정보원이 있으면서도 미국인 두명이 납치, 참수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미 국무부에 비난 전화 한통 없었다고 한다. 외교부의 미숙한 태도가 김선일씨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감정적인 비난여론이 국민들간에 과열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AP 통신으로부터 김씨의 제보를 묵살했다는 주장에 관련해서는 AP와 진실게임 한적 없다고 반발했다. AP의 누가 어떤 방법으로 질의했는지, 외교부 직원의 관심을 촉발할 만한 내용의 질문이었느냐며 AP 측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매우 안타까운 사건이었지만 전 국민이 감정적으로 사건의 전후 사정을 알려고 하지 않고 모든걸 외교부 책임으로 돌리는 것에 대한 반 총장의 반론이었다.
오히려 그 사건을 계기로 2004년 6월 30일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세안 지역포럼 (ARF)에서 테러리스트 만행을 규탄하는 성명 채택을 문의 하였고, 국제적인 관심을 요망하였고, 이는 의장 성명으로 채택되었다.
⑥ 지나치게 친미적 ? - 2004년 9월 민노당의 노회찬 의원이 “ 외교부 장관은 어느나라 장관인가 ” 라는 말로 기자회견 하였다. 그 계기는 2003년 10월 한 인터넷매체에서 “91년 5월 반기문 외무부 미주국장이 미국압력에 굴복해 SOFA 합동 의원회 각서에 강제로 서명했다는 내용이 담긴 국가 안전기획부의 정세보고 문건을 입수했다”고 폭로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언론들은 반기문이 미국 협박에 굴복하였다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이는 당시 미국의 압력에 못이겨 사인했고, 안기부 역시 비슷한 판단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자주파와 동맹파 사이의 논쟁이 심화되는 시기였고 노회찬 의원은 외교부가 주한 미국 대사관에 보낸 공문이라며 한 문건을 제시하기까지 했다. 이 문건이 사실이라면 대한민국 외교부 장관이 국내의 정치사안을 미국 대사관에 보고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후에 우리 외교부가 주한 미국 대사관이 아닌 미국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보낸 공문임이 밝혀졌고, 정부 내 정보교환 차원에서 이루어진 공문이었던 것이다. 당시 자주파와 동맹파의 논쟁이 심화되는 시점에서 중립적 소수파였던 반 총장은 눈에 가시이기도 하였고, 후에 밝혀진 내용은 언론에서 크게 다루지 않았다.
⑦ 대북 인권 정책에 소홀 ? - 2007년 UN 사무총장으로 활동을 시작하기 전부터 우리 정부의 대북 인권 정책에 큰 별화를 가져왔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UN 인권 의원회나 UN총회에서 북한 인권 결의안을 채택할 때 불참하거나 기권했었고, 탈북자 인권 단체들은 반기문 UN 사무총장 후보에게 이 점에 대해 시위하기도 하였다. 그게 단순히 반총장 혼자만의 의견이 아니었기에, 반 총장이 당선 된 이후 여러차례 북한 인권에 대해 우리 정부의 정책도 전향적으로 변해야 함을 강조 하였고, 그 전까지 결의안을 반대한 것에 매우 아쉽게 생각했는데, 그는 통일부의 반대 때문에 그의 의사와 반하는 결정을 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북한의 문제에 대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기문 UN사무총장 옹호하자고 쓴 글은 아님을 다시 밝혀요.
제가 잘못 알고 있는 점이 있다면 알려주시구요 ㅎㅎ
욕하지만 마세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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