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수호령의 존재를 믿는가?

나는 요즘 수호령의 존재에 대해 참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그게’ 나타나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였다.

처음에는 작은 쪽지로 나타났다. 야간자율학습을 하다가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면 웬 쪽지가 놓여 있었다. 공부하던 책 위에 엄청난 악필로. 별다른 내용은 아니었다. ‘뭐야, 이건?’하며 인상을 쓸 정도로 별볼일 없는 내용이었으니까.

 

이를테면 이런 거였다.

 

‘145쪽을 자세히 보시오’

‘내일은 쪽지 시험이 있을 예정’

‘내일 아침에 버스가 5분 일찍 도착’

 

하는 따위의 내용들이었다. 은근히 기분 나쁜 지시문에다가, 경고 문구였다.

 

나는 친구 중에 누가 장난 쳤겠거니 하며 가볍게 넘겨버렸다.

그러다 쪽지가 한 장, 두 장....끝도 없이 이어지자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남녀공학에 다녔다면 ‘누구지?’ ‘날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나?’하고 두근반 세근반 했겠지만 나는 남고에 다니고 있었다.

스토킹에 가깝게 내 사생활을 파해치고 있었다. 내가 버스에 몇시 몇분에 타고 수업이 언제 끝나는지 등 하루일과를 쭉 꿰고 있었다.

 

“누구냐? 이런 장난 치는 놈이. 기분나쁘니까 그만둬라.”

 

내 자리 주변에 앉아있는 녀석들을 한명 한명 찾아가 으름장을 놓았지만

헛수고였다. 다들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뿐.

 

“무슨 장난?”

 

앞자리 녀석이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댔다.

 

“쪽지 말이야. 짜증나게....계속 장난을 치잖아. 별 시답잖은 내용을 가지고.”

“쪽지가 어딨는데?”

“내 책상 위에 있잖아, 지금. 두 개나.”

“아무것도 없는데?”

“뭐??”

 

그때 알게 됐다. 그 쪽지는 나한테만 보이는 거란걸.

그게 소름 끼쳐서 한동안 쪽지가 보이든 말든 신경도 안썼다. 쪽지가 보일라치면 일부러 책을 덮어버렸다. 무시하다 보면 이 말도 안되는 현상이 사라지겠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이런 행동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집에 가려고 버스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갑자기

 

빠앙-!!!!

 

트럭이 경적을 울렸다.

 

차에 치이기 직전에 트럭이 멈춰섰기에망정이지 그대로 압사당할 뻔했다.

화물용 트럭에 부딪치고도 멀쩡한 사람은 없겠지.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비틀비틀 횡단보도를 건넜다.

 

‘무시하지 마시오’

 

이번에는 쪽지 수준이 아니었다.

엄청나게 큰 글자들이 보도블럭 전체에 나타나 있었다.

그 위를 걸어가는 사람 중에 아무도 바닥을 쳐다보지 않는 걸로 보아,

이번에도 내 눈에만 보이는 듯했다.

무서웠다.

저게 뭔지는 몰라도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글자들은 뒷걸음질 치는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린 나는 차도에 뛰어들기 직전, 인도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알겠어!!! 무시 안하면 되잖아!!” 하고 외쳐버렸다. 그러자 글자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다음부터였던 것 같다.

쪽지가 내 인생에 개입하고, 나도 쪽지를 받아들인 게.

쪽지에 적힌 건 모두 사실이며,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걸 알게된 건 중간고사 시험 날이었다.

 

시험 공부할 때 쪽지가 145쪽을 보라고 했는데 145쪽에서 두 문제나 출제되었다.

 

게다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버스가 5분 일찍 온다는 말을 본 날 조금 서둘러서 나왔더니 지각을 면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험 중에 도저히 답을 모르겠는 문제가 있으면 쪽지가 답을 알려주었다.

 

난생 처음 반에서 1등을 한 날 ‘아, 이거 좀 이상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실력이 아니었다. 버스를 놓치지 않거나 쪽지 시험을 만점 받거나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이건 컨닝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한테만 보이는 쪽지니 괜찮지 않을까?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무슨 이유가 있으니까 나를 도와주는 걸 텐데.

 

후회는 아주 짧았다. 나는 학창시절 내내 약삭빠른 생각에 사로잡혀버렸다.

그 쪽지를 보내주는 ‘무언가’는

내 수호령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날 도와주고 있으니까.

 

어떤 역경이 눈앞에 닥쳐도 쪽지만 있으면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길을 찾거나 노선을 헤맬때도 쪽지가 친절하게 방향을 알려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도 꽤 친해져서, 나도 쪽지도 서로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눈에 안 보이는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쪽지 덕분에 우수한 성적으로 가고싶던 대학의 수석으로 입학했다.

학비는 전액 장학금을 받았고, 덕분에 친구들은 아르바이트에 매달릴 때, 나는 여가시간을 즐기면서 지냈다. 성적 걱정은 물론 하지 않았다. 정답을 쪽지가 알려줄 테니까.

 

내 자유의사가 사라진 꼭두각시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위기의식 같은 건 없었다.

 

그때 나는 막 성인이 되었고, 좀 더 많이 놀고 싶었고, 좀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싶었다.

편함에 길들여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의심도 없이 쪽지의 내용을 따라 무감각하게 행동하고는 했다.

 

그러다 졸업반이 되고 여자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 무언가 크게 어긋났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우리가 키스를 하고 잠자리를 가질 때도 그건 쪽지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아니, 지시문이었다.

 

'혀를 좀 더 써봐'

'여자한테 예쁘다고 말해줘'

'다리를 쓰다듬어줘'

 

 등등....

 관음증 환자처럼 발가벗은 여자와 나를 쳐다보면서 행위 하나 하나를 제 취향대로 하게끔 했다.

 게다가 여자를 고를때에도 내 의사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그 덕에 나는 하룻밤의 짧은 관계를 맺는 나쁜 남자가 되기도 하고, 한없이 다정한 연인이 되기도 했다.

 

 점점 소름끼치는 일이 반복되었다.

 

쪽지를 보내서 나를 돕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수호령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줄에 매달린 인형이 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가고 싶었던 회사 대신 다른 회사의 면접을 보러 갔다.

쪽지가 그 편이 더 가망있다고 해서였다.

부모님 댁에도 내려가고 싶었지만 쪽지는 그럴 시간에 여자를 만나거나 입사 준비를 해야 된다고 했다.

나는 그러면 또 그대로 따랐다.

그러다보니 추석에도, 새해에도, 부모님 생신에도 내려가지 못해 점점 가족하고 멀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말만 따르면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아니까.

나한테 이익이 된다는 걸 아니까. 내가 잘되는게 결국 부모님이 잘되는 거 아니겠어? 하는 안일한 생각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점점...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쪽지 덕분에 연봉 빵빵한 대기업에 다니는 명문대 졸업생이 될 수 있었지만,

이건 누구나 선망하는 삶이 분명하지만

 

과연 ‘나’는 누구지?

 

허망한 의문이 들었다.

 

나를 움직이고 있는 건 쪽지였다.

그게 말하는대로 움직이고, 사랑하고, 선택한다.

 

점점 삶의 주도권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쪽지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 실력으로 이룬 것 하나 없었다. 고등학교때부터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으니, 명문대 수석 졸업이라는 타이틀도 모두 헛것이었다. 쪽지가 없다면 나는 바보 천치였다.

 

나는 어느새 이십대 후반에 들어서있었다.

 

‘지금 J한테 전화해.’

 

J는 내가 한창 열을 올리며 만나고 있는 여자였다.

 

아니, 쪽지가 한창 열을 올리고 있는 대상이었다.

 

어느날부턴가 쪽지가 지시하는 대로 따라가면 J가 눈에 보였고, 자꾸 마주치다보니 아는 사이가 됐고, 그러다가 자연스레 깊은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가 가까워지게 된 계기도 참 우스웠다.

 

‘우산을 가지고 가라’는 쪽지를 읽고, 나는 멍한 우산을 챙겨서

‘1호선으로 갈아타’라는 쪽지를 읽고, 나는 멍하니 환승을 했다.

 

지하철 역 밖으로 나왔을 때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고,

마침 J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빠 지금 ㅇㅇ역이죠?]

 

나는 깜작 놀라서 두리번거렸다. 내 바로 뒤에 J가 서있었다. 엷은 하늘색 청자켓과 하늘거리는 스커트에 빗자국이 있는 걸 보니 비를 피하러 역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우리는 한 우산을 쓰고 그녀의 학교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시간은 10분이었지만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은 꽤 많았다. 좋은 집안에서 자란 티가 나는 예쁘장한 여자애치곤 무척 털털했다. 게다가 나처럼 게임을 좋아했다. 우리는 금세 친해지게 되었고, 그러다가 누가 먼저 고백하는 것도 없이 사귀게 되었다.

 

물론 J는 좋은 연인이었다.

여자로서 매력적인데다가 성격도 쾌활하고 나하고 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천생연분이 바로 이런거구가 싶을 정도로. 주변에서도 너희 잘 어울린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다. 그런데도 가슴이 묵직하다.

 

‘J한테 전화해’

 

내가 멍하니 앉아았으니 쪽지가 나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여러개의 쪽지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전화해’

 

‘전화해.’

 

‘전화해!’

 

'전화해!!!!!!!!’

 

똑같은 말이 적힌 쪽지 수십개를 방 여기저기에 붙여대던 수호령이 갑자기 행동을 멈췄다.

오늘은 그의 장단에 맞춰줄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팔짱을 끼고 가만히 허공을 노려봤다. 내 눈에 보이는 건 쪽지밖에 없지만, 그가 지금 이 자리에 있으니까 저렇게 떠들어대는 거겠지.

 

한참이 지나고, 순식간에 모든 쪽지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깨끗해진 책상 위에 쪽지 하나가 나타났다.

 

‘지금 날 무시하는 거야?’

 

오싹....

 

아무것도 없는 방에 덩그러니 나타난 쪽지.

그게 새삼 나를 두렵게 했다.

벌써 1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이 기괴한 현상을,

정말 수호령의 흔적이라 할 수 있을까.

 

‘날 무시했다간 후회하게 될 거야’

 

‘전화해’

 

다시 평정을 되찾은 쪽지가 동시에 두 개나 나타났다.

나는 핸드폰을 찾아 주머니를 더듬거렸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만 좀 해!”

 

곧 J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언제 만나? J의 애교섞인 목소리가 들려서 나도 모르게 하하 웃어버렸다. 그 순간 내 무릎 위에 쪽지가 나타났다.

 

‘내일 저녁 6시, 카페 앞에서’

 

입가의 웃음이 싹 사라진다.

 

내 인생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살고 있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내가 정말 J를 좋아하고는 있는 걸까? J를 좋아하고 원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는 정말 내 수호령일까?

너는 무엇일까? 도대체....네 쪽지들은 나를 위한 거니, 네 만족을 위한 거니?

나는 허공을 응시했다.

하지만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빠, 사랑해]

 

J가 애교섞인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했다.

그 순간 새로운 쪽지가 방 안 가득 도배된다. 내용은 모두 똑같았다.

 

‘킥킥킥킥킥킥킥킥킥’

 

‘킥킥킥킥킥킥킥킥킥’

 

'귀여워‘

 

‘귀여워’

 

‘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

 

‘그게’ 웃고 있었다.

행복하다는 듯이.

나는 이제 느낄 수 없게 돼버린 행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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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은 저한테 무리였던 걸까요 ㅠㅠ

 단편으로 머리 좀 식혀봅니다...

 으흡흡... 좋은 연휴 보내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