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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떠오른 이름을 중얼거렸다.
"..........세준씨......"
그는 나에게 있어 늘 문제적 존재였다.
같은 대학에 다니는 학생으로 만나, 단지 얼굴만 알고 지내는 사이일때부터 그의 집착이 시작됐던 것 같다.
그는 스토커라고 봐도 무방할만큼 나에게 집착을 했고,
그 정성을 봐서라도 한번 만나주라는 주변의 이야기에 혹해서 넘어갔던 게 실수였다.
자기 약점을 숨기기에 급급한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게 처음부터 그 집착을 숨길 생각같은 건 하지 않았다.
막 시작한 연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집요한 사랑은 나를 한때나마 들뜨게 했고
점점 심해지는 집착 또한 정말 날 많이 좋아하나보다 정도로 넘기고 말았다.
그와의 연애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쩌다가 연락이 안될때면 내가 갈만한 곳은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니는 건 예사였고,
당시 서울에서 통학하기 위해 살고 있던 자취방은 물론 차를 타고 두시간 거리에 있던 부모님 집에까지 찾아가
망신을 주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심지어 내가 사용한 물건들을 전리품처럼 자기 방에 모으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더이상 이 비정상적인 관계를 이어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 관계를 완전히 끊기 위해서 세준의 부모에게까지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받았다.
헤어지자는 말을 듣지도, 용납하지도 않아서 무작정 연락을 끊고 자취방을 옮겨봐도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처럼 나타나 나를 기다리는 사람을 내 힘으로 끊어내기란 불가능했으니까.
그때를 생각하자 등골이 싸늘해진다.
그 무서운 집착이 다시 시작되는 걸까.
이 익명의 기묘한 편지를 보낸 사람이 만약 세준이라면 편지 내용도 딱 들어맞았다.
왜 모른척 하냐는 둥, 너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둥 하는 내용은 세준같은 사람이 아니면 보낼 수 없는 내용이었으니까.
어딜 가면 세준을 만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고 안내하는대로 길을 따라 운전했다.
내가 사는 곳에서 삼십분거리에서 지내고 있었다.
차를 주차시키고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그를 독하게 떼어낸 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만남이 유쾌할리도, 쉬울리도 없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나쁘게 헤어진 케이스였으니까.
낮에도 한산한 순간이 없는 서울의 한 대학병원.
세준이 있는 곳이었다.
차에서 내리며 건물을 잠시 올려다보며 그가 어디쯤에 있을지 눈으로 가늠해보았다.
똑같이 구멍을 내고 유리창을 끼워넣은 창문들이 수십, 수백개가 눈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두리번거리며 세준이 있는 곳을 찾아 헤맸지만
"박세준씨 찾아 왔는데요."
간호사실에 물어보는 걸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또각또각.
구두굽이 조용한 병원 복도에 울려 퍼졌다.
새삼 세준이란 남자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쩌다가 스토커라는 바보같은 취미가 생겼는지 애석할 따름이다.
그는 일평생을 단 한번도 부모 곁에서 떠나본 적 없는 온실 속의 화초같은 남자가 어쩌다가 그렇게 변했을까.
전형적인 모범생.
사춘기때에도 사고 한번 치지 않고 곱게 자라나 명문대에 들어간 것까지는 아들로서 완벽했을 거다.
그런 자랑스러운 아들이 한 여자에게 무섭도록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는 순간 무너져내리던 세준 부모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순박해보이는 인상의 그들에게 아들의 집착을 털어놓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지만
때로는 내키지 않는 일도 참고 해내야되는 순간이 온다는 걸,
누구나 한번쯤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고
나는 그 사실을 조금 일찍 깨달았을 뿐이다.
똑똑.
노크를 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삐걱대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문을 열고 들어가니 눅눅한 습기가 느껴졌다.
증기기관차의 그것처럼 희뿌연 습기를 뿜어대고 있는 가습기 때문이었다.
반쯤 쳐진 커튼을 젖히고 그 안에 누워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박세준.
남성.
31세.
휘갈겨쓴 검은 글자들이 누워있는 환자가 내가 찾던 사람이 맞다고 확인시켜주었다.
쌔액......쌔액........쌔액.......
숨을 내쉬는 것이 버거운지 세준은 쇳소리를 내며 뒤척이다가 잠결에도 낯선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그리고 앞에 서있는 나를 보더니 눈을 크게 홉떴다.
"......ㄴ.....ㅓ.........."
나는 무심한 눈으로 그의 가슴에 비죽 튀어나온 관을 바라보았다.
삑삑삑삑.
심장과 연결된 기계에서 그의 박동이 높아지고 있음을 알리기 시작했다.
"흥분하지마. 할 말이 있어서 온거니까."
"너.....때문.........."
갈고리같은 손가락들이 내 옷을 움켜쥐려고 발버둥쳤지만 한걸음 뒤로 물러나는 걸로 그의 사정거리에서 간단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아까보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서서 세준을 똑바로 쳐다봤다.
"보낸 편지 봤어. 누굴 시킨거야? 어머니? 아니면 아버지?
쓸데없는 짓 하지마. 세준씨는 이렇게 조용히 살다가 가면 되는 거야.
세준씨가 이렇게 된 건 스스로 자초한 거야. 먼저 제안한 거잖아. 나한테 했던 말 벌써 잊었어?
아님, 생각해보니까 아까워진 거야? 그때는 간이든 쓸개든 다 내줄 것처럼 굴더니....."
병실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는 일조차 버거워보이는 세준의 얼굴은 퉁퉁 부어있었다.
새삼 수술한 부위가 욱씬거리기 시작했다. 이젠 아플리 없는데도.
통증의 원인은 저 사람을 본 것 때문이겠지. 남 일 같지 않아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라고 아픈 사람 찾아와 이런 말까지 하긴 싫었어. 그러니까 사람 놀래키는 것도 정도껏 해.
세준씨, 설마 나 원망하는 거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가로 젓지도 않고 입도 벙긋하지 않은 채로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알고 있다, 그가 바란 게 이거라는 걸. 편지를 보내 나를 자극하고 내가 달려와 얼굴을 보여주길 바라는 거겠지.
예전에 '네가 이식 대기자 명단에 올라가 있는 걸 안다'고 말해서 내 관심을 끌었을 때처럼, 지금도 만족하고 있을까?
"당신이 원하는대로 사귀어줬고, 당신이 준다고 해서 받은 것 뿐이야.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쓸데없는 짓 하지마.
부모님까지 수술대 위에 올라가는 꼴 보고 싶진 않겠지."
그가 보낸 편지들,
그의 부모나 아는 사람이 대필했을 그 편지 내용이 세준의 얼굴 위로 겹쳐보였다.
이런 나를 보며, 이런 상황에까지 와서도 아직도 사랑한다고 매달리고 싶은건지 궁금증이 잠시 피어올랐지만
할 말을 모두 마친 나는 자리를 떠났다. 그의 부모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상황이 곤란해질 테니까.
삐비비비빅.....!!
급박하게 올라가는 혈압수치가 기계에 경고음을 울리게 했고, 소리는 복도에까지 울려퍼졌다.
달려가는 간호사를 뒤로하고 태연하게 비상구 문을 열고 나가 계단을 내려갔다.
왜 나를 모르는 척해,
왜 날 모르니?
왜 넌 너밖에 모르니?
병실을 빠져 나온지 오래지만
세준의 목소리가 아직까지 귀에 윙윙 울려댔다.
문득 그가 고백했던 밤에 나눴던 대화도 떠올랐다.
'걱정하지마. 내가 다 줄 테니까. 너한테 필요한 건 다 줄게. 너는 나를 바라봐주기만 하면 돼.
내가 누군지 알아주기만 하면 돼.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걸.....내가 박세준이라는 걸.'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자기암시를 하듯 중얼댔다.
나는 나쁘지 않아.
때로는 내키지 않는 일도 참고 해내야되는 순간이 온다는 걸,
남들보다 조금 일찍 깨달았을 뿐이니까.
그래, 나쁜건 박세준의 집착
그 집요한 마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