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학계입장은 삼별초의 난을 외세에 대항한 장렬한 항쟁으로 묘사하고 저도 그렇게 배웠습니다만, <div>삼별초가 어떻게 태어났고, 그 삼별초의 아버지인 무신정권이 어떻게 백성들을 버렸는지를 본다면</div> <div>과연 삼별초의 저항이 외세에 저항한 민족적 항쟁인지는 매우 의문이 듭니다 ( 명분으로나 실익으로나 )</div> <div><br></div> <div><div style="text-align:left;"><im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602/1455280648lDiQEztSV4m7.jpg" width="485" height="272" alt="SOC-09-34_s03.jpg" style="border:none;"></div><br></div> <div><br></div> <div>고려가 팍스 몽골리아에 가장 오래 저항하여서 다른 번국보다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는 점은 인정할수 있으나 ( 그조차도 무신정권이 잘 싸워서 그런게 아니라 백성들이 수없이 죽어나가면서 그냥 버틴거죠 ), <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그에 앞서 몽골을 막는게 가능할수도 있을만큼 강력했던 고려의 군사력(거란의 공세를 꺽고 동북9성을 개척했던)을 무너뜨린 무신정권의 사병이었으며 실제로 몽골에 대항한 전투보다는 농민봉기진압이 주 임무였던 사병집단의 반란이 민족적 항쟁으로 묘사될수 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span></div> <div><br></div> <div><a target="_blank" href="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7010541125980.pdf" target="_blank" style="color:#0000ff;text-decoration:none;font-family:gulim, Dotum, Helvetica, AppleGothic, sans-serif;line-height:21.6px;">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7010541125980.pdf</a> <span style="font-family:gulim, Dotum, Helvetica, AppleGothic, sans-serif;line-height:21.6px;">고려시대 군사전략,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span></div> <div><div style="font-family:gulim, Dotum, Helvetica, AppleGothic, sans-serif;line-height:21.6px;">12세기 초반 고려의 군사제도나 군사력은 1170년 무신란이후 최대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div> <div style="font-family:gulim, Dotum, Helvetica, AppleGothic, sans-serif;line-height:21.6px;">고려 중기 이후로 군인전 軍人田의 침탈로 2군 6위의 경제 기반이 무너지면서 군사 제도는 와해될지경에 이르렀다. </div> <div style="font-family:gulim, Dotum, Helvetica, AppleGothic, sans-serif;line-height:21.6px;">그리고 무인 집권 시대에 극도로 비대해진 사병 私兵 집단은 고려의 국방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div> <div style="font-family:gulim, Dotum, Helvetica, AppleGothic, sans-serif;line-height:21.6px;"><br></div> <div style="font-family:gulim, Dotum, Helvetica, AppleGothic, sans-serif;line-height:21.6px;">항간에는 “<u>그 때에 용감한 자는 모두 최충헌 부자의 문객 門客 이 되었고 관군 官軍 은 모두 노약하고 지친 병졸이었다 </u>” 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이 점은 고려가 년간의 몽골 전쟁기간 중 중앙군을 조직해 몽골에 대항한 것이 1231년 제1차 전쟁 단한차례였다는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div></div> <div><br></div> <div><a target="_blank" href="http://www.jejusori.net/?mod=news&act=articleView&idxno=172935" target="_blank">http://www.jejusori.net/?mod=news&act=articleView&idxno=172935</a></div> <div>사실, <u>강화도 천도의 단행은 최씨무신정권이 국가의 안위를 걱정해 내린 결정이라기보다는 무신집정자 최우(崔瑀)가 자신의 정권을 보존ㆍ유지코자 행한 조처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다. </u></div> <div><br></div> <div>무신정권은 몽골과의 1차 전쟁에서 패배하자, 향후 대몽침략에 대한 적절한 대비책도 세우지 않은 채 강화도 천도를 단행했던 것이다. 육지에 남아 있던 백성들에게는 가까운 섬이나 깊은 산 속으로 도망하라는 입보책(入保策)만을 제시한 채, 자신들은 강화도에서도 여전히 사치행각을 계속했다.</div> <div><br></div> <div><a target="_blank" href="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nh&setId=34075&position=18" target="_blank">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nh&setId=34075&position=18</a></div> <div>삼별초는 최씨정권에 충성하는 군대로서 그들의 전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div> <div>특히 그 기간장교직은 심복들을 임명함으로써 완전히 장악하였고, 직접 명령을 받는 이들도 기간장교로서 중·하급의 무신이었다.</div> <div>그리고 삼별초는 독립적인 기구도 있었으며, 都領·指諭·校尉들이 통솔하였다. 대개의 경우 야별초의 직접 지휘는 야별초 지유가 맡고 있었다</div> <div><br></div> <div>최씨정권이 강화천도를 단행하고 그 저항세력을 위와 같이 섬멸하였던 당시에는, 몽고가 침략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서 광분하고 있을 때이다. </div> <div>이 같은 시기에, <u>최씨정권은 몽고병을 막고 무찌르기보다 오히려 민중의 봉기를 진압하는데 더욱 주력하였던 것 같이 보인다</u>. </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div><br></div></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