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요!
좋아하는 한 구절 놓고갑니다!
네까짓놈의 우둔한 대가리를 갖고서 말이지, ‘보이지도 않는 귀신 나부럭지니 우주 따위, 또는 그와 같은 기타의 것을 찾으려는 노력은 할 일이 아니다. 그러니 출발점으로서 너 자신을 재료로 택한 뒤, 너 자신 속에서 찾을 일이지, 네 놈의 속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그 자신의 것으로 하고 말하기를 나의 신, 나의 마음, 나의 생각, 나의 영혼, 나의 몸이라는 그것이 누구인가를 알아내는 일인 것이다. 슬픔이, 사랑이, 증오가 비롯되는 근원을 알작시라. 뜻이 없는데도 사람이 어떻게 깨어 있을 수 있는가, 뜻이 없는데도 어떻게 쉬며, 자기의 뜻과도 상관없이 성내게 되는 일이나 애착하게 되는 일은 도대체 어떻게 비롯되는지를 알아야 되는 것이다. 만약에 네가 이러한 것들을 주의 깊게 살핀다면, 너는 자신 속에서 그것들을 찾게 될 것이지.’ 나로서는 결코 너에게, 아집이나 오욕을 여의라거나, 해탈을 성취하라고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자네의 문제란 말이지. 나로서는 차라리, 자네로 하여금, 어떤 교리, 교의, 또는 어떤 자들이 먹다 남긴 사상의 찌꺼기 같은 것에 집착하는 것 여의기를, 아집이나 오욕 여의기를 치열히 하는 어떤 자들보다 더 치열히 하라고나 하고 싶은 게야. 글쎄 마음이 좁은 자는 자기 곁을 스쳐지나는 것을 언제나 자기와 다른 것으로 보며, 마음을 더욱더 오그려싸아, 더욱더 좁은 것으로 만들려 한다. 그래서 그 사내가 죽었을 때, 이 사내는 대체 무엇을 그렇게 간직했는가, 그 속을 열어보면, 똥창자며, 썩어 문드러진 동정(童貞) 같은 것들이다. 허기는 오그려싸기를 극도로 성취해버리고 난 자의 뒷얘기는 달리 말해져도 좋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마음이 넓은 자는, 말 타고 강산을 지나더라도, 그 스치는 모든 풍경이 자기의 밖의 다른 것이라고는 보지를 않는다. 그러고 보면, 오그려싸안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넓은 마음이란, ‘한도 없는 것이고, 둥글거나 네모진 것도 아니며, 크거나 작은 것도, 푸르거나 누렇거나, 붉거나 흰 것도 아니며, 긴 것도 짧은 것도, 성냄도 기쁨도, 옳음도 그름도, 선함도 악함도, 처음도 끝도 없는 것이다.’ 글쎄 그렇다고 보면, 저 큰마음이란, 팔만색상에 채워진 공(空)이며, 공이지만 그저 헛간 같은 공은 아닌 것이다. 그것 속에는 만신(萬神)이 살며 전을 벌여도, 그것 자체에게 이단이라거나 개종의 이름을 붙일 수 가 없는 것이지. 작은 마음을 크게 한다는 일이란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니 그저, 붙매이지 않고, 자꾸 변절하고, 자꾸 받아들이고, 자꾸 떠나는 일밖엔 없다구. 글쎄, 한 질료가 금이 되기까지는, 열두 번이나 일곱 번의 죽음, 뭉뚱그려 적어도 세 번의 죽음을 완전히 치르지 않고는 안 되거든. 변절 말이다. 개종(改宗) 말야. 헌데 내 눈에 보이는 자네라는 녀석은, 체(體)나 용(用) 사이에 어떤 부조화를 갖고 있는 듯하다구. 용에 비해 체가 너무 크거나, 체에 비해 용이 너무 크다구. 용에 비해 체가 너무 큰 경우, 거기엔, 아직 잠 못 깨고 죽음처럼 뻗치고 누운 황폐가 따라있고, 체에 비해 용이 큰 경우, 거기엔 일종의 삼재팔난이라고나 해야 할 무질서가 덮여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 체를 택한다면, 그 용적을 넓히거나 좁힐 수밖에 없는 것이고, 용을 택한다면 수근(水根)을 끊고, 더 깊이 파고드는 수뿐이다. 그것은 자네에게 고통으로 던져진 것이야. 이보라구, 자네는 헌데 어째서 그따위로, 흐리멍덩한 눈으로 날 보고만 있는 거지? 잠이 여태도 깨인 게 아니라면 죽장 서른 대로 하여, 너의 그 쓸모없는 대가리에 구멍을 뚫을 터인데, 그것은 불순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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