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도덕적 실패에 대한 심리적 대처 방식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인지부조화를 경험하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심리적 방어기제를 동원한다.
세속적 윤리 체계에서는 이러한 갈등이 상대적으로 건설적인 방향으로 해소될 가능성이 높다. 명확한 도덕적 기준이 존재할 때, 자기기만적 합리화는 한계에 부딪히게 되고, 결국 실질적인 행동 변화나 피해자에 대한 직접적 배상을 통해서만 진정한 심리적 평형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종교적 용서 체계는 구조적으로 다른 경로를 제공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이라는 절대적 권위에게 용서를 구하는 행위가 피해자와의 직접적 화해를 우회할 수 있는 '도덕적 우회로'로 기능할 가능성이다. 니체가 지적했듯이, 이러한 체계는 개인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진정한 책임을 회피하게 만들 수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적 참회가 종종 실제 피해와 무관한 상징적 행위(기도, 고해성사 등)로 완결되면서, 구체적인 배상이나 행동 변화 없이도 심리적 부담을 덜어낸다는 점이다. 이는 도덕적 행위자로서의 성숙을 저해하고, 타인에 대한 실질적 책임감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위험성'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적 용서 구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많은 신자들은 실제로 도덕적 무책임의 늪에 빠져 있다.** 그들은 가해자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고통과 성찰의 과정을 신에게 떠넘기면서, 피해자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만의 심리적 안락함을 추구한다.
이들에게 종교는 도덕적 성장의 도구가 아니라 **책임 회피의 정교한 시스템**으로 전락했다. 마르크스가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 했다면, 이들에게 종교는 "가해자의 마취제"인 셈이다. 신의 무한한 자비라는 이름 하에, 그들은 얼마든지 타인을 해치고도 손쉽게 면죄부를 얻는다.
특히 문제적인 것은 이러한 패턴이 반복되면서 종교인들 사이에서 일종의 '도덕적 둔감화'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진정한 참회와 변화 대신 의례적 사죄에 익숙해진 그들은, 점점 더 큰 잘못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결국 종교적 용서 체계는 이들을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교묘하고 뻔뻔한 가해자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주로 범죄자들이 감옥에서 저런 짓거리 함. 몇번 정보공개 청구 저런 놈들거 받아봄. 그냥 신문 읽다가 예를 들어 어느 시군구에서 특정 복지 사업을 했다 하면 이거 궁금하네? 하고 정보공개 청구함. 정보공개를 한군데 청구 하는게 아니고 전국 시군구 지자체 220여개에 다 뿌림. 정보공개 청구 들어오면 별거 아니라도 공무원들은 자기 업무 중지하고 하루이상 소모하여 자료 찾고 만들어서 올림. 답변 들어오면 그 중에서 답변안한거, 늦은거, 맘에 안드는거 추림 다시 청구함. 특히 악질인 이유가 담당자가 시일 늦은거, 답변 안한것을 행정심판을 검. 정보공개청구법에 청구 받은 후 며칠이내...이걸 걸고 넘어지는 것임. 물론 결과적으로 담당자 피해없이 처리 되지만 이 역시 그리고 정보공개 청구 못한 담당자는 그거 답변서 쓰고, 행정심판 담당부서는 심판위원회 열어야함. 그거 회신 보내주면 그걸로 끝이 아님. 불복하고 행정소송 청구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행정이 지독히 멍청한게 법에 있는 내용은 무조건 지켜야 해서 이걸 또 받아서 소송 처리함... 이 짓거리를 감옥에 있는 범죄자들이 심심하면 함 몇번 당해봤음. 이 진상들은 이게 직업이고 취미임
몽골 초원과 같은 환경에서는 원거리 시력이 생존에 직결되는 중요한 능력이었습니다. 적이나 맹수를 멀리서 먼저 발견하고, 가축의 상태를 파악하며, 길을 찾는 모든 일상이 시력에 의존했죠. 이런 환경에서는 시력이 뛰어난 개체가 생존과 번식에서 유리했을 것이고, 수천 년에 걸쳐 자연선택을 통해 좋은 시력을 가진 유전자가 집단에 누적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선택 압력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아무리 시력이 나빠 두꺼운 안경을 써도, 의사나 검사 같은 '좋은 직업'만 가지면 최고의 배우자감으로 대우받죠.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이 개인의 '유전적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버린 겁니다. 오히려 책상 앞에 앉아 근거리 작업에만 몰두하며 시력을 망가뜨린 사람들이 더 높은 사회적 성공을 거두고, 그 결과 번식에서도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됩니다. 결국 현대 사회에서는 신체적 건강함보다는 사회적 성취가 유전자 전달의 핵심 요소가 되면서, 근시 유전자가 지속적으로 확산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