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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7 22: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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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1시, 나리는 책상 앞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국어 수행평가가 문제였다. 독후감을 쓰는건 끔찍하게 싫었기에(2장을 꽉 채워야 해서 더 싫었다.) 국가에서 주최하는 대한민국 청소년 글쓰기 대회에 참가하면 A를 주겠다는 선생님의 말에 낚인게 문제였다. 분량 제한도 없어서 대충 끄적여서 낼 생각이었는데… 글을 쓰는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아버지가 소설가인건 상관 없었다. 아니, 상관이 있을지도. 아니, 확실히 상관이 있다. 반 강요로 관심 없는 지루한 책들을 잔뜩 읽어야 했으니까. 아버지의 노력에 힘입어 딸은 책을 싫어하는 학생으로 자랐다. 요즘같은 디지털 시대에 누가 무겁고 먼지나는 종이뭉치를 쳐다볼까? 하지만 이런 아버지의 노력이 완전히 소용 없던건 아니라서, 쓸데없이 글을 보는 눈만 높아졌다. 덕분에 지금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뭔가 써보긴 했지만 이렇게 유치하고 부끄러운 글을 남들에게 보일 바에야 차라리 혀를 깨물고 싶어져서 다 지워버렸다.
나리는 한참동안 모니터의 텅 빈 워드 화면을 노려보다가 인터넷을 켰다. 친구들, 연예인들의 새 소식. 와! 요즘 연예계 뉴스 대박. 친구가 올린 유머글을 보고 깔깔. 앗, 얘 또 염색했네? 오, 이 식당 맛있겠다. 이번 주말에 애들이랑 대학가에 가서… 하 젠장. 시계를 보니 1시 26분이다.
이제 싫어도 인정할 때이었다. 고요한 밤의 여신이 투명하지만 나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가슴을 쿡쿡 찔러댔다. 끝났다! 망했다! 내일 아침이 마감이지만 아무것도 못 쓰겠고, 피곤해서 머리도 안돌아가고, 수행평가는 망할 것이고, 학교생활도, 인생도 끝장날 것이다. 죽자! 책상 바닥에 이마를 부딪혔다. 쾅. 쾅. (실제로는 아프지 않게 콩. 콩.) 나는 똥멍청이야. 그냥 얌전히 독후감이나 쓰는 거였는데. 이제와서 어떻게 쓰라는거야. 차라리 아버지에게 대신… 앗.
아버지에게 도움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은 나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이 새벽에 깊이 아버지를 깨워서 글을 써달라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서재는 도와줄 수 있다. 조용한 서재의 책장 한켠에 따로 모아둔 아버지의 원고들이 있는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애매하다고 여겨서, 발표하지 않고 숨겨 놓은 단편들. 어차피 아버지가 부족하다고 여긴 작품들이니까 상을 타지는 않을 것이고, 나는 수행평가를 무사히 넘길 수 있다. 완벽한 생각 같았다. 나리는 더이상 고민하지 않고 원고 중에서 괜찮은걸 골라 베꼈다. 지갑을 훔치는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지만 잠깐이었다.
그렇게 수행평가는 무사히 넘겼다. 나리는 그 일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한 달 후 수업시간.
“2학년 3반 최나리 학생은 지금 당장 교무실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교장선생님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