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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차단 상태
    밥우유다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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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sisa_814470
    작성자 : 밥우유다
    추천 : 1
    조회수 : 3578
    IP : 211.217.***.28
    댓글 : 1개
    등록시간 : 2016/12/10 17:55:18
    http://todayhumor.com/?sisa_814470 모바일
    (펌 글) - 박근혜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초스압)
    <div> </div> <div>내용이 너무 좋습니다</div> <div> </div> <div><a target="_blank" href="http://issuein.com/index.php?mid=index&page=10&document_srl=5332855" target="_blank">http://issuein.com/index.php?mid=index&page=10&document_srl=5332855</a></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박근혜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br>장기 지속(longue durée), 권위와 복종 ... 그리고 도착(perversion)적 나르시시즘(Narcissism) ]<br><br><br>시민, 정치인, 정치평론가, 교수, 법조인, 학생, 종교인 등 ... 현 시국에 대한 각계각층의<br>법적, 정치적 해법들과 다양한 의견들이 매일같이 (저녁)뉴스를 통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br>더불어 각 정당들은 여론의 분위기를 살피면서도 각자 어떤 스탠스를 취하는 것이 당에 가장 <br>유리한지를 가늠해 보기도 하고, 법조계(특검, 검찰), 재계, 그리고 이번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된 <br>수많은 개인들도 각자의 가늠자로 나름의 대응방안을 마련하는 모습입니다. ... 여기에 언론은 <br>자기역할(언론의 역할)에서 굉장히 잘하고 있거나, 일부에서 매우 수준 낮은 모습을 보여주는<br>중앙값이 없어진 두 개의 극단의 양상만이 보여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br><br>그래서 저는 현재 (이미)쏟아져 나오고 있는 수많은 팩트와 의견들 말고, 조금은 다른 <br>인문학적 시선에서 이번 국정농단 사태를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많은 자료를 참고로 저만의 주관적 견해가 <br>상당부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냥 편하게 보시면서 다른 생각하나 느껴보셨으면 좋겠습니다.<br><br>[◆ 도움 받은 자료들]<br>@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페르낭 브로델/ 갈라파고스 )<br>@ ( 서양 윤리학사/ 로버트 L. 애링턴/ 서광사 )<br>@ ( 유동하는 공포/ 지그문트 바우만/ 산책자 )<br>@ ( 권위에 대한 복종/ 스탠리 밀그램/ 에코리브르 )<br>@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한나 아렌트/ 한길사 )<br>@ ( 데미안/ 헤르만 헤세/ 민음사 ) <br>@ ( 감각의 제국 - 라캉으로 영화읽기/ 권택영/ 민음사 )<br>@ ( 샤먼 THE SHAMAN. / 피어스 비텝스키 (Piers Vitebsky) / 창해 )<br>@ ( 잔혹, 피와 광기의 세계사 / 콜린 윌슨/ 하서 ) <br>@ ( 영화 내부자들 )<br><br><br>대통령(President) 이라는 국가 최고 권력자의 이야기입니다.<br>그러나 저는 권력(Power)이 아닌, “권위(Authority)”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br>도착(perversion)에 대한 이야기와 전복(顚覆)된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할 것입니다. ... 여기에 <br>사람들에게 새로운 역사인식을 선사했던 프랑스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의 <br>장기지속의 관점도 얘기해 볼 것입니다. <br><br>마키아벨리는 “지도자는 비난 받더라도 무시당해서는 안 된다.” 는 말을 했습니다. <br>권력이 어떤 형태(왕정, 귀족정, 민주공화정 등)로 존재하든지간에 비난 대신 무시를 받는다는 것은 <br>아마도 “권위”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권위” 뒤에는 복수적 형태로 항상<br>“복종(obedience)”이 수반되며, 이 둘은 “명령”에 의해 비로소 생명력을 얻습니다. <br><br>이야기는 장기지속의 관점을 소개하는 것부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 이어서 <br>권위와 복종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쉴 틈 없이 도착(뒤바뀜)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질 텐데, <br>도착(perversion)의 관점에서는 ‘오시마 나기사’ 라는 일본감독이 1976년에 만든<br>“감각의 제국(In the Realm of the Senses)” 이라는 영화를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고 와서 <br>저의 멋대로의 생각을 풀어볼 예정입니다. 마무리는 딱히 정해진 계획은 없으나 ~ 아무튼 <br>잘 마무리 될 거라 기대하고 지금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해 봅니다. <br><br><br>40년의 우정(?) 이라고 합니다. <br>언론에서는 그들의 관계가 자그마치 40년의 관계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br>국가 최고 권력의 한복판에서 샤먼(shaman)이 거론되고, 영혼의 지배가 영혼처럼 거리를 <br>배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혼란이 가중되던 상황에서 문뜩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br><br>(일부)언론이 말하는 것처럼 실세는 대통령의 영혼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br>대통령만의 “시대(장기지속)”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를 말입니다. ... <br><br>‘시대’라니? ~ 그리고 ‘장기지속’은 도대체 또 무슨 소린가?<br><br>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해 보입니다. <br>대통령 스스로가 자리에서 물러나든, 의미 없는 꼬리를 자르든 ... 중요한건 <br>‘박근혜’라는 한 개인의 내면에 각인된 ‘최순실-박근혜’ 라는 관계는 영혼의 연결 관계를 넘어선 <br>하나의 “시대(장기지속)”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들의 세계는 계속해서 절대적으로 존속하게 <br>될 것이라고 점입니다. 왜냐하면 시대는 변해도 “시대” 자체는 결코 사라지는 속성이 <br>아니기 때문입니다. <br><br>그렇다면 언급된 “장기지속” 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br><br>인간의 삶의 방향은 보편적으로 낯설음에서 익숙함(친숙함)으로 진행됩니다. <br>낯선 음식도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접근하지만 이후에 접근 빈도에 따라 차차 익숙해지고, 또 <br>선호(불호)하는 음식이 되며, 최종적으로는 안전하게 믿고 먹을 수 있는 편안함으로 다가오게<br>되는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우리의 흔한 일상이라 할 수 있는 주거와 환경, 직업, 오락, 사무 등<br>생활 전반의 모든 행위들이 낯설음에서 익숙함으로 진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br>무엇보다 중요한 “타인과의 관계” 또한 우리는 낯선 관계에서 점차 익숙한 관계로 발전합니다. <br>물론 익숙하다고 해서 모든 관계가 긍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익숙함 속에는 <br>좋아함과 싫어함이 극명하게 나뉠 것이며, 딱히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모호함 또한 존재할 수도<br>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낯설지 않다” 는 부분입니다. ... 다시 말해, 타인과의 관계가 <br>모호함이나 분명한 호불호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관계는 “익숙함” 이라는 기본 틀 내에서<br>형성되면서 (타인과의)관계를 인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 저녁 식사 자리에 반찬으로 <br>오이무침과, 파김치, 멸치볶음, 가지무침, 장조림 등이 차려졌다면, 이 반찬들은 제가 오래전부터 <br>먹어왔던 익숙하고 친숙한 반찬들입니다. 다만 이러한 익숙한 반찬들 중에서 저에게 가지무침은 <br>아직까지 잘 손이 가질 않는 반찬입니다. 그렇다고 가지무침이 처음 보는 낯설고 안전이 두려운 <br>반찬은 아닌 것입니다. 호불호가 갈릴 뿐이지 이 반찬들은 오래전부터 접해왔던 “익숙한” 반찬들인 <br>것입니다.<br><br>따라서 낯설음에서 익숙함으로의 이동은 인간에게는 매우 자연적이며 진화론적인 현상입니다.<br>어쩌면 일종의 견고한 제도적 속성을 내포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인간의 역사가 <br>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성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br>우리가 역사의 “시간흐름”을 ‘과거-현재-미래’처럼 너무 단선적인 선형관계로만 파악하지 말자는 <br>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앞서 언급했듯이 프랑스의 대표적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은 <br>역사를 바라볼 때 “장기지속” 이라는 견고한 구조위에서 좀 더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관점으로 <br>역사를 바라보라고 얘기합니다.<br><br>한국이나 일본, 중국 등의 식(食)문화는 대부분 오래전부터 쌀(Rice)이 중심이 된 문화였습니다.<br>몇 해 전에 신문에서 중국이 본격적으로 소고기를 먹기 시작했다며, 향후 소고기 시장 변화에 대한 <br>기사를 내보내기도 했었지만, 여전히 한국, 일본, 중국에게 고기보다는 쌀이 중요한 식(食)의 <br>한 부분입니다. 특히 우리에게 있어서 쌀(Rice)이 주는 의미는 더욱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br><br>과거 쌀이 귀하던 시절에 국가 권력은 국민들에게 혼식(쌀에 보리 같은 잡곡을 섞어 먹음)을 <br>장려했으며, 막걸리 또한 쌀로 만들지 못하게 하여 밀로 만든 막걸리를 마셔야만 했습니다. 그런데<br>산업 발전, 교역의 증가, 국민의 소득수준 향상 등으로 인하여 세계의 다양한 먹거리가 국내에 <br>소개되었고, 해외여행의 경험을 통해서도 세계 여러 나라의 음식들을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br>이에 밥(쌀)이 중심이었던 우리의 식문화에도 상당한 변화의 바람이 불게 되었고, 그래서 이제는 <br>쌀과 고기는 물론이고, 피자, 파스타, 햄버거, 커피, 양고기 같은 다양한 먹거리와 식문화를 즐길 수 <br>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쌀은 여전히 민족 식문화의 내면에 아주 깊게 뿌리내려져 있다고 <br>할 수 있습니다. <br><br>우리가 피자나 파스타(Pasta)를 먹기 시작한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 또한 <br>뷔페나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서구식 외식문화의 트렌드는 산업화가 한창이던 1960~1970년대에는 <br>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던 문화였습니다. 더불어 최근 유행인 캠핑이나 와인을 즐기는 문화도 <br>마찬가지로 역사가 매우 짧다고 할 수 있습니다.<br><br>이에 반해 우유와 빵, 라면 같은 식문화는 밥에 비하면 덜 하지만, 그래도 한국사회에서 <br>나름대로의 역사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아무리 다양한 식문화라도 한국사회에서는 <br>여전히 밥(쌀) 만큼 오래된 식문화를 찾기는 힘들 겁니다. <br><br>결론적으로 누군가(외국인이) 만약 한국사회 식(食)문화의 진면목을 알고 싶다면, 우선적으로 <br>쌀(Rice)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는 것부터 출발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br>이렇듯 한국 이라는 나라의 식문화는 먼저 가장 깊은 저변에 (너무나 당연해서)거의 인지하기 힘든<br>“밥(쌀)” 이라는 상당히 오래되고(장기적 시간대) 거대한 역사의 큰 흐름이 있으며, 그 위로 <br>우유와 빵, 라면 같은 중기적 시간대의 식문화(역사)가 흐르며, 제일 상단부에는 피자와 파스타,<br>와인 같은 최신의 짧은 역사의(단기적 시간대) 흐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식문화는 <br>앞서 언급했듯이 “과거-현재-미래”라는 단선적 선형 흐름이 아닌, 겹겹이 쌓인 다층적 구조로<br>식문화의 역사가 함께(동시에)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바로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이 <br>주장했던 다층적 역사관인 것입니다. 그리고 저변에 자리한 “밥(쌀)”의 흐름을 페르낭 브로델은<br>“장기지속(longue durée)”의 흐름(역사) 이라고 부른 것입니다.<br><br>페르낭 브로델에 따르면, 장기지속의 흐름은(역사는) 그 문화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해서 <br>거의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구조화된, 혹은 단단한 뼈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br>개인의 삶이나 어느 한 사회의 문화 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과거로부터 거의 변화하지 않고 현재까지<br>매우 천천히 흘러온 단단한 뼈대 같은 구조(장기지속)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br><br>“저녁에 밥이나 같이 할까?”<br>“동기들하고 밥 먹기로 했는데요? ~ ” <br><br>브로델의 장기 지속적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사회에서 “밥”이 주는 의미는 <br>단순한 식물 알갱이인 “쌀(Rice)”을 넘어서 한 끼의 식사(아침.점심.저녁)와 같은 의미라고 <br>할 수 있습니다. ... 이 뿐만이 아니라 냉면, 불고기, 스테이크, 피자, 만둣국 등 저녁 메뉴가 무엇이<br>됐든지 간에 배를 든든히 채우는 일은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밥을 먹었다”는 표현 하나면 충분합니다. <br><br>이처럼 한국사회에서 “밥(쌀)”은 그 대표성이나 범주성에 있어서 거의 모든 식(食)을 <br>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가장 유서 깊은 식문화의 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br>페르낭 브로델식으로 표현 한다면 한국사회에서 “밥”은 바로 “식문화의 장기지속(longue durée)”<br>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br><br>더불어 쌀의 “귀함”은 단순히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식(食)”의 의미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br>과거에는 쌀이 화폐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으며, 조공 품목으로서 중요한 외교적 수단으로 <br>사용되기도 했었습니다. 이렇게 쌀의 식(食)을 넘어서는 “귀함”은 벼를 재배할 수 있는<br>토지의 귀함으로 이어졌으며,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은 이제 더 이상 노동(농사)을 하지 않고<br>땅을 빌려주기만 하여도 쌀을 수확할 수 있게 됩니다. ... 그리고 이러한 모습들은 한국사회에서<br>일종의 토지 신화를 만들어냈고,(@ 쌀이 귀했던 일본도 마찬가지 였음), 이것이 현대에 와서는 <br>부동산 집착으로 이어지며 조물주보다 위대하다는 “건물주”라는 현상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br>여기에 심지어 가족을 얘기할 때도 우리는 “식구(食口)” 라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br>직역하면 그냥 “먹는 입” 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너희 식구는 몇 명이냐?” 같은 표현이 <br>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또한 기름밥(자동차 정비), 은행밥,증권밥.보험밥(금융업), 대패밥(목수), <br>운전밥 등 ... 특정 직업을 얘기할 때도 “밥”이라는 표현은 자연스럽게 쓰입니다. <br><br>언뜻 보기에 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쌀”과 “건물주” 그리고 식구(食口)와 “@@밥” 같은 다양한 <br>표현들은 이렇게 우리의 “밥”이라는 장기 지속적 틀의 구조위에서 생성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br>한국사회는 밥(쌀)에서 파생된 식(食) 문화의 스펙트럼(Spectrum)이 이처럼 대단히 넓다고 할 수 있는<br>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한 사회에서 오랜 시간동안 세대를 뛰어넘어 장기 지속되는 것들을 살펴보게 <br>된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지금까지 어떠한 변화들(생성,소멸)이 있어왔는지 새로운 시선을 얻을 수 <br>있게 될 것입니다. <br><br>한국의 주거 문화에서도 우리는 또 하나의 장기 지속적 관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br>바로 온돌 같은 바닥 난방 문화입니다. ... 일부 지역에서 한옥을 관광 상품화 한 것을 제외하면 <br>현재 우리 주변에서 한옥을 보기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바닥 난방시스템은 여전히<br>쌀 문화와 함께 수백 년의 시간대를 살아남은 한국만의 장기지속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br><br>장기 지속적 바닥 난방 문화는 현대에 와서는 일반 단독주택은 물론이고, 서구 문화의 대표적<br>산물이라 할 수 있는 아파트에서도 우리는 대부분 바닥 난방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br>바닥 난방 생활은 실내에서 자연스럽게 신발을 벗게 만들었고, 그에 따라 바닥 청소가 중요해 졌는데,<br>이 결과 물걸레 청소기, 신발장 살균제품, 전기(온돌)장판 등 외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br>다양한 상품들이 개발되는데 바닥 난방 문화가 저변에서 보이지 않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br>여기에 기숙사, 어린이집, 펜션, 찜질방 등 ~ 바닥 난방 문화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다양한 갈래로 <br>한국 국민들 삶 전반으로 깊숙이 뻗어나가 밥(쌀)과 함께 (한국)경제의 한 축에서 지금까지 <br>보이지 않게(저변에서 단단하게) 견고하게 흐르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br><br>그렇다면 이쯤에서 페르낭 브로델의 말을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br><br>[◆ 구조라고 하면, 사회 현상을 관찰하는 사람들은 <br>사회적 실재와 여러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 형성된 무언가의<br>조직이나 체계 혹은 상당히 견고하게 굳어진 일련의 관계라고 <br>생각합니다. 우리 역사가들이 보기에도 구조란 무언가의 결합이고 <br>건축물과 같은 모습이겠지만, 그보다는 시간이 흘러도 쉽게 <br>마모되지 않고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는 무언가의 실재를 뜻합니다. <br>그와 같은 구조들 중에는 오랜 시간 존속해서 세대가 수도 없이 <br>바뀌어도 변함없이 유지되는 구조가 있습니다. 그러한 구조들은 <br>역사에 멍에를 씌웁니다. 역사의 흐름을 옥죄고 흘러갈 방향을 <br>결정하지요. 그러한 구조들보다 쉽게 사라지는 구조들도 있습니다. <br>어쨌거나 그러한 구조는 모두가 디딤돌로 작용하기도 하고, <br>장애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장애물로 작용할 때는 인간으로써 <br>애써 봐도 좀처럼 넘어설 수 없는 한계와도 같습니다. 수학적으로 <br>말하면 일정한 조건의 무수한 선분들을 외곽에서 바싹 감싸는 <br>포락선(envelope) 같은 것입니다. 지형적으로 결정된 틀이라든가 <br>여러 가지 생물학적 조건, 혹은 생산성의 한계를 넘어서기가 얼마나 <br>어려울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런저런 정신적인 한계도<br>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심성의 틀 역시 장기 지속하는 감옥입니다.<br>(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152페이지 / 페르낭 브로델/ 갈라파고스)]<br><br>페르낭 브로델의 얘기를 들어보면, <br>장기 지속의 흐름은 우리에게 디딤돌이나 장애물로도 작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br>저는 앞서 밥(쌀)과 바닥 난방의 예를 들었지만, 우리에게 이러한 한국적 장기 지속의 흐름은 <br>그 구조가 깨지기 전까지는 우리국민들은 “밥과 바닥 난방” 이라는 그 장기 지속의 힘에 <br>어쩔 수 없이 구속(제약)되어 살 수밖에 없습니다. ... 다시 말해, 한국 국민들은 밥과 바닥 난방에 <br>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의 국민들 이라는 것입니다. ... 그런데 만약 이러한 한국만의 <br>장기 지속이 도전을 받는다면(구조가 깨진다면), 즉 ~ 식문화가 밥이 아닌 고기나 빵으로,<br>또 주거문화가 바닥 난방이 아닌 벽난로나 히터로 바뀌어 버린다면, 아마도 한국사회에 엄청난 <br>변화가 불어 닥칠 것입니다. ~ 수백.수천년을 이어온 뼈대(구조)가 바뀌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br>그래서 브로델의 장기 지속적 관점을 빌려와 생각해 본다면,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삶이 전적으로<br>각자의 개인의 자유의지대로 선택하고 살아온 삶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세대를 뛰어넘는 <br>삶의 가장 깊숙한 저변의 구조화된(장기지속) 흐름 속에서 우리도 어쩌면 전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br>상당한 선택의 제약을 받고 살아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br><br>정리해보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오랜 시간동안 단단한 뼈대처럼 구조화 되면서 흘러온 장기지속은 <br>그 사회의 문화와 사상의 틀이 결정되어지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며, 그 구조(장기지속) 위에서 <br>크고 작은 많은 변화가 생성되고 또 소멸되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장기지속(longue durée)” 이라는 <br>장기적 시간대는 새롭게 생성되는 수많은 단기적 시간대의 도전을 받으면서, 또 버텨내고 더 견고하게<br>구조화 되었던 것입니다. ... 다만 장기적 시간대가 무조건적으로 승리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br>쉽게 말해, <단기적 시간대 Vs 장기적 시간대> 라는 대립구도에서 만약 단기적 시간대가 <br>장기적 시간대를 누르고 승리하게 된다면, 그 지점에서 단기적 시간대는 새로운 장기지속을 위해 <br>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새로운 변곡점에서 우리는 급격한 변화를 목도하기도 하는데 <br>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인류역사에서 나타났던 수많은 “혁명(Revolution)”인 것입니다. <br><br>2010년 12월 튀니지에서는 대규모 민중시위가 일어났습니다. <br>튀니지 나라꽃 이름을 빗대어 흔히 재스민 혁명(Jasmine Revolution) 이라고 부르는 이 운동은 <br>이후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예멘, 모로코 등으로 번지면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고 <br>소위 “아랍의 봄” 이라는 찬사를 받으면서 당시에는 성공적 민주시민혁명이라는 평가를 받기도<br>했었습니다. ... 장기 지속적 관점에서 보면 단기적 시간대가 장기적 시간대를 누르고 승리한 것입니다. <br>하지만 혁명이후 6년이 넘어가는 지금의 시점에서 아랍의 봄의 현실은 어둡기만 합니다. ... <br><br>당시 혁명을 이끌어냈던 상당수 국가들은 내전에 시달리며 또 다른 독재로 후퇴하는 모습도 <br>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단기적 시간대가 기존 아랍의 장기적 시간대에게 완벽하게 <br>승리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이렇듯 어느 한 국가나 사회에서 오랜 시간을 <br>흐르던 장기 지속의 힘은 그 깊이와 힘의 세기가 보통의 힘으로는 결코 (구조를)깨뜨릴 수 없는 절대적 <br>무게감을 가진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래서 나름의 성공적인 민주화를 이뤄냈다는 평가를 <br>받고 있는 우리나라도 어쩌면 깊은 저변에는 과거 조선시대(혹은 그 이전)때부터 이어져오던 양반,<br>상민, 천민 등의 계급적 관념이 지금까지 암묵적으로 흐르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br>현상은 민주화를 이뤄냈지만, 정신은 여전히 과거 신분제가 존재하던 계급적 관념의 장기지속에서 <br>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 수백년을 흐르던 왕정과 신분제라는 장기적 시간대가 해방이후 그것도 <br>군부독재 기간을 제외하면 고작 30년 남짓한 민주화라는 단기적 시간대에게 패배한 것으로 보이지만, <br>한국은 여전히 과거 신분제 시대의 장기 지속의 힘이 깊은 저변에서 (미소 지으며)조용히 흐르고 <br>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는 뜻입니다. ~ [ @ 사회적 언어로 굳어지고 있는 금수저, 흙수저 및 <br>개.돼지 라는 조어가 어느 날 불쑥하고 그냥 나온게 아니라는 뜻이죠 ... ]<br><br>@ 참고로 이렇게 단기 시간대와 장기 시간대의 역동적인 대립의 역사를 페르낭 브로델은 <br>“시간 지속의 변증법” 이라는 그야말로 감탄이 저절로 나오게 만드는 탁월한 표현으로 대신했습니다. <br><br>[◆ 농단(壟斷) - 이익이나 권리를 교묘한 수단으로 독점함]<br><br>국정(國政)은 말 그대로 나라를 다스리는 일입니다. <br>그런데 국민에게 위임받지 못한 권한 없는 어느 사인(私人)이 모든 이익과 권리를 교묘한 <br>수단으로 독점을 했던 사태가 현재 대한민국에서 일어났습니다. 한마디로 국정을 농단한 것입니다.<br>분노한 국민들은 거리로 나왔고, 정부를 비난하는 시위도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br><br>우리나라에서 크고 작은 시위는 과거에도 늘 있어왔습니다. <br>노동자의 시위, 농민의 시위, 여성단체의 시위, 지역주민들의 정책 반대시위 등 <br>크고 작은 많은 시위들은 각자의 요구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해 정부나 기업에 항의하기도 했고,<br>진실이 더 많이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언론과 정치인들을 향해 크게 소리치기도 했습니다. ... 그러나 <br>거리로 나온 시위의 주체가 본인이 속한 단체를 위한다거나 혹은 개인적인 이해관계와 얽혀있어 <br>소리치는 조금은 협소한 행동이라면 그 시위는 단기적 시간대의 한계에 갇혀 자연히 소멸되는 경우가 <br>많았습니다. 하지만 “공동체” 라는 좀 더 묵직한 거대 담론이 시위의 본질이 되었던 경우에는 <br>역사적으로 보아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 다시 말해, (한국에서)공동체의 염려를 위한 시위는 <br>우선적으로 단기 시간대를 넘어 장기 시간대(장기 지속)로의 진입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는데, <br>여기에는 먼저 공통적으로 시위의 주체가 “학생과 시민”이 주축이 된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br>장기 지속적 관점에서 우리의 과거를 돌아본다면, <1960년 4.19혁명,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br>1987년 6월 항쟁> ... 등은 대부분 학생과 시민이 주축이 되었던 운동입니다. 더 깊은 흐름으로 <br>들어가보면 동학운동까지, 그리고 역사너머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수많은 시민들의 풀뿌리 저항은 <br>우리의 장기지속적 운동의 아주 큰 줄기이자 동시에 뿌리였습니다. ... 결론적으로 “학생과 시민”은 <br>한국의 장기 지속적 운동역사에서 절대적인 요소였다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이 전면에 나섰다는 것은<br>장기 지속적 관점에서 현재 우리사회가 상당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는 <br>것입니다. [◆ 학생과 시민이 참여한 운동은 한국의 정치 역사에서 하나의 큰 흐름(구조, 장기지속)을 <br>형성했음.]<br><br>최근 뉴스를 보니, 이제 중.고등학생까지 시국선언에 나서고 있다는 보도를 접했습니다.<br>작금의 이 사태는 오랜 시간동안 한국 정치역사의 저변에서 아주 단단한 뼈대를 이루며 흐르고 <br>있었던 구조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br><br>쉽게 말해, 권력부분에서의 장기지속의 구조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인데, 그동안 우리가 익숙하게 <br>지켜보았던 < 투표 – 권력위임 – 국민주권과 공동체의 안전 – 투표 – 권력위임 ... > 이라는 <br>장기 지속적 공식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장기 지속적 권력의 작동방식이 <br>한 순간에 모두다 허물어져버린 사건인 것입니다. 국민들이 그동안 익숙하게(장기적으로) 행사해왔던 <br>권력의 위임구조가 모두 파괴되어 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국민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br>낯설은 권력의 작동방식이 등장한 것이고 ... 그래서 지금 우리 모두는 당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br><br>마찬가지로 박근혜에게 최순실(혹은 최태민 일가)은 장기지속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br>다시 말해 “박근혜”라는 한 개인의 역사에서 최순실(최태민 일가)은 하나의 시대이자 <br>구조(장기지속)였을 것이며, 이것은 결국 최순실(최태민 일가) 이라는 단기시간대가<br>박근혜 혈족(박정희, 박지만, 박근령 등)이라는 장기시간대를 누르고 승리한 박근혜 개인차원에서 <br>바라본 “시간 지속 변증법”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래서 제가 글 처음에서 얘기했던<br>최순실은 박근혜 에게 하나의 “시대(장기지속)” 라고 말했던 부분이 이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은 <br>이해되실 거라 생각됩니다. <br><br>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br>지금까지 얘기한 브로델의 장기지속의 관점은 수백, 수천년처럼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br>하지만 박근혜의 나이(65세), 혹은 최순실과의 관계는 고작 40년입니다. 이정도 시간을 과연 우리가<br>브로델의 장기지속에 편입시켜 이해해도 괜찮은가? ~ 하는 점이 바로 염려되는 부분입니다. <br><br>물론 인간의 수명이 100년 남짓하기 때문에, 한 개인사에서 40여년의 시간은 충분히 장기지속의 <br>관점이라 인정해도 되겠다 싶습니다. ... 그렇다 해도 무언가 부족함을 감출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br>그래서 저는 이러한 염려를 영화적 기법을 이용해 해결해 볼까 합니다. <br><br>“쌍팔년도 채홍사도 아니고 ~ ~ ~ ”<br><br>(권력형)범죄 장르로서 한국 영화사의 한 획을 그었다는 영화 “내부자들” 에서 <br>정치깡패 안상구(이병헌)는 재벌회장과 정치인, 언론인 등의 섹.스파티 때마다 채홍사 노릇을 합니다.<br>그러다가 유력 대선후보 장필우의 비자금 관련 파일을 입수하게 되는데 ... 그러나 안상구는 <br>그 일로 비 내리던 어느 날 고급 요정의 정원에서 재벌회장의 추악한 일들을 음지에서 수습하던 <br>조상무(조우진)에게 벽돌로 뒤통수를 맞고 쓰러집니다. <br><br>이어서 화면이 바뀌고 ....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환하게 조명이 켜집니다.<br>하얀 내부가 매우 깔끔해서 마치 SF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거대 냉동컨테이너 같았던 창고 안<br>한 가운데, 홀로 의자에 묶여 있던 안상구는 갑자기 밝아진 조명에 눈이 부신 듯 얼굴을 찡그리며 <br>눈을 크게 뜹니다. ... 그때 창고 입구에서 안상구 쪽으로 존재감 있게 걸어 들어오는 조상무! <br><br>"어이 ~ 안상구 사장! ~ 사장! 사장! 해주니께네 ~ 다 똑같은 사장으로 보이요? <br>사이즈가 다르잖아! ~ ~ ~ 우리 상구씨! 이자부터 바보로 삽시다 ~ 잉!"<br><br>그렇게 창고에서 정치깡패 안상구는 조상무에게 한쪽 팔목이 잘리는 끔찍한 폭행을 당합니다. <br>영화를 보신 분들은 워낙 강렬한 장면이라 다들 기억하실 거라 생각됩니다만 ... 그런데 만약 <br>이것이 진짜 현실이었다면 어땠을까? ... 현실이었다면 이 장면에는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으며, <br>우리(관객) 모두는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 “생략(과정)”을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는 걸 <br>알게 될 겁니다. <br><br>다시 말해, 요정에서 안상구가 조상무에게 벽돌을 맞고 쓰러진 것이 진짜 현실이었다면 ... 이어질 <br>다음 상황은 우선 안상구의 기절을 확인한 조상무가 부하들을 불러 안상구를 창고로 이동시키라고 <br>지시할 겁니다. 그리고 부하들은 안상구를 차에 태워 이런 추악한 일들을 여러 차례 처리해온 <br>익숙한(적당한) 장소로 이동하여 그 곳에 있는 (냉동컨테이너)창고 안으로 안상구를 끌고 들어가 <br>의자에 앉힌 후, 줄로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결박합니다. ... 여기까지 일이 진행되면 부하들은<br>조상무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한 후, 한 두 명씩 조를 짜서 돌아가면서 화장실을 가거나 담배를<br>피면서 조상무가 올 때까지 창고 앞을 지킵니다. ... 이러는 동안 조상무는 요정 안에 마련된 룸으로 <br>들어가 피 묻고 비에 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샤워를 합니다. 샤워가 끝나면 뜨거운 커피를 한 잔 <br>마시면서 부하들에게 전화로 상황을 보고받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가 다른 새 옷으로 갈아입고 <br>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다음, 재벌 회장이나 비서실장에게 상황을 직접 보고한 후, 천천히 안상구가 <br>있는 장소로 이동하게 됩니다. 창고에 도착한 조상무는 부하들에게 현재 안상구 상태를 물어본 후, <br>다시 담배 한 대를 피우며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부하들과 함께 창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 <br><br>극장 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스크린을 통해 이 장면을 지켜본다면, 아마도 몇 분이 채 소요되지 <br>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이 상황이 진짜 현실이었다면 안상구를 컨테이너 창고까지 끌고가 의자에 <br>결박하기까지, 그리고 조상무가 도착할 때까지는 최소한 4~5시간은 소요됐을 것입니다. ... 하지만 <br>보시다시피 영화에서는 안상구가 기절하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창고안 의자에 묶여있는 안상구를 <br>클로즈업 합니다. ... 즉 영화는 우리(관객)에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당연한(뻔한) 사실들을(과정)<br>모두 생략하고 중요 부분만을 편집해 보여줌으로써 시간을 아껴주고 몰입감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br>다시 말해, 안상구가 조상무에게 벽돌을 맞고 기절한 이후의 (제가 위에서 진술한)상황은 우리가 <br>충분히 이러했으리라 유추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영화적 언어로 표현해 보면 이렇습니다. <br><br>“행위(과정)의 생략으로 시간의 압축을 획득한다!”<br><br>영화에서 “쇼트(Shot)의 배열”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 우리가 영화에 몰입할 수 있는 이유는<br>이렇게 지루한 (중간)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획득한 시간을 쇼트(Shot)의 치밀한 배열에 양보함으로써<br>핵심적, 혹은 극적 요소만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 쇼트(Shot) - 영화촬영의 최소단위, 보통은 <br>감독이 “액션!” 이라고 외친 후, 중간에 멈추지 않고 ”컷!“ 할 때까지의 (짧은)촬영분량을 말함]<br><br>스릴러 영화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Hitchcok, Sir Alfred)은 <br>“인생에서 지루한 부분이 커트된 것이 바로 영화다!” 라고 말했습니다. ... 한마디로 우리 삶에서 <br>지루한 부분이 모두 제거되고 가장 극적인 요소만이 남은 것이 바로 영화란 뜻입니다. ... 그래서 <br>한 인간의 일생도 영화로 만들면 2시간 남짓한 아주 짧은 시간만으로도 가능한 것입니다. <br>시간의 압축을 얻는 것이죠 ! .... .... 혹시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분이 상대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br>만남에서 극적 요소를 잘 활용해 보세요 ~ 어쩌면 10분의 극적요소가 상대에게 압축된 100시간을 <br>제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극적으로 연출된 10분이라는 시간이 상대에게는 마치 당신과 <br>100시간동안 있었던 것처럼 편안하고 익숙한 느낌을 선사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br>오래 사랑한 연인처럼 말이죠 (@ 그래서 다들 이벤트를 하나 봅니다. ~ ) ... 사귄지 열흘 된 연인과<br>1년 된 연인을 비교해 보면, 당연히 1년 된 연인에게 극적인 사건이 더 많았을 겁니다. <br><br>이러한 (영화적)시간압축 효과는 연인사이 뿐만 아니라 정치인에게서도 많이 목격할 수 있습니다.<br>특히 선거시즌이 다가오면 세련된 정치인들은 시간압축 효과를 잘 활용합니다. <br><br>어느 날 갑자기 다듬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워딩으로 한 순간에 뉴스의 초점이 되기도 하며, <br>동료의원과 사적으로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를 거의 공개적으로 보여주듯이 기자들 카메라에 찍히기도 <br>합니다. 야외에 천막을 치고 단식 투쟁을 하기도 하며, 지역구 재래시장을 돌며 어묵을 (처)먹기도 <br>합니다. 기자회견을 할 때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거리에서 삼보일배도 합니다. ... 이 모든 것이 <br>결국은 시간 압축을 통한 극적 요소를 유권자들에게 각인 시키는 일종의 의원 자신의 존재감(인지도)<br>알리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br><br>다시 이야기의 본류로 돌아와 보면 ....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은 “대한구국선교단” 이라는 <br>단체를 만들어 수천명이 모인 자리에 박근혜를 함께 데리고 가서 기도회(구국기도회)를 열기도 했고,<br>각종 이권이 개입된 크고 작은 (기업 및 단체)행사에도 항상 박근혜를 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br>당시로서는 “대통령 딸” 이라는, 막강 권력과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수많은 부정부패를 <br>저질렀는데, 이것은 박근혜 입장에서 보면 최태민과의 동행이 극적요소가 가미된 쇼트(Shot)의 <br>배열이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박근혜에게 최씨 일가와의 만남은 매 순간순간이 지루한 부분이<br>모두 커트되고 시간이 압축된 한편의 영화만들기 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박근혜와 최순실의 관계가<br>비록 40년뿐이라 하더라도, 그 40년 시간의 상당부분이 모두 극적요소로만 채워졌다면 ... 아마도 <br>그 40년이라는 시간은 40년이 아닌, 400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적 언로로 해석해<br>보면 박근혜와 최순실의 40년의 우정(?)은 충분히 장기지속이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br><br>결론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극적 요소의 가미는 꽤 많은 시간을 압축시켜 익숙한 관계로의 발전을<br>가속화 시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가 여행이나, 재난현장에서의 자원봉사, 사고를 당해 병원에<br>함께 입원한 경험에서 그 순간을 함께했던 동료나 이성친구가 유독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모두가 시간 <br>압축을 통한 극적인 순간을 함께 하면서 지루한 부분(시간)이 모두 제거되었기 때문입니다. ... 더불어<br>유명 배우나 인기 스포츠 선수에게서 가족 같은 친근함이 느껴진다면 아마도 본인이 그들이 출연한 <br>영화나 경기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극적인 감정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br>[◆ 극적요소가 가장 극대화되는 경우는 바로 생명의 “탄생과 죽음”일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가족,<br>특히 부모님의 죽음과 자녀의 죽음(탄생)은 각자의 인생에서 아마도 가장 극적인 순간이 될 것입니다. <br>마찬가지로 박정희를 신격화하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이들에게는 박정희와 육영수의 죽음이 모두 <br>엄청난 시간압축 효과를 제공했을 것이며, 추종자들에게는 이러한 시간압축은 박정희와 그의 딸 <br>박근혜가 본인들 인생 전반을 함께한 상당한 장기지속의 속성을 제공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br><br>낯설음을 경계하고 익숙함에 의지하는 것은 인간의 DNA 속에 들어있는 기본적인 방어기제입니다. <br>그런데 만약 낯설음에서 익숙함으로 달려가려는 자연스런 관계에 전복적 상황이 벌어진다면 <br>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br><br>먼저 “혼란”이라는 진부한 표현은 제쳐두고, DNA 속성이 바뀌어버려 생물학적으로는 <br>종의 변이가 일어날 정도의 엄청난 사태가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인간 삶의 모든 진행 방향이 <br>역전되어 익숙함에서 낯설음으로 달려간다고 상상해 보십시오!<br><br>오늘은 어제와 다른(낯선) 지금까지 먹어보지 않았던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음식을 먹어야 하며,<br>다음날 역시 마찬가지 상황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은 매일 바뀌게 되고, 단 하루라도<br>같은 옷을 입을 수가 없으며, 직장에서는 매일 한 번도 본적 없는 사람들과 업무를 진행해야 합니다.<br>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타인들이 자기 주변을 에워싸고, 법원과 구청에서는 매일 새로운(낯선) 법과 <br>새로운 세금고지서 양식을 발부합니다.<br><br>생각만 해도 혼란을 넘어 끔찍합니다. ... 이러한 관계의 전복은 삶은 물론이며, 내가 몸담고 있는 <br>제도에 대한 전복에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 쉽게 표현하면 어제까지 알고 있었던 세상이 한꺼번에 <br>뒤집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유권자의 권리로 투표권을 행사했고, 그렇게 국민들의 염원으로 만들어진<br>권력은 인사권과 각종 행정권한으로 제도의 안전을 책임지며, 혹시 모를 제도(체제)의 균열과 상처를<br>보수하고 치료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사태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관계가<br>모두 전복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국민들이 위임하지도 않은 이름 모를 낯설음이 등장한 것입니다.<br>결국 이것은 한 권력자와 그의 지인이 벌인 단순한 치부가 아니라 공동체 DNA 속성이 바뀔지도<br>모르는 매우 위험천만한 일인 것입니다. <br><br>지금까지 인류 역사는 전쟁을 통해 제국을 형성하기도 했으며, ... 억압당한 자유와 불평등, 그리고 <br>분배의 불균형에 분노한 수많은 민중들이 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주공화정을 이루어내기도 하였습니다.<br>시민혁명을 통해 자유를 획득했고, 그렇게 찾은 자유는 투표권을 통해 권력의 독점이나 과점을 <br>견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류는 낯설음에서 익숙함으로의 달려가는 과정 속에서 <br>민주화라는 (아직까지는)가장 이상적인 체제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민주화라는<br>아주 친근하고 익숙한 기반위에서 (안정된)권력을 창조하는 환경을 만듦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br>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그런데 우리가 이토록 힘겨운 과정을 통해 만들어놓은 장기 지속의 <br>익숙함을 최순실 이라는 어느 사인(私人)이 일거에 무너뜨려 버렸습니다. <br><br>하지만 박근혜에게는 최순실은 최태민의 연장선에 있는 그 자체로서 장기지속이자 익숙함의 <br>다른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최순실을 부정하는 것은 박근혜 자신에게는 낯설음으로 향하는 <br>전복적 상황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글 처음에서 박근혜가 (대통령)자리에서 물러나는 것과는<br>상관없이 절대로 최순실과의 관계를 끊어놓지 못할 것이라고 얘기한 것입니다. <br><br>또한 박근혜 지지자들에게는 박근혜를 부정하는 것이 낯설음이며, 이러한 모든 낯설음은 <br>결국 본인들이 살아온 시대가 부정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박근혜가 박정희의 연장선에 <br>서있는 일종의 장기 지속이기 때문입니다. <br><br>시대가 부정된다는 얘기는 그동안 쌓아온 모든 익숙함이 송두리째 허공으로 사라지며 <br>한순간에 낯설음으로의 전복적 상황이 눈앞에 펼쳐진다는 뜻입니다. ... 아니, 어쩌면 종의 변이가 <br>일어나 삶의 속성이 바뀌게 될지도 모르는 매우 위험한 상황인 것입니다.<br><br>페르낭 브로델은 우리에게 역사를 사유하는 새로운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또한 장기지속의 관점은<br>역사뿐만이 아닌, 인간 삶의 다양한 분야로 그 의미를 확장해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제 저는 <br>장기지속 이라는 구조위에서 “권위와 복종”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해볼까 합니다.<br><br>더 이상 오를 곳 없었던 한 공동체의 최고 권력자가 공동체의 합의(법)를 넘어서면서까지 <br>본인의 권력(권한) 상당부분을 다른 이에게 이전했다는 점은, 그 다른 이가 최고 권력자 보다 <br>위계구조에서 더 높은 지위를 점령하고 있다고 밖에는 설명이 안 됩니다. ... 그렇다면 이 상황의 <br>본질은 권력의 범주가 아닌, 권위의 범주 안에서 해법을 찾아야 할 텐데, 결론적으로 <br>(명목상의)최고 권력자는 본인보다 더 높은 (관념적)권위에 복종을 했을 거라는 추론이 가능 하다는<br>것이 저의 생각인 것입니다. <br><br>처음 이야기 시작부분에서도 언급했었지만, 보편적으로 권위는 복수적 형태로 복종을 수반하며, <br>이 둘의 관계는 다시 “명령”에 의해 생명력을 얻는다고 말했습니다. ... 그런데 저는 이야기의 전개를 <br>“권위와 복종은 이성적인가?”, “복종은 도덕적인 행동인가?” 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br>그리고 여기서 질문의 핵심인 “이성과 도덕적 행동”에 대해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어 <br>그 부분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br><br>모두가 그 어떤 배려나 양보 없이 오로지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만 행동한다면 <br>세계는 그야말로 하루가 멀다고 온통 대립과 분쟁에 휩싸여 혼란스런 세상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br>그래서 분쟁의 해결을 위해서는 흔히 “이성적으로 판단하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감정에 휘둘려<br>사리를 분별하지 못해 편향된 사고나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힘을 <br>빌려야 한다는 것이죠.<br><br>그래서 인간들의 이기적이고 비양심적인 본성이 수시로 나타난다면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혼란을 <br>막을 수 있는)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공동체의 이성으로 만든 법과 제도라는 합의된 <br>강제성을 활용한다면 문제가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성적인 결과인 거죠. <br>하지만 인간 사회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는 걸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너무나 많이 배워 <br>왔고, 또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혼란스러운 사회 상태에 대해서 법과 제도로도 <br>어찌해볼 수 없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는 뜻입니다. <br><br>예를 들면, 교통사고를 당해 피를 흘리며 도로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친다거나, <br>종일 굶었다며 거리에서 배고픔을 호소하며 돈을 구걸하는 걸인을 보고도 그냥 모른 채 하며 <br>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들은 법과 제도로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br>그래서 이러한 이기심과 무관심이 공동체 내에 만연하게 된다면 이성으로 만든 아무리 훌륭한<br>법이 존재한다고 해도 사회는 그야말로 극단적인 삭막함 속에 놓이게 되어 공동체라는 말이 <br>무색해 질 정도의 ~ 그야말로 껍데기만 공동체인 사회가 될 가능성이 매우 커질 것입니다. <br><br>결론적으로 아무리 공동체의 선과 평화를 위한다 해도 인간의 “도덕적 양심”까지 <br>우리 공동체가 강제할 수단은 없다는 것입니다. ... 한마디로 인간의 “도덕”은 우리가 기존에 <br>알고 있는 이성적 사고만으로는 어찌해볼 방법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br><br>그렇다면 좀 더 근원적인 해결 방법은 없는 것인가? ~ 하는 물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br>이쯤에서 약 300년 전에 태어난 독일의 대철학자 칸트(Immanuel Kant)의 견해를 들어볼까 합니다. <br><br>등산객이 비탈진 등산로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져서 다쳤다 해도 우리는 산(山) 에게 책임을<br>물을 수가 없습니다. ... 단지 중력이라는 과학적 “인과법칙”에 따라 그러한 사고가 발생했을 뿐입니다.<br>그렇다면 인간의 윤리적, 도덕적 양심은 어떨까? <br><br>과학(법칙)같은 지식적 측면의 이성은 우리 인간이 얼마든지 사유가 가능한 영역입니다.(이론적 접근<br>가능) 한마디로 과학은 충분히 이성으로 사유가 가능한 대상인 것입니다. ... 하지만 신, 영혼, 자유,<br>도덕 같은 영역은 유의미 하지만(무의미 하지 않다!), 이성으로 사유(검증)하기에는 불가능 합니다. <br>그래서 인간이 양심에 따른 도덕적 행동을 왜 해야만 하는지는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며,<br>신과 종교가 과학적 질문을 허용하지 않듯이, 인간의 도덕적 행동에도 질문이나 이유를 묻지 않아야<br>한다고 칸트는 주장했습니다. ... 한마디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은 그 어떤 이유나 이해 없이 <br>무조건 양심이 시키는 명령에 따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br><br>다시 말해 칸트는, <br>과학은 이론적인 이성으로는 접근이 가능했지만, 신과 영혼, 도덕 등은 이론적으로는 접근 <br>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러한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이성의 지식적 측면이 아닌, <br>다른 측면의 이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인간의 도덕적 행동은 직접적인 “실천(행동)”으로, <br>아무 조건을 달지 말고 그냥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칸트는 이렇게 <br>우리 내면에 우리를 도덕적으로 행동(실천)하게 만드는 의무적인 의식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br>“실천이성” 인 것입니다. <br><br>그런데 여기까지만 살펴보면, 칸트가 규정한 “도덕”은 너무나 막연한 것 같습니다. ... 또한 <br>“의무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부분도 조금은 억지스럽고 이해하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br>좀 더 확실히 이해하려면 너무나 유명한 칸트의 발언을 살펴봐야 합니다. <br><br>“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 칸트(Immanuel Kant)<br><br>인간의 도덕은 지식적인(이론적인) 이성으로는 사유가 불가능 합니다. 그런데 칸트는 이러한 <br>형이상학적(신, 영혼, 도덕 등) 영역을 과감히 이성의 영역 안으로 끌고 들어옵니다. ... 그리고 <br>인간의 도덕(도덕적 행동)에도 과연 과학(중력)법칙 같은 “보편적인 원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를<br>끊임없이 사유하며 고뇌한 끝에 내 놓은 결론이 바로 위의 원칙입니다. <br><br>등산객이 아래를 향해 굴러 떨어지든, 밤나무에서 밤송이가 떨어지든, 그리고 타자가 친 홈런 볼이<br>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다가 결국은 외야 관중석으로 떨어지는 것은 모두가 중력법칙 이라는<br>보편적인 과학 원리에 따른 결과인 것입니다. ... 그렇다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에게도 동일하게<br>적용되는 보편적인 도덕의 원리가 있을 수 있을까? ... 여기에 칸트는 “보편적 도덕법칙(원리)”이 충분히<br>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br><br>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칸트의 주장처럼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도덕법칙(원리)을 <br>찾아보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에게 천 원짜리 한 장을 건넨 <br>행위를 어떤 이는 매우 도덕적인 행동이라 생각하고 있는 반면, 이와는 반대로 그러한 행위(적선)는<br>오히려 걸인의 자활의지를 꺾게 만드는 별로 좋은 행동이 아니라는 의견도 많이 볼 수 있기 <br>때문입니다. 이렇게 실제 인간사회의 현실에서는 “도덕적 행동”에 대한 기준이 개개인 마다 편차가 <br>있기 때문에 칸트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br><br>그렇다면 칸트가 주장한 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 그래서 칸트를(칸트의 발언) 이해하기 <br>위해서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들어가 먼저 법(法)과 선(善)에 대한 그동안의 인식을 전환시켜야 합니다. <br><br>최근 사회적 이슈로 많이 거론되고 있는 보복운전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br>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구성원(국민)들이 보기에는 보복운전은 분명히 <br>잘못된 행동이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보복운전은 “선(善)한 행동”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br>우리 공동체는 보복운전을 하게 될 경우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공동체의 보편성이 담긴 법(法)을 <br>만들어 적용하게 됩니다. ... 한마디로 우리는 보복운전을 하지 않는 것이 선(善) 이라는 보편적 시선을 <br>갖기 때문에 법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선한 판단이 먼저 존재한 후에<br>그 뒤를 법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입법원리(법이 만들어지는 과정)는 선한 판단 뒤에 <br>법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br><br>그런데 칸트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러한 입법의 원리를 뒤집게 됩니다. <br>근대철학 이전까지만 해도 신(God)은 그 자체로서 진리였습니다. 때문에 신의 계율(말씀, 명령) 또한<br>묻고 따지지 말아야 할 엄격한 법(法) 이라고 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신의 말씀(명령)을 따르는 것이 <br>바로 선이라 생각했습니다. ... 한마디로 법(신의 계율)이 먼저 존재한 후에 그것을 따르는 것이<br>(신의 말씀을 따르는 삶) 바로 선(善) 이라는 것입니다. ... 그리고 칸트는 여기서 힌트를 얻어,<br>인간의 “보편적 도덕법칙” 또한 신의 계율처럼 그 자체로서 하나의 법(法)이며, 그것을 지키는 것이 <br>선(善)이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선한 판단 같은 건 따지지 말자는 거죠. 그냥 (보편적)도덕<br>법칙대로 행동하는 것 자체가 선한 행동(도덕적 행동) 이라는 뜻입니다. ... 결론적으로 칸트가 주장한 <br>“보편적 도덕법칙” 이란 아무 조건도 따지지 말고 “의무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 해야만 한다!) <br>규칙(원칙)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원칙(규칙)에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진정한 선이며, <br>도덕적 행동 이라고 했습니다.[◆ 의무에 따르는 삶!]<br><br>결국 앞의 사례에서 걸인에게 천원을 건넨 행위는 잘했다는 칭찬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br>칸트의 도덕법칙에 따르면 도덕적 행동은 아닌 것입니다. ...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게 인식하고 <br>있었던 도덕적 행동과 칸트가 생각하는 도덕적 행동과는 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 아무튼 <br>마음속 깊은 곳에서 타인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동정심이 마구마구 샘솟아 자선을 베풀었다고 해도 <br>칸트는 그것이 아무조건 없이 “의무적(해야만 한다)”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도덕적 <br>행동이 아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칸트의 도덕적 행동은 “천원을 주고 싶다!”가 아니라<br>“천원을 줘야 한다!”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 ... ... 그래서 <br><br>“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br><br>~ 라는 칸트(Kant)의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 ◆ 당신이 하려는 어떤 도덕적인 행동이(의지가) <br>모든 사람이 보기에 법으로 만들어져도 전혀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보편성을 내포하고 있다면, <br>그렇게 행동하라!> ~ 라는 뜻입니다. ... 좀 더 쉽게 풀어보면, 당신이 지금 하는 행동에 대해서 <br>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똑같이 본인을 따라 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행동은 <br>보편성(일반원칙)을 가진 도덕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br><br>“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을 볼 때 마다 나는 그에게 의지박약한 놈이라며 주먹질을 할 것이다!” <br><br>이러한 행동을 과연 다른 모든 사람에게 따라하도록 얘기할 수 있을까? ~ 당연히 이것은 칸트가<br>얘기한 도덕적 행동이 아닐 것입니다. <br><br>칸트에게 도덕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습니다. <br>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었지만, 모든 인간이 개인의 이기심과 비양심적인 행동만을 추구하게 된다면 <br>종국에는 모두의 자유가 박탈당하게 되는 상황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결국 참된 도덕은 이성에서 <br>나오며, 도덕은 의무적인 법칙으로 규정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br><br>그럼 정리하는 의미에서<br>윤리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조지아 주립대학 로버트 L. 애링턴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br><br>[◆ 동정심이라는 동기는 “도덕적 내용이 부족하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동정심이라는 <br>동기로부터 행위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옳은 것을 행하는데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br>그는 단지 동정심이라는 경향성을 만족시키는데 관심을 쏟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행하는 바의<br>도덕성에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사람은 분명히 “도덕적 가치”를 갖는 방식으로 행위 하는데<br>실패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칸트는 오직 의무라는 동기만이 행위에 도덕적 가치를<br>부여한다고 주장한다. ~ (중략) ~ 칸트는 도덕적 가치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어떤 사람이 <br>자신의 의무를 행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무에 따라 <br>행위하는 경우라고(@ 이러한 경우에는 행위의 동기가 오직 의무감뿐이기 때문에) 주장한다. <br>- 서양 윤리학사. (414~415 페이지)/ 로버트 L. 애링턴/ 서광사 ]<br><br>칸트는 개인의 동정심의 성취욕구나 타인을 도와줌으로써 칭찬받고 싶다는 마음 같은 것을 <br>“경향성”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은 이러한 경향성이 도덕적 행동의 동기가<br>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으며, 인간에게 의무적으로 도덕적 행동을 유발시킬 수 있는 것은<br>오직 “실천하는 능력” 밖에는 없으며 인간의 이성은 이러한 실천 능력에 쉬지 말고 영향력을 <br>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이미 언급했듯이 이러한 이성을 바로<br>칸트의 “실천 이성” 이라고 부릅니다. <br><br>더불어 도덕(도덕적 행동)이 “의무”라면 그것은 곳 명령이 됩니다. (@ 신의 말씀이 곧 명령인 것처럼)<br>그래서 칸트의 보편적 도덕원리(법칙)를 “정언명령(定言命令)” 이라고 부르며, 정언 명령은 이미 <br>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상관하지 말고 행위 자체가 선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br>따라야할 도덕적 명령을 말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조건을 달고 행동하는 것을 “가언명령(假言命令)” <br>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칭찬받고 싶다면 거지에게 천원을 주어라!” ... 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br>이러한 행동은 결국 목적이 칭찬받는 것이기 때문에 가짜 도덕인 것입니다. 따라서 가언명령이 됩니다. <br><br>그래서 ... “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 라는 명령은<br>칸트의 대표적인 정언 명령이 되는 것이며, 인간(타인)을 위해 행하는 도덕에는 그 어떤 조건도 달지 <br>말고, 그냥 의무감으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서 대하라 <br>뜻입니다. ... [@ 의무감에서 남을 돕는 행위가 동정심보다는 더 도덕적인 것입니다!]<br><br>권위와 복종에 대한 이야기를 위해서 제가 이렇게 300년 전에 태어난 칸트까지 소환한 이유는 <br>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할 권위와 복종의 메커니즘이 마치 칸트의 실천이성, 그리고 정언명령과 <br>많이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br><br>다시말해 권위와 복종의 문제는 인과성이 배제된 조건 없는 하나의 “보편 원리”와 같다는 뜻입니다. <br>“~ 해야만 하는” 것이죠! ... 권위가 명령하면 그냥 “복종(행동)하는 것” 뿐입니다! <br><br>“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 칸트(Immanuel Kant)<br><br>반복하자면, 칸트의 가장 유명한 이 정언명령은 인간에게 이성(실천)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br>(칸트는)말합니다. 또한 도덕법칙(정언명령)은 오직 행위 자체가 선이기 때문에 결과는 그렇게 중요하지<br>않습니다. 하지만 칸트의 이러한 표현 이후에 세계가 걸어온 길은 “보편적 입법(도덕)원리” 와는 <br>(상당한)거리가 있었음을 이제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br><br>그 누구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는 이성이, ~ 그렇다면 오류가 없는<br>이성에 의한 행위 혹은 행동은 언제나 좋은 결과만은 생산해야 정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는 <br>그러한 이성에 의해 전쟁과 학살과 불균형과 배제를 빈번하게 생산했습니다. ... 그래서 이에 대해 <br>세계적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igmunt Bauman)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br><br>[◆ 칸트의 정언명령에 따르는 전략을 정면으로 반대하며, 근대적 이성은<br>걱정근심에서 해방된 자유, 안전, 행복을 추구한다. 무엇보다도 행복을 추구하며,<br>안전 또는 행복의 경우 이성은 그것을 인류의 보편적인 소유물로 규정하려고 한다.<br>그러나 지금껏 근대적 이성은 보편성 보다는 “특권”을 위해 봉사해왔다. <br>어떤 보편성에 대한 꿈이 아니라, “우위”를 차지하려는 욕망 그리고 차지한 우위를 <br>지키려는 목표가 근대적 이성을 발휘케 하는 주된 동기였으며 그것이 가장 두드러진 <br>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욕망과 목표에 이끌린 것이었다.<br>- 유동하는 공포. 지그문트 바우만/ 112~113 페이지/ 산책자]<br><br>칸트가 주장했듯이 인간 이성에 따른 도덕적 행동은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 그자체로서 <br>또 의무감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한마디로 인간(타인)을 향한 도덕적 행동은 그냥 의무적으로 <br>“~ 해야만 하는” 것이죠. ... 그런데 완벽할 것만 같았던 칸트의 도덕원리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은<br>그동안 수많은 전쟁과 학살과 배제를 양산하면서 칸트가 자신의 심연속 깊은 곳에서 어렵게 꺼내온 <br>보석 같은 정언명령(“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을 무색하게 <br>만들어 버렸습니다. <br><br>이유가 무얼까? ~ ~ 칸트를 무색하게 만드는, 우리가 아직 눈치 채지 못한 혹시 모를 <br>숨은 원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까? ... 그래서 칸트만큼은 아니지만, 나름의 깊은(?) 생각 끝에 <br>제가 내린 결론이 바로 “권위(Authority)와 복종(obedience)”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br>우리의 도덕에 권위가 개입하게 되면 이성의 의한 정언적 명령에도 심각한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는<br>것입니다. ... 그래서 저는 지금부터는 그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려 합니다. <br><br>[◆ 지역신문에 공고를 냈다. 기억과 학습에 관한 연구의 참가자로 <br>모든 직업군을 대상으로 하며, 시간당 4달러와 주차료 50센트를 지불한다는 <br>공고였다. 그 결과 전체 296명이 지원했다. 실험을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br>인원이어서, 여기에 덧붙여 보조적으로 직접 편지를 보내 모집했다. ~ (중략)<br>전형적인 피험자는 우체국 직원, 고등학교 교사, 회사원, 기술자, 노동자와 같은 <br>사람들이었다. 피험자들은 고등학교를 마치지 않은 사람들에서부터 박사나 다른 <br>전문 학위를 받은 사람들까지 다양했다. ~ (중략) ~ 진짜 피험자 한 명과 <br>희생자 한 명이 한 조가 되어 각 실험을 수행했다. 진짜 피험자는 왜 전기충격을 <br>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당한 구실을 찾아야만 했다.(합법적 권위에 관한 모든 <br>사례에서, 명령을 수행하는 자는 자신이 받는 명령과 특정 형태의 권위 사이에<br>아무리 희미하더라도 어떤 연관성을 지각해야 하기 때문이다.)<br>- 권위에 대한 복종. 41~43페이지/ 스탠리 밀그램/ 에코리브르 ]<br><br>50여 년 전, 미국의 예일 대학교에서 사회심리학을 가르치던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은<br>세계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유명했던 소위 “복종 실험”을 진행하게 됩니다. 실험에는 고루 분포된 <br>나이(20~50대)와 성별, 그리고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br><br>그럼 먼저 실험의 주요 내용부터 살펴보겠습니다. <br><br>[1] <기억과 학습> 이라는 주제로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실험에 참여하게 됩니다. <br>[2] 한 사람은 선생(전기충격 가해자), 나머지 한 사람은 학습자(전기충격 희생자) 역할을 맡게 됩니다. <br>[3] 실험자는 이들에게 처벌이 학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라고 설명합니다.<br>[4] 학습자(전기충격 희생자)를 실험실 방 의자에 앉히고, 양팔을 묶고, 전극봉을 손목에 부착합니다. <br>[5] 학습자는 단어 쌍 목록을 공부하게 될 것이며, 틀릴 때마다 전기충격의 강도가 높아질 것입니다.<br><br>이 실험의 핵심은 전기 충격을 가하게 될 선생 역할을(이후 “선생”) 맡은 참가자입니다. <br>선생은 학습자(전기충격 희생자)가 묶여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 실험실로 들어가서 전기충격기계 <br>앞에 앉습니다. 전기충격기계에는 15볼트에서 450볼트 까지, 15볼트씩 증가하는 총 30개의 스위치가<br>가로로 늘어서 있습니다. 더불어 각 스위치에는 “약한 충격”, “강한 충격”, “위험(매우 심각한 충격)”<br>이라는 문구가 적힌 스티커가 붙어있습니다. ... 실험을 총괄하는 실험자는 선생에게 학습자가 <br>올바른 답을 하면 다음 항목으로 넘어가고, 틀렸을 경우 학습자에게 전기충격을 가해야 한다는 얘기를<br>전합니다. 그리고 선생은 가장 낮은 단계의(15볼트) 전기충격부터 시작해서 학습자가 틀릴 때마다 <br>30볼트, 45볼트, 60볼트 ..... ..... 순으로 충격의 강도를 높여야 합니다. <br><br>그런데 이 실험에서 진짜 실험 대상은 바로 “선생”입니다.<br>희생자 역할을 맡은 학습자는 실제로는 그 어떤 전기충격도 받지 않습니다. 그냥 전기충격을 받은<br>것처럼 연기를 하는 것뿐입니다. 더불어 선생이 충격의 강도를 높여갈 때마다 학습자는 강력히 <br>항의하는 연기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선생은 계속해서 충격의 강도를 높여가며 실험 총괄자의<br>명령(지시)을 따를 것인가, 만약 명령을 계속 수행한다면 스위치를 과연 어느 단계까지 누를 것인가,<br>아니면 명령을 거부(불복종) 하게 된다면 그 지점은 어디인가 ... 를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br>[◆ 실험자(실험 총괄자)는 선생 역할을 맡은 참가자에게 우선 실험을 시작하기 전에 시험적으로 <br>45볼트의 전기 충격을 진짜로 경험하게 합니다. 이로써 선생에게는 이 실험과 전기충격기가 진짜라는<br>믿음이 강화됩니다. - @ 샘플 전기충격 ] <br><br>본격적인 실험이 시작되면, 학습자(희생자)는 전기 충격의 강도가 높아질 때마다 불편과 불만을 <br>표현하게 됩니다. ... 예를 들면, 75볼트 수준에서는 짜증나는 표정을 지으며 약한 불만을 드러냈고,<br>100볼트가 넘어가면 “고통스럽다!” 라며 말로써 좀 더 직접적인 불만을 표현합니다. ... 150볼트가 <br>넘어가면 “실험을 그만하고 싶다!” 같은 항의성 발언을 큰소리로 선생을 향해 외칩니다. 한마디로 <br>충격 강도가 높아질 때마다 학습자(희생자)는 좀 더 격렬하게 감정적인 발언과 항의를 하는 것입니다. <br><br>그리고 충격의 강도가 250볼트가 넘어가게 되면, 이때부터는 단순한 항의성 발언이 아닌, <br>고문을 당하는 사람처럼 심한 “괴성과 비명”을 지릅니다. 이러한 학습자(희생자)의 고통스런 반응은 <br>선생의 내면에 “실험을 중단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심리적 압박을 가합니다. 이와 동시에 합법적인 <br>권위자인 실험자(실험 총괄자)는 선생에게 개의치 말고 계속 스위치를 누르라며 압박을 가합니다. <br><br>스탠리 밀그램의 “복종실험”의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 그런데 밀그램의 복종실험은 전시(戰時)에 <br>군 지휘관이 내리는 명령과는 차이가 많습니다. 우선 대학 실험실에서의 실험자(실험 총괄자)가 내리는<br>명령은 전시의 지휘관처럼 (실험참가자에게)명령을 강요할 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실험참가자 또한 <br>전쟁에서 느끼는 어떤 위기감이나 국가를 위한 헌신의 필요성도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때문에 사실상<br>밀그램의 복종실험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복종을 위한 여러 상황적인 조건 또한 상당히 <br>약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실험의 결과는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br><br>실험이 시작되고 전기충격의 단계가 조금씩 높아지자, 선생 역할자는 스트레스를 느끼며<br>실험자(실험 총괄자)에게 우려를 표하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실험참가자(선생 역할자)들은 놀라울 <br>정도로 협조적 이었으며, 예상을 훨씬 웃도는 상당수의 선생들이 전기충격의 마지막 단계(450볼트)까지 <br>명령을 따랐습니다. ... 특히 이 과정 중에 많은 학습자(전기 충격 희생자)들이 고통을 호소하며, <br>항의하고, 심지어 (실험을)못하겠다며 풀어달라고 애원을 하기도 했었지만 상당수의 선생역할을 맡은 <br>사람들은 실험자(실험 총괄자)의 명령을 끝까지 따랐습니다. <br><br>불복종에 대한 개인의 처벌의 위협이 존재하는 공포적 상황은 복종을 강요합니다. 하지만 <br>스탠리 밀그램의 이 복종실험은 그 어떤 강요나 위협도 없는, 권위자의 단순 요구에 따른 자발적 <br>복종만을 다룹니다. ... 밀그램은 이 복종실험에서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이 특별한 심리적 동요 없이<br>실험의 마지막 단계까지 따르려 했던 매우 극단적인 자발성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더불어 <br>이 실험은 이후, 다른 여러 대학에서도 똑같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밀그램의 실험 결과와 거의 <br>유사하게 나타났습니다.<br><br>보편적인 생각을 해봅니다. <br>마지막 단계인 무려 450볼트라는 엄청난 충격의 스위치를 누른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br>이들은 사회에서 폭력성이 심하며, 가학적인 일탈을 즐기는 사이코패스(psychopath) 같은 부류들일까?<br>밀그램의 실험에서 참가자의 대략 3분의 2의 숫자가 “(매우)복종적인” 피험자 범주에 속한다는 것이 <br>실험의 결과로 드러났으며, 이들은 모두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직장인 이거나 학생,<br>혹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br><br>그렇다면 우리는 이쯤에서 평범함 속에 내재된 가학적이고 파괴적인 속성을 스탠리 밀그램보다 <br>훨씬 이전에 발견했던 독일 태생의 유대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그 유명한 <br><<◆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 에 대해서 살펴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br><br>아렌트는 자신이 1963년에 집필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에서 <br>독일 나치의 친위대 중령이었으며, 2차 세계대전 중 수백만의 유대인 학살 혐의로 이스라엘 <br>정보경찰(모사드)에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진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의 재판을 <br>지켜보면서 그 과정과 본인의 생각들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 보고서에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은 <br>가학적이고 폭력적인 괴물이 아니었으며, 그는 낡은 사무용 책상에 앉아 무료하게 업무를 수행할 것<br>같은 너무나 평범한 관료주의의 전형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당시 아렌트의 이러한 <br>주장은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으며, 수백만의 유대인 학살의 주범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br>좀 더 사이코패스 적이며 악마적인 인물로 대치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히만의 모습은<br>아렌트의 말처럼 너무나 평범했으며, 대중들이 원하는 모습과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br><br>[◆ 그의 양심에 대해 그는 자신이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br>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거라는 점을 완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br>그 일이란 수백만 명의 남녀와 아이들을 상당한 열정과 가장 세심한 <br>주의를 기울여 죽음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분명히 이것은 받아들이기 <br>힘든 일이다.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그를 “정상”으로 판정했다.<br>(그들 가운데 한 명은 “적어도 그를 진찰한 후의 내 정신 상태보다는 정상”<br>이라고 탄식했다고 전해지고, 또 다른 한 명은 그의 아내와 아이들, <br>어머니와 아버지, 형제자매, 그리고 친구들에 대한 그의 태도. 그의 모든 <br>정신적 상태가 “정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함”을 발견했다.) 그리고 끝으로, <br>대법원에서 그의 항소를 들은 후 그를 정기적으로 방문한 성직자는 <br>아이히만이 “매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 이라고 발표함으로써 <br>모든 사람들에게 확인해 주었다. <br>-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79페이지/ 한나 아렌트/ 한길사 ]<br><br>“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 악마적 속성은 광신이나, 포악, 반사회성 같은 정상성에서 많이 <br>벌어진 곳이 아닌, 바로 우리 곁에 늘 존재하는 “평범함” 속에 있다는 것을 아렌트는 아이히만의<br>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통찰한 것입니다. ...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아렌트가 얘기한 악의 평범성은<br>악마적 속성이 평범함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함 속에서 언제든지 악마적 속성이<br>나올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평범함이 악의 근원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br><br>질퍽하고 검붉은 토양 아래 어딘가에 평범함이란 뿌리가 퀭하게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br>태양(빛)과 물과 온도 같은 “적당한 조건만” 갖춰진다면 악의 꽃은 평범하게, 그리고 너무나 과감하게 <br>대지위로 솟구쳐 오를 것입니다. 그렇게 피어오른 꽃은 평범한 우리들을 가스실 경비를 서게 하고, <br>독극물 주사를 놓도록 강하게 유혹합니다. ... 그렇다면 대다수 평범한 국민들은 모두 악마적인 것인가? <br>아니면 악마성을 스스로 억제하며 인내하고 살아가는 것인가? ~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br>저의 개인적 견해로는 아렌트가 주장한 평범함 속에 악의 본성은 바로 “권위”가 개입할 때 드러납니다.<br>더불어 그 권위 안에서 “(복종의)적당한 조건”만 갖춰진다면 평범성은 어느새 악의 꽃을 활짝 피우게<br>될 것입니다. ... 그리고 그 “적당한 조건”에 대해서는 다시 밀그램의 실험으로 돌아와 계속해서 얘기를<br>이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br><br>밀그램의 (복종)실험에서 희생자에게 극단(450볼트)까지 전기충격을 가했던 선생역할을 맡았던 <br>사람들은 모두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며, 특히 그들은 모두가 실험 참가자의 한 사람으로서<br>실험이 실패하지 않고 무난히 잘 끝날 수 있도록 바라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이 존재했다고 <br>얘기합니다. <br><br>그렇다면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엄청난 파괴적 과정의 대리자가 될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br>무엇일까? ~ 단순히 실험이 실패하지 않기를 바라는 실험참가자로서의 의무감 때문이었을까? <br>그래서 밀그램은 실험에서 이들을 복종하게 만드는 좀 더 구체적인 요인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br><br><복종하게 만드는, 즉 ~ 선생(전기충격 가해자)을 상황에 묶어두는 구속요인들><br><br>(1) 선생의 공손함이나 실험자(총괄자)를 돕겠다는 처음의 약속을 지키려는 소망, 약속 철회시의 어색함.<br>(2) 선생의 생각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순응적 변화가 권위자에게서 벗어나려는 결심을 방해함. <br>(3) 순응은 실험자(총괄자)와 관계를 유지하는데 기여함과 동시에, 실험 중에 벌어지는 긴장을 줄여줌.<br><br>밀그램은 이와 같은 요인들이 힘없는 사람에게 해를 가하라는 권위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들이 <br>보이는 전형적인 사고들이라고 주장합니다. ... 여기에 기술적인 완충요소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br>예를 들면,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Dr. Strangelove. 1964년 제작)에서 핵폭탄을 투하하기 위해 <br>정밀한 기술적 업무에만 치중하는 비행기 조종사를 빗대어 얘기하면서, 과제의 기술적 측면에만 <br>치중하다가 그 과제가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는 전혀 보지 못하는 개인의 어리석은 경향성을 <br>지적합니다. 이는 복종실험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는데, 학습자(희생자)가 단어 쌍을 정확히 발음하는지,<br>스위치는 잘 못 건너뛰어 누르지는 않았는지와 같은 “기술적.절차적” 부분에만 몰두하다가 <br>도덕적 사안은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치는 경우를 얘기합니다. 한마디로 선생은 본인 스스로가 <br>과연 유능하게 일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에만 몰입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술적 부분은 권위에 대한<br>복종에 윤활유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한 “전기충격기계” 같은 물리적 수단과, 선생과 희생자와의<br>물리적 “거리” 등도 기술적, 절차적 요소처럼 긴장을 완화(혹은 완충)시키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br>한마디로 권위자(실험 총괄자)가 시키는 지시(명령)사항을 이행(복종)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결과에<br>대해 선생이 느끼는 심리적 압박으로부터 이러한 완충요소들이 긴장 수준을 떨어뜨려 준다는 <br>것입니다. <br><br>[◆ 희생자를 주먹으로 때려야 한다면 피험자(선생)는 더 꺼려할 것이다. <br>악의적인 권위자가 완충제의 비인간화 효과와 결합하면, 인간의 생존에 <br>그 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논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 사이에 <br>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전적으로 양적으로만 보면, 돌을 던져 한 사람을 <br>죽이는 것보다 마을에 대포를 쏴서 1만 명을 죽이는 것이 더 사악한 일이다. <br>그러나 심리적으로는 전자가 훨씬 더 실행하기 어렵다. ... 거리, 시간, 심리적 <br>장벽들은 도덕의식을 둔화시킨다. 사실상 6킬로미터 상공의 비행기에서 <br>해변을 폭격하거나 네이팜탄을 떨어뜨리는 데 어떠한 심리적 억제 요인도 없다. <br>아마겟돈(Armageddon)을 야기하는 버튼(인류 종말을 야기하는 핵무기 발사 버튼)<br>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그 버튼을 누르는 것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것과 <br>정서적으로 거의 동일하다. <br>- ( 권위에 대한 복종. 226페이지/ 스탠리 밀그램/ 에코리브르) ]<br><br>복종은, ~ 특히 권위에 대한 복종은 신비한 마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br>양심에 따라 행동하며, 신념에 따라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도 명령을 받게 되면 <br>평소에 잘 하지 않았던 행동도 과감히 혹은 주체적일 때보다 더 열정적으로 하게 되는 경우가<br>많습니다. 그래서 밀그램은 위에서 살펴보았던 복종에 대한 구속요인들 이외에도 또 다른 상당히 <br>중요한 복종의 핵심 이유로 “책임“을 얘기합니다. ... 한마디로 권위가 시키는 명령에 순응하는 복종자는 <br>자신을 권위자의 소망을 이루는데 필요한 도구쯤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br>복종에 따른 책임을 더 이상 지지 않아도 된다는 암묵적인 기대가 있다고 합니다. ... 한마디로 <br>도덕성을 평가하는 좀 더 폭넓은 일은 권위자에게 위임되는 것입니다.<br><br>[◆ 복종실험 – 피험자(선생)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실험을 450볼트까지 진행한다.<br><br><선생>: “아무래도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아요.<br>더 낮은 전압에서는 소리를 질렀잖아요. 들어가서 그가 괜찮은지 확인 좀 해보지 않으실래요?“<br><br><실험자(총괄자)>: “(초연하고 차분하게)일단 시작하고 나면 그럴 수 없습니다. 계속해주십시오 선생.”<br><br><선생>: “(깊은 한 숨을 쉬며) ‘시원한-낮, 그늘, 물, 페인트’ ~ 대답해주세요. 그 안에 괜찮으시죠?”<br><br><실험자>: “계속해주십시오. 선생! ~ 계속하세요.( ... 선생이 스위치를 누른다.)”<br><br><선생>: “(의자 주변을 돌며, 희생자 방안을 가르킨다.) 저 안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br>당신이 들어가서 점검해 보는게 좋겠어요. 그는 대답도 않고, 아무것도 안 할 거에요.“<br><br><실험자>: “계속하세요. 계속해주십시오.”<br><br><선생>: “당신이 모두 책임지겠습니까?” <br><br><실험자>: “책임은 제가 집니다. 틀림없이. ... 계속해주십시오.” <br><br>- ( 권위에 대한 복종. 230~231페이지/ 스탠리 밀그램/ 에코리브르) ]<br><br><br>피험자(선생)는 실험자(총괄자)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자, 다시 자리에 앉아 최대한 빠르게 <br>단어들을 읽으면서 실험을 이어갔고, 최종적으로 마지막 단계인 450볼트까지 스위치를 눌렀습니다.<br><br>복종에 순응하는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자신의 행동에 (큰)책임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br>그는 합법적인 권위자가 상당부분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은 모든 책임에서 <br>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또한 스탠리 밀그램은 이 실험을 통해 복종에 순응하는 자들의<br>대부분은 본인들의 행동이 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며, 대신 외부 권위자의 대리인으로만 <br>생각한다고 얘기합니다. ... “무엇을 위한 실험인지”, “희생자는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와 같은<br>명백한 질문들 보다는 권위자의 기대에 어떻게 부응할 것인가가 더 큰 관심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br><br>@ 그렇다면 저는 이쯤에서 아이히만의 진술과 저만의 견해를 더해, 밀그램의 주장 속으로 들어가 <br>한 가지 논쟁을 일으켜 보려고 합니다. 바로 방금 전 밀그램이 언급했던 복종하는 자들이 본인들의 <br>복종을 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부분입니다. ... 저의 견해는 그들(복종 순응자)은 자신들의 <br>복종에 대해서 충분히 도덕적 행동이라고 인식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br><br>[◆ 본질에 있어서나 의도에 있어서 병사들이 명백히 범죄적인 <br>명령을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이상으로 이 문제 전체와 연관된 것이 <br>있는가에 대한 아이히만의 애매한 생각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경찰심문이 <br>진행될 때였다. 이때 그는 갑자기 전 생애에 걸쳐 칸트의 도덕 교훈, 특히 <br>칸트의 의무에 대한 정의에 따라 살아왔다는 것을 아주 강조하면서 선언하듯 말했다. <br>이것은 표면상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었고 또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br>칸트의 도덕철학은 맹목적인 복종을 배제하는 인간의 판단 기능과 아주 밀접하게 <br>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 (중략) ~ 모든 사람이 놀랍게도 아이히만은 정언명령에 대한 <br>거의 정확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칸트에 대해 언급하면서 제가 말하려 한 것은, <br>나의 의지의 원칙이 항상 일반적 법의 원칙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br>~ (중략) ~ 국가에 의해 합법화된 범죄의 시대에는 칸트의 정식이 더 이상 적용 가능하지<br>않으므로 기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이히만은)왜곡하여 읽었던 것이다. 즉 당신의 <br>행동의 원칙이 이 땅의 법의 제정자의 원칙과 동일한 한에서 행위하라 ... 라든가, <br>“만일 총통이 당신의 행위를 안다면 승인할 그러한 방식으로 행위하라.“ 라는 식으로 말이다.<br>칸트는 분명이 이런 종류의 어떤 것도 말할 의도를 갖지 않았다. <br>-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210페이지/ 한나 아렌트/ 한길사 ]<br><br>이이히만 본인은 칸트의 정식, 즉 우리가 앞서 그렇게 자세히 살펴보고 고민해 보았던 <br>“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 라는 정언명령에 <br>따른 삶을 살았다고 주장했지만, 수백만을 학살 하는 행동을 우리는 감히 그 어느 누구에게도 <br>따라하도록 권유하지는 않습니다. 이에 대해 아렌트는 당연히 터무니없는 얘기로 취급하면서, <br>다만 아이히만은 히틀러 같은 권위자의 명령을 도덕법칙으로 왜곡하여 이해하였다고 말합니다. <br>그리고 여기에 저의 견해를 더해보면, 아이히만의 이 같은 주장은 복종에 순응하는 자들에서 <br>보여지는 (잠재된)공통요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시 말해, 아이히만의 주장은 인류의 선과 <br>도덕적 사회를 위해 아름다운 도덕원리를 만들었던 칸트의 본질에는 정반대편에서서 위배하고 있지만,<br>이들(복종 순응자)이 인식하고 있는 복종의 형식은 공포스러울 정도로 칸트의 정언명령의 메커니즘을<br>따르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인류의 선이 아닌, 파멸을 위한 행동임에도 <br>“권위”가 명령하면, 복종 순응자에게는 그것은 하나의 법칙이 되며, 책임이 배제된 “~ 해야만 하는”<br>의무가 되는 것입니다. ... 다시 말해, 의무감에서 하는 복종은 칭찬받기 위해 복종하는 것보다 <br>이들(복종 순응자)에게는 훨씬 더 도덕적인 행동인 것입니다.<br><br>복종에 순응하는 자들은 복종을 통해 자신들이 경배하는 힘(권위)의 일부가 되기도 하며, <br>그로인해 스스로 강해졌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더불어 그 힘(권위)이 자신을 대신해 결정해줌으로써 <br>본인들은(복종 순응자) 책임의 관에서 두발을 모두 빼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러한 복종의 <br>기초적이며, 보편적인 인식은 복종 순응자들이 “왜?” 라는 단서를 달지 않고, 권위자에게 의무적으로 <br>복종할 수 있게 만드는 그들 내면의 순수한(그들 차원에서) 이성인 것입니다. ... 그리고 저들은(복종자)<br>자신들의 이러한 인식들이 언제든지 칸트의 “실천이성”과 교환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 <br>저의 개인적 생각인 것입니다. <br><br>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랄 때, 그 반대편에는 권위에 대한 복종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br>그동안 우리에게 복종은 낯설음이 아니라 익숙함의 하나였으며, “권위에 대한 복종”은 그 자체로서 <br>상당한 범주적 관성을 갖는다고 생각하는데 ... 쉽게 말해, 가족, 학교, 사회제도, 문화 등 우리 인간사회<br>전체를 관통하여 흐르는 매우 견고한 장기지속이 아닐까 ~ 저는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br><br>어릴 적 아버지가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마라!” 라고 말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br>물건을 훔치지 말라는 “도덕적 교훈”과 함께, 아버지 당신의 말에는 조건을 달지 말고(의무적으로) <br>“복종하라!” 라는 함축적 명령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가정 내에서의 권위와 복종체계를<br>경험한 후에, 다시 “학교”라는 제도적 권위 체계로 장소를 이동하여 적응하게 됩니다.<br>그리고 학교에서 (남자라면)군대, 직장 등으로 우리의 복종의 공간은 계속해서 바뀌게 됩니다.<br>여기에 추가적으로 현대 사회에서의 권위와 복종의 구조는 독특하게도 사람(권위자)이 아닌,<br>제복(군복, 의사, 법복 등), 직함(사장, 이사, 시장 등), 소속배지(국회의원, 국세청, 검찰 등)같은 <br>기호화된 관념구조에도 반응합니다.<br><br>인간이라는 종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대표적 특성이 바로 권력을 창조하는 환경을 만듦으로써 <br>인간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한다는 점입니다. 홀로 고독하게 대지위에 서있을 땐 인간은 자연에게 <br>권력을 위임하고 의지합니다. 무리지어 군집을 이루고 있을 때는 누군가에게 대표성을 부여해 군집의 <br>운명을 맡깁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은 공동체의 안정을 보장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공동체를 <br>짓밟아 허무는 역설적 기능도 잠재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권력을 끊임없이 창조합니다.<br>그리고 이러한 권력의 창조는 바로 “권위와 복종” 이라는 위계구조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br><br>그럼 이제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br>최순실과 박근혜의 관계는 과연 권위자와 복종 순응자의 관계였을까?<br>대통령의 인사권을 비롯한 각종 수많은 권력지분을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br>어느 사인(私人)이 독차지하고 사적으로 행사하였습니다. ... 헌정질서가 파괴된 것입니다. <br>권력에 있어서라면 “대통령”이라는 압도적 혹은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소유한 박근혜가 <br>일반 사인(私人)에게 강압에 의해 대통령의 권력을 넘겨주었다고는 절대 상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br>불가능 합니다. 따라서 앞에서도 언급했었지만, 우리는 이 둘의 관계를 권위와 복종의 구조에서 <br>찾아야 합니다. <br><br>우리는 살아가면서 권력을 가진 자들이 본인들의 권력에 대한 제한을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이는<br>경우를 많이 목격할 수 있습니다. ... 예를 들면, 입법 권한이 있는 정치인들이 판사들이 자신들을 <br>감옥에 보내는 것을 허용하는 경우나, 부자들이 자발적으로 재산을 기부하려 행위, 그리고 총을 가진<br>경찰이 총이 없는 시민들에게 낮은 자세로 봉사하는 경우 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br><br>이런 모습들은 우리의 공동체 내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br>찾으려면 상당히 포괄적이며, 또 너무나 어렵습니다. 다만 여기서 알 수 있는 명확한 사실은 <br>이 또한 복종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굳이 해답을 찾자면 이들이(권력 소유자) 복종을 수용하는<br>일반적으로 이유로는 권력 소유자가 도덕적 행동을 추구하는 양심적인 사람이거나, 다른 이유로는 <br>복종을 함으로써, 즉 권력에 대한 제한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들에게 이익이 예상되기 때문일 <br>것입니다.<br><br>그렇다면 박근혜의 최순실에 대한 복종(@혹은 정신 나간 협조?)은 박근혜 본인에게 이익이 <br>예상되어서 일까? ... 아니면 아이히만처럼 칸트의 숭고한 도덕원리를 잘못 이해한 상태에서 <br>본인의 의지의 준칙, 즉 본인의 행동(최순실에 대한 복종)을 누가 보더라도 보편적 입법 원리에 따라 <br>행한 도덕적 행동이라 생각해서 일까? ~ 밀그램의 실험을 통해서 납득할만한 답을 도출해 보려고<br>해도 박근혜-최순실의 관계는 너무나 특별해서 쉽지만은 않습니다. <br><br>지금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듯이 밀그램의 실험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었던 복종의 대표적 <br>이유에는 복종 순응자가 (권위자의)대리자 역할을 함으로써 본인이 책임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다는<br>인식을 갖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 이라는 최고 권력은 모든 걸 책임지는 위치이지, <br>책임을 회피하거나 다른 이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 또한 대통령은 <br>국민의 대리자는 될 수 있어도 국민이 위임하지 않은 사인의 대리자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br>박근혜의 복종의 진짜 본질은 무엇일까? ~ 사실 어디에 방점을 찍어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되는 <br>순간이었습니다. ~ 그런데 이때 아렌트가 저에게 가장 명확한 해답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br><br>[◆ 나는 재판에 직면한 한 사람이 주연한 현상을 엄격한 사실적 차원에서만 <br>지적하면서 악의 평범성에 대해 말한 것이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맥베스도<br>(셰익스피어 희곡 인물)아니었고, 또한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br>결심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개인적 발전을 <br>도모하는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br>그리고 이러한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br>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br>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br>~ (중략) ~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에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br>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br>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 (중략) ~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br>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br>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br>-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391~392페이지/ 한나 아렌트/ 한길사 ]<br><br>그렇습니다! ~ 권력에서 절대적으로 앞섰던 박근혜가 너무도 무력하게 최순실 이라는 사악한 <br>사인(私人)이 엄청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도록 방관했던 것은, 그리고 복종 순응자가 될 수밖에 <br>없었던 것은 바로 생각하지 않는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br>이로 말미암아 아렌트가 지적한 것처럼 모든 악을 합친 것 보다 더 큰 파괴가 일어난 것입니다. <br>아니 어쩌면 생각할 의지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이유가 아닐까 <br>저는 생각해봅니다. ... 다시 말해 박근혜의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는 일종의 정언명령의 <br>메커니즘을 따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 한마디로 “생각하기 싫다!”가 아니라, <br>“생각하지 않아야 한다!”였던 것이죠 .... 그래서 최순실과의 40년이라는 장기지속의 자궁 속에서 <br>박근혜는 마치 새의 알처럼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 상태로 잉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br><br>[◆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br>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br>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 (데미안. 123페이지/ 헤르만 헤세/ 민음사) ]<br><br>워낙 유명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주 인용되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구절입니다.<br>현재의 “나”에서 더 나은 “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지금 자신을 두텁게 에워싸고 있는 <br>알의 껍질(기존의 인식의 틀)을 깨뜨리고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 그러자면 진정한 자기성찰과 <br>깊고 처절한 사유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 투쟁하지 않고 계속해서 고요의 세계에 머물러 있기만을 <br>바란다면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 상태는 그대로 화석화 될 것입니다. <br><br>이제 저는 한쪽 손에 무사유 상태로 화석화 되고 있는 박근혜라는 새의 알과, 또 다른 손에는 <br>마지막 시선인 “도착(perversion)적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관한 이야기를 꽉 움켜쥐고, <br>이 글의 아프락사스를 향해 힘차게 날아가려 합니다. <br><br>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영화 “감각의 제국(In the Realm of the Senses. 1976)”은 <br>일본의 군국주의가 극에 달하던 1936년을 배경으로 돈 때문에 창녀가 되기로 한 사다의 <br>등장으로부터 (영화는)시작됩니다. <br><br>어느 고급 술집의 부엌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사다는 거리의 걸인이 도저히 잊을 수 없어 <br>다시 달려들 정도로 성에 상당히 민감한 여자입니다. 거지가 한 번 관계했던 창녀를 다시 기억할 <br>정도로 관능이 넘쳐흐르던 여자가 바로 사다였던 것입니다. ... <br><br>그녀(사다)는 어느 날 부엌에서 자신을 천하게 대우하는 서너 명의 여자들과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br>이를 알게 된 술집 주인은 사다를 자신의 집 하녀로 들이게 되고, 돈과 시간이 남아돌아 매일같이 <br>향락을 즐기던 주인 키치는 마침 사다의 성적 관능을 단번에 알아보고 사다와 격정적인 섹.스(S.ex)를<br>시작하게 됩니다. ... 그런데 이들의 이러한 쾌락의 향연 속에서 사다는 주인 키치가 잠시라도 <br>자신이 아닌 아내(주인마님)와 즐기는 모습을 보일 때 마다 질투심이 극에 달합니다. 결국 사다는 <br>집을 나가 여관에 방을 얻어 아예 키치를 장악하게 됩니다. <br><br>이제 사다와 키치는 오직 육체적 쾌락만을 위해 매일같이 서로를 불태웁니다.<br>섹.스(S.ex)가 반복될 때 마다 주인 키치와 하녀 사다의 관계는 전복되고, 사다는 키치를 지배하며<br>키치의 의지를 허물어뜨리고 노예화 시킵니다. ... 이윽고 사다의 “신음”은 하나의 명령이 되고<br>키치는 이에 복종하며 “너무좋아! ~ 계속해! ~ 황홀해!”를 외치다가 마지막 순간에<br>키치는 사다에게 <“내 몸은 이미 너의 것이다! ~ 어서 나를 죽여달라! > 면서 끝이 납니다.<br>(@ 사다는 키치를 목 졸라 죽인 후, 성기(남근)를 자릅니다 !) <br><br>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소년 나르시스(Narcisse)는 숲의 요정 에코(Echo)의 사랑을 거부하여 <br>벌을 받게 됩니다. 이후 소년 나르시스는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흠뻑 반해 <br>대상(물에 비친 자신)을 얻으려 안간힘을 씁니다. ... 하지만 잡으려고 손을 뻗으면 물이 흐트러져서<br>아름다운 얼굴은 이내 사라졌고, 아쉬움을 달래면 보석 같은 얼굴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 결국<br>그 연인(대상)을 얻는 방법은 물속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었고, 나르시스는 그렇게 물속으로 뛰어들어 <br>죽게 됩니다. <br><br>자신을 유혹한 아름다운 연인은 사실은 자신이요, 본인 심연속에 새겨진 이상적 타자(연인)의 <br>모습이 투영된 판타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만났을 때, 상대에게서 간혹 <br>낯설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엿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르시스의 대상(물에 비친 자신)에 대한 <br>사랑은 결국 (물에 비친)자신을 영원히 파괴하는 일종의 도착증입니다. <br><br>영화에서 사다의 격정적 신음은 명령으로 치환되어 키치에게 복종을 요구합니다. <br>여기서 우리 모두가 관음증에 취한 대리만족자가 되어 이들의 섹.스(S.ex) 속으로 좀 더 깊게 <br>침잠해 들어가 보면, 사다는 키치에게 사다 자신의 명령(신음)에 복종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br>사다 자신이 “복종을 하고 싶다”는 본인의 욕망을 위해서 키치에게 요구하는 걸로도 해석할 수 <br>있습니다. 마치 나르시스가 자신의 욕망의 대상을 위해 (복종하듯)죽음 속으로 뛰어든 것처럼 말이죠 ...<br><br>그렇다면 사다는 사디스트(Sadist)인가?, 마조히스트(Masochist)인가? <br>죽는 건 키치입니다. 결과를 놓고 보자면 키치는 마조히스트이고, 사다는 이름처럼 사디스트라 <br>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동일시합니다. 미소년 나르시스와 호수에 비친 <br>아름다운 연인이 모두 하나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사디즘이 곧 마조히즘이고, <br>마조히즘이 사디즘입니다. ... 결국 키치를 목 졸라 죽인 사다는 물에 비친 자신을 얻기 위해 <br>물에 뛰어든 나르시스인 것입니다. 그리고 키치의 죽음으로 혼란스런 도착(perversion)은 멈추게 <br>됩니다. ... 그런데 이러한 도착관계는 아마존 부족들의 사냥하는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br><br>[◆ 동물의 몸을 찌르는 것이 성적 결합에 비유될 수 있다는 점에서 <br>사냥과 성적유혹 사이에는 공통된 개념적 연계가 있다. 아마존 강의 <br>상류지역에 사는 데사나족에게 “사냥한다는 것”은 “동물을 사랑하게 되는 것”을 <br>의미하기도 한다. ~ (중략) ~ 사냥꾼은 그냥 쏘기만 하면 된다. <br>사냥꾼 자신은 최소한 사냥 하루 전부터 금욕을 통해 성적으로 긴장상태에 <br>있어야 한다. 그는 육체적 청결, 의례적 정화, 주술적 주문과 얼굴 치장을 통해 <br>사냥감에게 구애할 수 있도록 자신을 아주 매력적인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br>- ( 샤먼 THE SHAMAN. / 32페이지 / 피어스 비텝스키 (Piers Vitebsky) / 창해) ]<br><br>인류학자이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수인 피어스 비텝스키(Piers Vitebsky) 교수는 <br>자신의 저서 “샤먼(THE SHAMAN)”에서 아마존 데사나족의 예를 들며 얘기합니다. <br>그들이 화살이나 창을 이용해 동물을 사냥하는 것은, 대상(사냥감)에 대한 파괴이자 동시에<br>그 대상(사냥감)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냥꾼은 <br>사냥 전에 자신을 최대한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어서 사냥감(동물)이 자신의(사냥꾼) 유혹에 <br>넘어올 수 있게 만드는 (샤먼적)의식을 치른다고 합니다.<br><br>여기서도 사랑(사냥꾼)은 죽음(사냥감)과 연계됩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br>사랑과 죽음의 극한은 필연적으로 한 점에서 만나게 되는 “은폐된 나르시시즘(Narcissism)”일 것이다.<br>~ 라고 말이죠! ... 화살과 창끝이 사냥감의 몸통을 관통하는 순간과 나르시스가 물속으로 뛰어드는 <br>그 순간에서 우리는 모종의 일체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대상에 대한 파괴가 <br>일어나지만 결국 이것은 죽음이 사랑으로 승화되는 과정인 것입니다. <br><br>주인 키치의 삽.입은 사냥꾼이 활과 창으로 동물을 찌르는 행위와 궤를 같이 합니다. <br>또한 이는 대상(사다, 사냥감)에 대한 명령과 같습니다. 그리고 명령에 대한 복종은 신음과 비명이<br>대신하고, 이 관계는 다시 전복되어 어느 순간부터는 사다의 신음이 명령으로 바뀌게 됩니다. <br>그리고 키치는 언어(좋아, 황홀해 ~)로 복종하며 죽음으로 마무리 됩니다. 결국 키치와 사다의 관계는<br><명령 – 복종 – 명령 - 복종 ... > 으로 이어지는 도착(perversion)적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br>순환관계인 것입니다. <br><br>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br>“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다! ” 라고 얘기합니다. ... 한마디로 인간은 <br>타인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타인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br><br>박근혜와의 위계적 경합에서 승리한 최순실의 욕망은 쟁취한 권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br>따라서 라캉의 욕망이론으로 들여다보면 최순실의 명령에 박근혜는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br>박근혜 본인의 욕망이 채워집니다. 한마디로 박근혜는 최순실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인 것입니다.<br>또한 박근혜는 자신의 복종을 명령으로 인식합니다. 최순실의 명령이 곧 자신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br>마치 호수에 비친 자신을 차지하기 위해 욕망이 시키는 명령에 따라 복종(호수로 뛰어듬) 하는 것처럼 <br>말이죠 .... <br><br>결론적으로 박근혜는 복종을 통해 안식과 위안을 얻게 되며, <br>복종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박근혜 본인의 “명령하는 권위”를 회복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br>도착(perversion)적 나르시시즘(Narcissism)입니다. 더불어 박근혜가 복종에 완벽성을 기하면 기할수록,<br>그 행위는 활과 창으로 사냥감의 심장을 찌르는 것이며, 물속으로 뛰어들고자 하는 나르시스의 욕망에<br>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욕망은 바로 최순실의 욕망이자 본인의 욕망이고, 그 끝에는<br>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도착(perversion)적 관계의 종말인 것입니다. (@ 주인 키치의 죽음처럼 ~ )<br><br>인간이 살아가면서 위험한 것은 불신일까? ~ 아니면 믿음일까?<br>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믿음이라고 답했습니다. <br>공감이 많이 가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이 대혼란 또한 어쩌면 박근혜와 최순실의 서로에 대한 <br>과도한 믿음 때문이 아니었나를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인지 심리와 정신의학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br>도착증이 타인들에게는 혐오로 비춰지지만, 당사자들은 자신들만의 즐거운 놀이라 생각한다고 합니다. <br>매우 이기적인 행복인 것이죠 ... <br><br>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br><br>1956년, 24살의 나이에 비평집 <아웃사이더>를 발표해서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된<br>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콜린 윌슨(Colin Henry Wilson)은 주로 인간의 심층적 의식을 다루는 <br>작품들을 발표해 왔었습니다. ... 그 중에 <잔혹, 피와 광기의 세계사> 라는 저서에 <br>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br><br>[◆ 범죄성이란, 선이 아닌 악으로만 달리는 이상한 성향은 아니다.<br>그것은 지름길을 택하려는 인간의 아주 유치한 성향이다. <br>어떤 범죄에도 “진열창을 때려부숴 귀중품을 약탈” 하려는 성격이 있다.<br>절도범은 갖고 싶은 것을 노동에 의해서 손에 넣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훔친다.<br>강.간범은 여자를 설득하여 뜻에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능욕한다.<br>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Freud, 1856~1939)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br><br>“아이에게 권력을 부여하면, 그 아이는 세계를 파괴할 것이다.”<br><br>프로이트가 의미하는 바는 이러하다. <br>"아이는, 완벽하게 주관적이다. 자기 감정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 <br>따라서 남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가 없다. ... 범죄자란 계속 아이처럼 행동하는 어른을 말한다." <br><br>- 잔혹, 피와 광기의 세계사 中 / 콜린 윌슨/ 하서 ]<br><br>최순실(최태민 일가) 이라는 장기지속의 자궁 속에서 무사유 상태로 배태되고 있었던 박근혜에게<br>알의 껍질을 부수며 새로운 세계로 향하려는 염원은 바로 호수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흐트러뜨리며 <br>물속으로 뛰어드는 나르시스(Narcisse)와 같습니다. 그래서 박근혜가 알의 밖으로 나오려는 시도는 <br>다시 알의 내부로 돌아가려는 도착(perversion)적 아프락사스인 것입니다.<br><br>알을 부수려는 가학(명령)과 알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피학(복종)의 이 혐오스런 도착적 유희는 <br>원래는 무사유의 알로서 하나에서 출발했으며, 외부와의 소통이 불가능한 ~ 그리고 영원히 <br>새가 될 수 없는 바로 “알” 자체의 상태인 것입니다. ... 그래서 박근혜의 아프락사스는 <br>남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없는 “아이처럼 행동하는 어른의 세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br><br><br>[◆ 뱀발 - 아큐정전과 광인일기로 유명한 <br>중국의 대문호 루쉰(魯迅)은 군중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br><br>"군중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면 군중은 제사를 지낸 후, 그의 살점을 산산조각 내어 뜯어 먹는다" <br><br>루쉰은 역사가 새롭게 창조되고 발전하려면 그 무게의 중심 추를 군중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br>각성하지 않고 배움의 의지가 없는 무지한 군중으로는 결코 개혁을 이루어 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br>그래서 루쉰은 군중의 계몽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정신적 개조와 함께 군중 개개인의 능력 배양이 <br>선행되어야만 혁명의 역량을 배가 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br><br>광화문 집회에 참가해본 경험에서 저는 아직 우리 국민들이 (무지한)군중이 아니라<br>현명한 "민중"이었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루쉰의 충고를 <br>조심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 그래서 군중과 민중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들에게 <br>저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 합니다. <br><br>"군중이라는 무리에 합류하여 그저 쏠림에 만족하는<br>파편 덩어리가 되지말고, 민중이라는 거대하고 숭고한 흐름 속에서 <br>제각각 깨어있는 독립된 의식덩어리가 되어라 ! "<br><br><br>[@ 글 읽어주신 분들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div> <div> </div> <div> </div> <div> </div>
    출처 http://issuein.com/index.php?mid=index&page=10&document_srl=5332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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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12/10 20:59:14  115.161.***.190  궁금해★  358504
    푸르딩딩:추천수 3이상 댓글은 배경색이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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