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94 관심있으신 분은 될 수 있으면 원문을 봐주세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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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야! 자본주의는 똑같지 않아"
자본주의는 ‘시장근본주의’와 동의어인가. 그렇다고 주장하는 이념이 바로 신자유주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자본주의에도 여러 형태가 존재해왔으며, 시장근본주의와 일정한 선을 그은 자본주의가 인간적인 동시에 더욱 효율적이었다는 증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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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 원래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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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와서 ‘자본주의의 다양성’이 최근 다시 문제가 된 이유를 살펴보자. 그 주요한 원인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도전이다. 19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가속화된 지구적 자본의 흐름과 이에 발맞춘 최소국가론(외부의 침범에서 국민을 보호하는 치안·방범·국방 부문 이외의 사회·정치·경제 영역에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사상), 탈규제, 시장 자유화, 복지국가의 종언 등은 다양한 자본주의가 공존했던 세계경제 질서의 토대를 허물었다.
* 자본주의의 다양성을 부인한 신자유주의
무엇보다 금융시장이 국제화되어 자본이 이 나라 저 나라를 마음껏 드나들게 되면서 ‘국가 관리하에 잘 규제되는 금융체제’란 옛이야기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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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90년대 초에 이르면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새로운 합의가 나타난다.
“이제 자본주의의 다양성이란 없다. 가장 이상적이고 효율적인 경제 제도인 시장의 자유를 극도로 허용하는 ‘우월한 자본주의’와 이를 억누르고 왜곡하는 ‘열등한 자본주의’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후자는 하루빨리 지금까지의 과오를 청산하고 자유시장을 성립시킬 수 있는 대규모의 제도적 구조조정을 감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를 정부와 국가가 추진하는 것은 그다지 효율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각 국가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구화의 물결을 전폭적으로 끌어안도록 개방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이 지구화에 실린 시장의 자연적 힘이 해결해줄 것이다. 요컨대 지구화를 통해서 모든 나라가 ‘하나밖에 없는 최선의 모델(one-best way)’로 수렴하게 될 것이며 또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하나밖에 없는 최선의 모델’이란 영국이나 미국의 사회경제 시스템을 지칭하는 것이다. 특히 미국은 역사적으로 국가가 경제 영역에 강력히 개입해왔음에도 이런 과거를 은근슬쩍 지워버렸다. 국제 학계마저 미국이 태초부터 자유시장이 지배해온 교과서적 자본주의 국가였던 것처럼 간주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자본주의의 다양성이라는 주제가 ‘새롭게’ 발견된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배경엔 미국식 ‘글로벌 스탠더드’를 앞세워 마구 밀고 들어오는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대한 정치적 저항이 짙게 깔려 있다.
* 제도는 ‘잘라서 붙일’ 수 없다
‘자본주의 다양성’ 논의를 부활시킨 효시는 미셸 알베르의 저작 <자본주의 대 자본주의>이다. 알베르는 미국식 자본주의가 단기 성과에 매몰되어 오히려 사회적·경제적 효율성을 해친다면서 독일 ‘라인강 자본주의’(노동자·자본가 등 다양한 이해관계의 제도적 조절을 운영원리로 삼는 사회민주주의 경향의 경제 시스템)의 장점을 부각시켜 파문을 일으켰다.
이런 선구적 업적에 힘입어 ‘자본주의 다양성’이란 주제는 다시 무수한 학술 논문과 저서의 주제로 떠오르게 된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프랑스판 제도주의라 할 조절이론 학파의 브와이에 등이 있다. 이들은 구체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여러 나라의 기업지배구조·산업정책·금융시스템·노사관계 등 각각의 영역에서 얼마나 다양한 조절 방식이 여전히 존재하며 또 여전히 생명력과 효율성을 유지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데 골몰했다. 유럽 사회경제학자 홀과 소스키스는 <자본주의의 변종들>에서 각 나라의 경제 시스템을 ‘시장에 내맡겨진 경우’와 ‘국가 중심의 조정에 무게를 두는 경우’로 크게 나눈다. 또한 특정한 제도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 경제의 다른 제도들과 보완하는 관계이므로, 특정한 제도 하나만을 가지고 효율성을 따질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즉 어떤 제도든 해당 국가의 전체 사회경제 시스템 차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후의 논객들은 ‘자본주의의 다양성’을 더욱 공격적으로 개진하게 된다. (신자유주의를 수용하기 전의) 일본이나 다른 유럽 국가의 경우를 보면, 경제성장과 효율성 측면에서 ‘국가 중심의 조정에 무게를 두는 경우’가 ‘시장에 내맡겨진 경우’에 못지않으며 오히려 우월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지구화의 물결이 닥쳐온다고 해도 각국 자본주의의 다양성이 사라질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심화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국의 ‘경쟁력 있는’ 제도에 더욱 의존하게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이런 논리들은 경제성장과 ‘효율성 높이기’라는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시장근본주의엔 빠지지 않으려는, 서구의 온건 좌파들에게 중요한 정책적·이념적 영감이 되고 있다. 그리고 마치 미국식 자본주의야말로 금과옥조나 되는 양 폭력적으로 관철되는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논의가 더 많이 도입되는 것이 균형을 되찾는 면에서나 실질적인 정책을 수립하는 점에 있어서나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에도 한계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결점은, 다양한 ‘자본주의의 변종’들이 나타나는 구체적인 사회적·역사적 과정에 대한 설명이 극히 취약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어떤 모델이 가지고 있는 여러 좋은 제도와 관행을 마치 ‘잘라와서 붙일(cut and paste)’ 수 있는 것과 같은 환상을 심을 수 있다. 특히 스웨덴·네덜란드 등 이른바 ‘좋은 모델’을 찾아 그 제도와 관행을 여과 없이 수입하는 데 급급한 편향이 곳곳에 보이는 한국 사회에서는 이 점을 잘 음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더욱 급한 것은 아마도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고유한 축적 메커니즘과 그 역사적 발전 경로에 대한 해명이며, ‘자본주의 다양성’ 논의의 수입도 이러한 주체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면 훨씬 더 큰 생산력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