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중간 중간 사진이 안 보이네요...</p> <p>링크 들어가셔서 보시면 좋겠습니다.</p> <p>------------------------------------------------<br></p> <p><br></p> <p><a target="_blank" href="http://jjreport.net/category/JJ%ED%86%A1!%20JJ%EB%A6%AC%ED%8F%AC%ED%8A%B8/%EC%99%81%EC%9E%90%EC%A7%80%EA%BB%84%20JJ%EB%84%A4%20%EC%9D%B4%EC%95%BC%EA%B8%B0" target="_blank"><font color="#0000ff">JJ톡! JJ리포트/왁자지껄 JJ네 이야기</font></a> </p> <p><br></p> <p><br></p> <p><strong>Daum은 대선후보 페이지를 별도로 마련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strong></p> <p><strong>후보에 대한 뉴스부터 여론조사 등 각종 선거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후보vs후보 메뉴가 재미있습니다.</strong></p> <p><strong>각 후보들의 살아온 행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strong></p> <p><br></p> <p><br><br><br><br></p> <p><br></p> <p><strong>그런데 문재인 후보의 인생타임라인이 좀 휑합니다.</strong></p> <p><strong>특히 인생의 가장 활발할 시기인 30-40대 활동이 텅 비어있습니다. </strong></p> <p><strong>그에 비해 안철수 후보의 30-40대는 빼곡한 활동들로 채워져 있습니다.</strong></p> <p><strong>문재인 후보의 청춘은 정말 텅 빈 것일까요?</strong></p> <p><br></p> <p><br></p> <p><br><br><br><br></p> <p><br></p> <p><br></p> <p><strong>문재인 후보의 청춘....그 서슬퍼렇던 시절로 돌아가보겠습니다.</strong></p> <p><strong> </strong></p> <p><strong>1980년 사법고시에 합격해 이듬해 김정숙씨와 결혼을 합니다. 이후 부산에서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를 시작합니다. </strong></p> <p><strong>변호사를하면서 부산민주시민협의회, 부산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직선제 개헌쟁취 변호사 서명운동, 민변 부산지역 모임 결성,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등 민주화를 위한 활발한 활동을 합니다. 그 근거지가 부산이었을 뿐입니다.</strong></p> <p><br></p> <p><br><br></p> <p><br></p> <p>1980 제22회 사법고시 합격<br>1981 김정숙 씨와 결혼 (슬하에 1남 1녀)<br>1982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 시작<br>1984 한국해양대학교 해사법학과 강사<br>1985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br>1987 부산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br>1987 직선제 개헌쟁취 변호사 서명운동 주도<br>1988 민주사회를 위한 부산지역 변호사모임 결성<br>1988 한겨레신문 창간위원<br>1989-2002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前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 부이사장<br>1992-2003 민주사회를 위한 부산경남 변호사모임 대표<br>1993 부산시 선거관리위원 <br>1994-2002 (사)노동자를위한연대 대표<br>1995 법무법인 부산 설립<br>1996 부산 YMCA 이사 </p> <p><br></p> <p><br></p> <p><br></p> <p><br></p> <p><br></p> <p> </p> <p> </p> <p><br></p> <p><br></p> <p><br></p> <p><strong>부산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지만 그것이 중앙(서울)이 아니었기때문에 기록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Daum이 안철수후보가 좋고, 문재인 후보가 미워서 그런것이 아니라, 문재인 후보의 청춘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저토록 휑한 인생 타임라인을 만들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strong></p> <p><strong> </strong></p> <p><strong> </strong></p> <p><strong>문재인후보는 본인의 저서 '운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strong></p> <p><strong> </strong></p> <p><strong>"6월항쟁은 전국적으로 전개된 민주화운동이었지만, 나는 그 운동의 중심을 서울이 아닌 부산으로 평가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부산에서 제일 먼저 국본을 결성했고, 기난 내내 시위를 가장 치열하게 전개해 타 지역 시위를 촉발시키는 역할을 했다. 보다 결정적으로는 명동성당 농성이 해산돼 서울 등 타지역의 시위가 급격히 위축됐을 때 부산에서 카톨릭센터 농성과 함께 더 많은 시민들이 더욱 치열하게 시위를 전개함으로써 항쟁의 불꽃을 되살렸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항쟁을 성공으로 이끈 원동력이 됐기 때문이다.</strong></p> <p><strong>그런 점에서 나는 6월항쟁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 있어 부산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서울지역 중심으로 서술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서울 중심 사고의 산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strong></p> <p><strong> </strong></p> <p><strong> </strong></p> <p><strong>문재인 후보의 휑한 타임라인을 보고, 후보의 지난 청춘을 더듬어보다가 문득 깨닫게되었습니다.</strong></p> <p><strong>기록조차 승자중심, 중앙중심, 서울중심이라는 것을. </strong></p> <p><strong>그리고 지금도 제대로 기록되고 있지 못해 알려지지 못하지만</strong></p> <p><strong>자신의 자리에서 좀 더 나은 세상,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위해 치열하게 살고 있는 수 많은 사람이 있을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strong></p> <p><br></p> <p><br></p> <p><br></p> <p><br></p> <p><iframe src="https://www.youtube.com/embed/qtpUatLF60k" frameborder="0"></iframe><br></p> <p><font color="#0000ff"><br></font></p> <p><font color="#0000ff"><br></font></p> <p><font color="#0000ff"><br></font></p> <p><font color="#0000ff"><br></font></p> <p><font color="#0000ff">//...........,</font></p> <p><br></p> <p><br></p> <p><br></p> <p><br></p> <p><br></p> <p>청춘 그리고 민주 라 함은....</p> <p><br></p> <p>청춘(靑春): 한창 젊고 건강한 나이. 또는 그런 시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p> <p><br></p> <p>한창 젊고 건강한 시절은 누구에게나 찾아 옵니다. </p> <p>누구나 명예와 부라는 욕망을 이루기 위한 가장 최적의 몸과 마음으로 노력을 합니다.</p> <p><br></p> <p>민주(民主) : 국민이 권력을 가짐과 동시에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는 정치 형태. 또는 그러한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 </p> <p><br>국민이 권력을 가짐과 동시에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는 정치는 누구에게나 찾아 올 수 없습니다.</p> <p>누군가는 부귀영화와 권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에게 맞서 싸우려는 투쟁과 희생이 필요한 것이죠.</p> <p><br>명예와 부를 가진 청춘은 부귀영화와 권력의 달콤한 맛에 빠져들 수 밖에 없고,</p> <p>명예와 부를 가지지 못한 청춘은 부귀영화와 권력의 쓴맛에 저항하려 합니다.</p> <p><br>조선 건국 이래로 600년 동안 권력에 맞서 권력을 한번도 바꿔보지 못한 우리역사</p> <p>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들 </p> <p>혹은 그런 진리를 내세워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전부 죽임을 당하고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하고 패가망신한 우리역사 </p> <p>600년간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전부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던..</p> <p>우리 역사 이기 때문이죠.</p> <p><br></p> <p>문재인에게 있어 청춘이라는 이름은 민주 입니다.</p> <p>명예와 부를 이룬 청춘이 그 달콤한 유혹을 벗어나 부귀영화와 권력에 맞서 소수의 사람들을 대변하고픈 민주 입니다.</p> <p>그의 청춘이 누구보다 밝고 빛나는 이유입니다.</p> <p><br>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그의 청춘을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p> <p>"빨갱이 새끼, 전라도 대변인, 지역분열주의자 김대중 똘마니, 좌파변호사 !"</p> <p>심지어 그가 살던 고향사람들에게서 핍박받고, 따돌림 당하고, 배척받은 뼈아픈 청춘이었지요.</p> <p>그럼에도 민주를 버리지 못하고 뚜벅뚜벅 한 걸음 한 걸음 내딘 청춘은 어느새 국회의원이 되고, 야권대선유력후보가 되었습니다.</p> <p><br>그의 노년,</p> <p>문재인에게 있어 노년이라는 이름은 무엇일까요?</p> <p>이제 우리가 그의 노년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줄 때 입니다.</p> <p><br></p> <p><br></p> <p><br></p> <p><br>아름답지 않게 살아온 내 청춘을 반성하며...</p> <p><br></p> <p><br></p> <p><strong>광주시민 여러분,호남 유권자 여러분. <br><br>저의 모든 과오를 짊어지겠습니다.그러나 한 가지,제가 가져갈 수 없는 짐이 있습니다.<br><br>저에게 덧씌워진“호남홀대” “호남차별”이라는 오해는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그 말 만큼은,제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치욕이고 아픔입니다. <br><br>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대한 모욕입니다.저와 당과 호남의 분열을 바라는 사람들의 거짓말에 휘둘리지 말아주십시오.그것만은 절대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br><br>엄혹했던5공 군부독재 정권 시절,부산의 민주화 </strong><strong>운동</strong><strong>은‘5월의 광주’를 부산시민들에게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br><br>1987년 6월항쟁 전야 5월,노무현과 제가 부산 가톨릭센터에서 연광주 </strong><strong>비디오</strong><strong> 관람회를 보려는 부산 시민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br><br>그 열기는6월항쟁으로 이어졌고,부산 가톨릭센터는 명동성당처럼 부산6월항쟁의 중심이 됐습니다.<br><br>이렇게 대한민국의 민주화는,호남과 호남 바깥 민주화 세력의 결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3당 합당으로 호남이 고립됐을 때도,그에 반대한 영남의 민주화 세력은 지역 내에서 전라도니 빨갱이니 핍박받고 고립되면서도 호남과 잡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br><br>저는 그 결합이 김대중 정부를 탄생시켰고,노무현 정부를 탄생시켰다고 믿습니다.<br><br>그것이 노무현과 제가 걸어온 길이었습니다.영남에서 지지 받지 못했던 노무현 대통령이었고,참여정부였습니다.그런데 정작 호남에서는 영남 패권주의라고 비난받는다면,그야말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br><br>물론 참여정부가,압도적인 지지로 출범시켜준 호남의 기대에 못 미친 점이 많았을 것입니다.대북송금 특검도 있었고,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분당도 있었습니다. <br><br>노무현 대통령이‘광주가 정치적인 고향’이라고 말할 정도로 호남을 사랑했어도,호남사람처럼 호남의 정서를 알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호남이 듣기에 섭섭한 말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결단코 호남 홀대는 없었습니다.오히려 역대 어느 정부보다 호남을 배려했다고 자부합니다.<br><br>호남과 호남 바깥의 민주화 세력을 이간하여,호남을 다시 고립화시키려는 사람들의 거짓말에 휘둘리지 말아주십시오.호남과 호남 바깥의 민주화 세력이 다시 굳건하게 손을 잡을 때만이,세 번째 민주정부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호남만으로도 안 되고,이른바‘친노’만으로도 안 됩니다</strong></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