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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sisa_457060
    작성자 : 쳇2
    추천 : 9
    조회수 : 5335
    IP : 14.36.***.99
    댓글 : 0개
    등록시간 : 2013/12/01 06:42:07
    http://todayhumor.com/?sisa_457060 모바일
    손석희 이야기 (스압)
    <span style="color: #333333; font-family: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333333969116211px; line-height: 17.98611068725586px">손석희는 서울 토박이 </span><br style="color: #333333; font-family: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333333969116211px; line-height: 17.98611068725586px" /><br style="color: #333333; font-family: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333333969116211px; line-height: 17.98611068725586px" /><span style="color: #333333; font-family: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333333969116211px; line-height: 17.98611068725586px">위로 누나 하나, 아래로 남동생 하나가 있다. </span><br style="color: #333333; font-family: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333333969116211px; line-height: 17.98611068725586px" /><br style="color: #333333; font-family: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333333969116211px; line-height: 17.98611068725586px" /><span style="color: #333333; font-family: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333333969116211px; line-height: 17.98611068725586px">직업군인이던 아버지는 그가 여섯 살 때 군복을 벗었다. </span><span class="text_exposed_show" style="display: inline; color: #333333; font-family: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333333969116211px; line-height: 17.98611068725586px"><br /><br />그해 여름은 유난히 가물었다. <br /><br />아버지는 양수기 판매업에 뛰어들었다. 가진 돈 다 털고 자그마한 집까지 잡혀 양수기를 사들였다. <br /><br />그걸 경기도 전곡 어딘가에 풀어놓았는데 이튿날 그만 큰물이 져 몽땅 떠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br /><br />그는 “이후 우리 식구들의 삶은 그 양수기 사건처럼 극적인 데가 있었다”고 했다. <br /><br /><br /><br /><br /><br /><br /><br />한번 자리잡은 가난은 쉬 떠나지 않았다. <br /><br />집을 잃은 그의 가족은 중구 필동의 한 양철담장집에 세를 들었다. <br /><br />거기서 그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보냈다. <br /><br />“제가 고집이 좀 셌어요. 2학년 통지표에 ‘이 학생 고집은 똥고집’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니까. <br /><br />또 제법 터프한 편이었는데, 근처 퇴계로 고아원에 살던 아이들이랑 주로 어울렸어요.” <br /><br />단지 ‘비슷하게 어려운 처지’여서 그랬던 것만은 아니었다. <br /><br />적산가옥에 사는 몇몇 아이를 빼곤 특별히 더 잘살 것도, 못살 것도 없는 살림이었다. <br /><br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 시절, 그는 이런 동류의식이 소리없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됐다. <br /><br />진원지는 새로 담임을 맡은 40대 여교사의 빈 커피병이었다. <br /><br />담임선생님은 도시락 반찬을 싸오지 않았다. 대신 아이들 도시락에서 반찬을 적절히 ‘빼앗아’ 먹었다. <br /><br />처음에는 빈 커피병 가득 김치를 거둬 먹고 남은 것은 싸 가지고 갔다. <br /><br />열흘 후쯤부턴 도시락 뚜껑에다 다른 반찬들까지 담았다. <br /><br />선생님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아이들의 도시락 반찬을 둘러본 다음 “누구, 누구, 누구는 도시락 들고 나와라. <br /><br />선생님하고 같이 먹자”고 한 것이다. <br /><br />이렇게 해서 그의 3학년 시절 급우들은 ‘선생님 책상 앞에 거의 늘 불려 나가는 아이들과 가끔씩 불려 나가는 아이들, 전혀 나가 <br /><br />보지 못한 아이들’로 세 동강이 났다. <br /><br />그는 비로소 가난을 알았다. <br /><br />그로 인한 설움과 자괴심, 억눌린 분노도 경험했다. <br /><br />필동 시절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br /><br /><br />그의 가족이 다음으로 옮겨간 곳은 성북구 보문동이었다. <br /><br />“거기 애들은 아주 조용하고 얌전하더군요. 저도 덩달아 그런 아이가 됐죠.” <br /><br />6학년 때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보문동 안에서도 몇 번 이사를 다닌 끝이었다. <br /><br /><br />온 가족이 저녁상을 물리고 며칠 전 마련한 TV 앞에 둘러앉아 있는데 천장에서 작은 흙덩이 몇 개가 후두둑 떨어졌다. <br /><br />전날부터 내린 비 때문인듯했다. <br /><br />날림으로 지은 한옥에서 빗물 새는 것쯤은 예사여서 처음엔 식구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br /><br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지는 흙의 양이 점점 많아졌다. <br /><br />어머니가 문득 말했다. “이러다 집 무너지는 거 아닐까?”<br /><br /><br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안방에 있던 가재도구를 마루로 옮기기 시작했다. <br /><br />담요로 장롱을 덮고 다음날 입을 옷가지를 챙겨 나온 직후, 굉음이 터져나왔다. <br /><br />거짓말처럼 정말, 천장이 무너졌다. <br /><br />다음날 아침 인부들을 불러 쏟아진 흙더미를 한참 파헤친 뒤에야 안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br /><br />그는 “거기서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을 봤다. 천장이 있어야 할 그곳에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있었다”고 했다. <br /><br />손석희는 이른바 ‘7·15 해방’ 세대다. <br /><br />입시가 아닌 추첨을 통해 중학교에 입학한 첫 세대라는 뜻이다. <br /><br />그는 우이동에 있는 서라벌중학교에 배정 받았다. <br /><br />그즈음 안암동으로 이사한 그는 미아리고개 너머 학교까지 버스 예닐곱 정거장 길을 꼬박 걸어 다녔다. <br /><br />차비 모으기에 재미가 들린 탓도 있었지만, 사실 더 좋았던 건 걷는 일 그 자체였다. <br /><br />그는 자신의 책에 ‘이제 막 자리 잡아가던 세상에 대한 내 사념의 방식도 그 혼자만의 오롯한 통학길서 상당부분 연마됐을 것’ <br /><br />이라 적고 있다. <br /><br /><br /><br /><br />②자존심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br /><br />3년을 걸어다니며 채운 두 개의 저금통을 깬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br /><br />조립식 전축 한 대와 레코드 두 장을 샀다. <br /><br />거쉰의 ‘랩소디 인 블루’, 만토바니의 영화음악집이었다. <br /><br />그는 “결혼해 새 전축을 들여놓기까지 15년 가까운 세월을 그 전축과 함께 살았다”고 했다. <br /><br />하지만 지금 그는 클래식 음악을 즐기지 않는다. <br /><br />음악회도 가지 않는다. <br /><br />“거기서 내가 만들어내야 할 가식적 분위기가 싫기 때문”이란다. <br /><br />비슷한 맥락에서 그는 정중한 언변으로 무장한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br /><br />“글쎄 뭐랄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 스타일을) 즐긴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br /><br />‘명문고 입학’을 지상 과제로 내건 학교의 교육방침 때문에 그의 중학교 시절은 숨이 막혔다. <br /><br />하지만 그는 조용히 감내했다. <br /><br />1학년 땐가 마침 교감 아들인 친구녀석 하나와 국기게양대 꼭대기에 교모를 걸어놓은 것이 일탈이라면 유일한 일탈이었다. <br /><br /><br />“다음날 아침 미아리고개를 넘어가는데 저 멀리 그 모자가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이 보이더군요.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죠.” <br /><br />그렇다 해서 그가 호락호락한 학생이었던 것은 아니다. <br /><br />“중학교 때 물상 선생님이 절 미워했어요. 이유는? 모르죠. 그냥 주는 거 없이 미운 사람도 있으니까. <br /><br />3학년 때였는데, 수업시간 중 옆자리 친구에게 ‘관성의 법칙이 뭐냐’고 묻다 딱 걸렸죠. <br /><br />잡담했다는 이유로 아주 세게 야단을 맞았어요.” <br /><br />그 주 일요일, 그는 아침 7시부터 자정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br /><br />“중학교 3년 물상교과서를 다 뗐어요. 밥도 가져다 달라해서 먹었죠. 그러고 나니 점수가 대폭 오르더군요. <br /><br />어린 나이였지만 자존심이란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를 깨닫는 계기가 됐죠.” <br /><br /><br />그는 지금의 현대 계동사옥 자리에 있던 휘문고등학교에 입학했다. <br /><br />모 명문공립학교 입시에 낙방한 다음이었다. <br /><br />입학식 후 며칠이 지나 그는 선배들에게 ‘찍혀’ 덜컥 방송반원이 됐다. <br /><br />“선배들 따라 방송실에 가보니 먼저 끌려온 송승환(현 PMC프로덕션 대표)이가 저 뒷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더라구요.” <br /><br />말이 방송반이지 시설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br /><br />마이크가 고장 나 잭에 헤드폰을 꼽고 방송을 할 지경이었다. <br /><br />하지만 이 때의 방송반 활동은 이후 그가 아나운서란 직업을 택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br /><br />중학 시절 2, 3년간 제법 피는가 싶던 집안 살림은 그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다시 가파른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br /><br />고교 신입생 시절, 그는 어머니와 함께 서대문구치소로 향했다. <br /><br />부도를 내 구속기소된 아버지가 거기서 재판을 받고 있었다. <br /><br />하지만 그는 아버지를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았다. <br /><br />오히려 그에게 아버지는 늘 삶의 준거가 돼 준 소중한 존재였다. <br /><br /><br /><br /><br />③가난, 우울하고 불안한 무엇 <br /><br />‘…아버지는 당신 앞에 나를 불러 앉히시더니 내게 법(法)자를 한자로 써보라 하셨다. <br /><br />물수(水) 변에 갈거(去), 물이 흐르는 이치대로 양심이 편한 쪽으로 행동하면 그것이 곧 법과 같다는 말씀이셨다.’ <br /><br />그는 에세이집에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 한 토막을 이렇게 풀어놓고 있다. <br /><br />그렇더라도 늘 가난에 옥죄인 생활은 우울하고 불안한 것이었다. <br /><br />고교 2학년 당시 그들 가족은 보문동 산비탈에 있는 방 두칸에, 부엌이 딸린 집에 살았다. <br /><br />그나마 방 하나는 홀로 남매를 키우는 아낙에게 세를 준 형편이었다.<br /><br />“세 든 집 가장이 간첩 혐의로 사형당했다는 소릴 들었어요. 그 전까지만 해도 제법 잘 살아서, 열두세 살 먹은 딸내미는 화동<br /><br />(국내외 귀빈에게 꽃을 전달하는 어린이) 활동도 했다 그러더군요.” <br /><br /><br />어느 맑은 여름 오후였다. <br /><br />그는 좁은 마당 한 귀퉁이에 있는 변소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br /><br />문이라고 달린 것이 나무 판자 몇 개를 대충 얽어놓은 모양새여서, 판자 틈새로 바깥 풍경이 훤히 내다보였다. <br /><br />“좀 있으려니 그집 딸이 와 똑똑 문을 두드리더군요. 사람 있단 표시 하자 문밖에서 가만히 기다렸어요. 그때 그 문틈으로 내다 <br /><br />뵈던 슬픈 눈매, 아이 눈동자 속으로 흘러 들어가던 흰 뭉게구름이며 누추한 동네풍경을 잊을 수가 없어요.” <br /><br />열여덟 소년이 아이의 눈에서 발견한 건 아마도 그 자신의 슬픔이었을 것이다. <br /><br /><br />“그랬겠죠. 그 무렵 식구들은 제게 ‘넌 조울증 기가 있다’는 말하곤 했어요. 이사가 워낙 잦고 생활도 부침이 많다 보니 일관성 <br /><br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죠. 때문에 때론 너무 쉽게 포기하고 때론 지나치게 뭔가에 집착하기도 했어요. 전 좌우명 같은 게 없지만 <br /><br />굳이 말하라면 ‘첫 마음을 지키자’라고 할까요. 환경에 휘둘렸던 기억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이쯤 얘기하고 보니 <br /><br />벌써 3시간이 지나 있었다. <br /><br />2차 인터뷰를 약속하고 여의도를 빠져나왔다. <br /><br />그를 두 번째로 만난 곳은 조용한 주택가의 한 커피숍이었다. <br /><br />그는 모자부터 방한복까지, 그야말로 온몸을 둘둘 감은 채 약속 장소에 나와 있었다. <br /><br />감기가 심한 줄은 알았지만 막상 그 모습을 보니 세게 물을 수도, 들을 수도 없겠구나 싶어 또 한번 맥이 빠졌다. <br /><br />하지만 어쩌랴, 대화는 시작됐고 그는 최선을 다해 주었다. <br /><br /><br /><br /><br />④“지 궁둥이로 덥힌 자리가 최고” <br /><br />손석희는 재수를 했다. <br /><br />그러고도 또 쓴잔을 마셨다. <br /><br />‘포기가 빠른’ 그는 미련없이 국민대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br /><br />1979년 ‘좀 편해보겠다고 타자 배워 간 군대’에서 그는 10·26, 12·12, 5·18, 삼청교육대 사건을 겪었다. <br /><br />근무지는 부산 군수사령부였다. <br /><br />다른 건들이야 그저 구경꾼일 뿐이었지만 ‘삼청작전’은 달랐다. <br /><br />실탄 없는 카빈총을 지급받은 그는 동료들과 함께, 광안리로 해운대로 다니며 몸에 문신한 이들을 잡아 모았다. <br /><br />당시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화인(火印)이 됐다. <br /><br />그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은 취업난이 극에 달한 때였다. <br /><br />국문과 출신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았다. <br /><br />그나마 언론사가 차별 없이 대등한 경쟁을 펼칠 수 있는 곳이었다. <br /><br />한 유력 일간지 총무부 사원으로 입사했다 진로를 바꿔 다시 MBC 입사시험을 쳤다. <br /><br />그의 말에 따르면 이는 “주체적이지 못한 선택”이었다. <br /><br />“넌 방송반도 했고 그 쪽에 잘 어울리니 (시험) 한번 봐 보라”는 친구들의 권유가 결정적이었다. <br /><br />1984년 그는 MBC 아나운서가 됐다. <br /><br />기자·PD직을 포함, 전체 수석 합격의 영예도 안았다. <br /><br />그에게 “수석이었다면서요” 하니 빙긋 웃으며 “NCND(긍정도 부정도 아님)”라고 답했다. <br /><br />친구들의 눈은 정확했다. <br /><br />그는 타고난 방송쟁이였다. <br /><br />입사 후 2, 3년이 지났을 무렵엔 가히 MBC를 대표하는 아나운서라 해도 손색없을 만큼 입지를 확실히 굳혔다. <br /><br />1986년에는 보도국으로 발령이 났다. <br /><br />기자가 된 것이다. <br /><br /><br />“당시 제가 맡은 프로가 5개였는데 그 중 3개가 뉴스였어요. 앵커 이미지가 워낙 강하니까 회사측에서 직종을 바꾸는 게 어떨까 <br /><br />생각한 거죠. 보도국 분이들야 잘 대해주셨지만 전 불만이었어요. 왠지 제 자리가 아닌것 같고, 무엇보다 사람은 지 궁둥이로 <br /><br />덥힌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1989년 다행히 아나운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죠.” 그는 “아나운서가 기자직 발령이 <br /><br />나면 마치 업그레이드된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시각”이라고 말했다. <br /><br /><br /><br /><br />⑤생방송 중 볼펜을 집어던짐 <br /><br />어떤 이의 삶에나 ‘특별한 순간’은 있다. <br /><br />손석희에게는 일요일이던 1988년 8월21일 저녁 9시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br /><br />가슴에 ‘공정방송’이란 글귀가 쓰인 리본을 달고 ‘뉴스데스크’를 진행한 것이다. <br /><br />서울올림픽을 목전에 두고 사회 분위기가 급변하던 그때, MBC 노조는 정부의 방송관련법 개악에 맞서 쟁위발생 신고를 했다. <br /><br />방송할 때를 포함해 조합원 모두 가슴에 ‘공정방송’ 리본을 달기로 했다. <br /><br />8월20일 토요일 오전 9시30분, 조합원은 물론 경영진까지 촉각을 곤두세운 가운데 첫 ‘리본 패용 방송 출연자’가 등장했다. <br /><br />주부대상 교양 프로그램 리포터로 나선 이장호 이현경 아나운서였다. <br /><br />다음 생방송 진행자는 ‘낮 뉴스’ 앵커인 김성호 아나운서. 그 또한 방송시작 직전 리본을 달았지만 곧 빼앗기고 말았다. <br /><br />주말 ‘뉴스데스크’ 진행을 맡고 있던 그는 속이 탔다. <br /><br />시청자의 시선이 집중되는 프로그램인 만큼 파장도 클 것이 확실했다. <br /><br />방송 시작 직전까지 갈등하던 그는 ‘기억하는 한 가장 수치스럽고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했다. <br /><br />리본을 양복 깃이 아닌 안쪽 와이셔츠 주머니 위에 단 것이다. <br /><br /><br />방송 종료 뒤 누구도 그를 나무라지 않았지만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자괴심에 빠졌다. <br /><br />밤새 한숨도 못잔 그는 다음날 아침 아내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br /><br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달고 나갈 거야.” 그리고 그렇게 했다. <br /><br />노조 집행부는 혹 그가 리본을 빼앗기는 일이 생길세라 스튜디오 문을 지키고 고함을 질러댔다. <br /><br />카메라맨들은 그가 달고 있는 리본이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도록 열심히 앵글을 잡았다. <br /><br />이로써 그는 직업인으로서, 또 방송인으로서 양심을 훌륭히 지켜낼 수 있었다. <br /><br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별 탈 없이 방송활동을 해나가듯 보이던 그가 또 한 번 국민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심는 사건이 생겼다. <br /><br />1992년 10월 파업투쟁 중 노조 집행부 일원으로 일하다 몇몇 동료와 함께 영등포구치소에 구속수감된 것이다. <br /><br />‘MBC 간판스타’인 그가 푸른 수의 입고 수갑과 포승줄에 겹겹이 묶인 모습은 강한 연민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br /><br />파업 정당성 알리기에 여념이 없던 노조로서는 이 같은 ‘손석희 효과’를 외면할 수 없는 일이었다. <br /><br />그 또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조용히 인정했다. <br /><br />오히려 그가 걱정한 것은 “한 일도 없는데 무슨 민주 투사라도 되는 양 대접받는 것”이었다. <br /><br />때문에 그는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야말로 노조활동으로 인해 가장 큰 수혜를 받은 사람”임을 거듭 강조했다. <br /><br />자신에게 노조활동은 “안 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던 일”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br /><br />혹자는 열성적이었던 노조활동을 들어 그를 이상주의자 혹은 선동가적 기질이 다분한 이로 볼지 모른다. <br /><br />하지만 그는 오히려 매우 ‘프랙티컬(practical)’한 사람이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br /><br /><br />그는 “결국 선택의 문제”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고 했다. <br /><br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건 모두 ‘선택’인 거죠. 실수란 선택을 잘못한 것이고요. 그럼 실수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br /><br />잘못한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해야죠. 전 그래서 제가 간 길에 대해 실수란 표현을 잘 쓰지 않아요. 일종의 자기합리화인데, 제 <br /><br />자신을 평가하는 덴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고 보거든요.” <br /><br />이야말로 실용적 자세다. <br /><br />이미 지나간 일, 선택해버린 것에 대해 땅을 치고 후회하는 것은 비생산적 방식이다. <br /><br />“난 포기가 빠른 사람”이라 말하는 이면엔 아마도 ‘내가 포기한 건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일 뿐’이란 생각이 깔려 있을 것이다. <br /><br />하여 프랙티컬한 사람들은 과거보다 ‘지금 이 순간’을 생각한다. <br /><br />구구한 언설보다는 문제해결을 위해 ‘지금 당장 할 일’을 고민한다. <br /><br />“그러니까 ‘이거 실수다’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전력 다해 만회할 길을 찾는 거지요. 잘한 선택은 그것이 잘한 일임을 증명하기 <br /><br />위해 애쓰고, 나쁜 선택은 그게 결과적으론 잘된 선택이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고. 이래저래 에너지가 상당히 많이 <br /><br />드는데, 하여튼 전 몇 십년을 그렇게 살아왔어요.” <br /><br />프랙티컬한 사람들은 의외로 눈 앞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는다. <br /><br />작은 거짓, 사소한 편의 도모가 훗날 치명적 약점이 돼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br /><br />또한 원칙에 충실한데, 그것이야말로 내적 갈등으로 인한 시간 낭비를 줄이고 직업인으로서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는 데 유용한 <br /><br />길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br /><br />손석희는 성공한 방송인이길 원했다. <br /><br />성공한 방송인은 시청자에게 신뢰받는 방송인이다. <br /><br />신뢰받는 방송인이라면 당연히 공정 방송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br /><br />그는 그렇게 자신의 소망과 자신에게 부여된 직업인으로서의 소명, 시청자의 바람을 합치시키려는 노력을 통해 나름의 행복을 <br /><br />추구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 <br /><br />시사 프로에 적합한 방송인이 되기 위해 기울여온 프랙티컬한 노력을 통해, 냉정하고 절제력 강하며 자기관리 뛰어난 언론인의 <br /><br />이미지를 확고히 하게 됐다. <br /><br />이는 그의 실제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 뵀다. <br /><br />하지만 그는 자신에 대한 세간 평 가운데 도무지 동의할 수 없는 게 ‘차분하다’ ‘냉정하다’ ‘절제력 있다’는 류의 것이라고 했다. <br /><br />인상비평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br /><br /><br />“절 아는 사람들은 그래요. 방송 듣다보면 네 성격 나올까봐 조마조마하다고. 저도 사람이니 인터뷰 도중 성질나는 일이 아주 <br /><br />없을 순 없죠. 지난번엔 너무 화가 나 볼펜을 집어던지기도 했어요.” <br /><br />때론 방송 중 크고작은 ‘모험’을 시도한다. <br /><br />방송 종료를 30초쯤 남겨놓고 그가 인터뷰이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지면 스튜디오 밖에서는 난리가 난다. <br /><br />“하지만 제 생각은 ‘방송시간은 금싸라기처럼 쓰자’는 거거든요. 개인적 멘트는 빼고 30분을 기름 쫙 빠진 Q&A(질문과 답)로 꽉 <br /><br />채우자….” <br /><br /><br /><br /><br />⑥“영향력? 내년엔 밀릴 수 있다” <br /><br />그의 라디오 인터뷰는 언제나 긴장이 넘친다. <br /><br />그의 설명대로라면 “말을 잘 못하기 때문에 실수를 피하려 훈련한” 간결한 어조가 그런 분위기를 배가한다. <br /><br />하지만 단지 그뿐이라면 청취자의 반응이 그처럼 열광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br /><br />그의 방송은 뜨겁다. <br /><br />철저히 중립자요 질문하는 자이지만, 그 안엔 ‘상식’을 향한 열정과 ‘이해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있다. <br /><br />또한 방송시간은 시청자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란 강력한 동기부여하에, 인터뷰이를 향한 가차없는 질문 공세를 멈추지 않는다. <br /><br />또 다른 장점은 상대의 얘기를 참 ‘잘 듣는다’는 것. <br /><br />잘 듣고 핵심을 집어내 한두 마디로 정리해낸다. <br /><br />내용을 요약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뷰이의 속내와 발언의 논리적 모순까지를 일거에 드러내는 방식이다.<br /><br />이렇게 그는 가슴 저 깊숙이 ‘불’을 품은 채 방송을 한다. <br /><br />시청자들은 그 불의 존재를 분명히 느낀다. <br /><br />언뜻 보면 그의 방송과 이미지엔 개성이 없어 뵌다. <br /><br />하지만 완벽을 향한 몰두, 좋은 방송에 대한 뚜렷한 소신이야말로 그의 색깔이다. <br /><br />하지만 그라고 해서 ‘안티’가 없을 순 없다. <br /><br />그를 비난하는 네티즌들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말이 바로 “과대포장됐다”는 것이다. <br /><br />그는 “미디어가 인물을 담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포장은 시작되는 것”이라 맞받아쳤다. <br /><br />“그런데 전 22년을 미디어에 노출돼 왔어요. 저에 대한 이미지가 어떻게 잡혀 있든, 그것은 제가 노력을 통해 지켜온 것입니다. <br /><br />TV 속 이미지와 ‘현실의 나’ 사이 괴리 줄이기 위해 애써 온 거죠.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그런 노력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면 <br /><br />아마 지금의 전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겁니다. 또 하나, 과대포장이란 지적 뒤에 아마 아나운서직에 대한 편견이 숨어있을 <br /><br />거예요. 준비된 원고를 읽기만 하는 사람이라거나…. 하지만 아나운서들과 하루만 같이 생활해보면 그것이 오해임을 알게 될 <br /><br />겁니다. 아나운서는 저널리즘의 굉장히 다양한 분야를 체험하는 사람들입니다. 폭넓은 실전 경험을 통해 내공이 쌓이지요. <br /><br />물론 자신의 핵심 이미지는 지켜나가려 노력해야겠지만요.” <br /><br />그렇다면 그는 직종의 경계를 뛰어넘은 자신의 거대한 영향력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br /><br />“우선 감사하죠. 제가 맡은 프로가 한밤중에 하는 ‘100분 토론’, 새벽에 하는 ‘시선집중’ 둘인데, 모두 프라임 시간대하곤 거리가 <br /><br />멀잖아요. 그럼에도 좋은 평가 해주시니 정말 감사하고. 또 이건 겸손의 말이 아니라, 방송이라는 게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br /><br />결코 아니거든요. 그렇게 두루 고마운 마음이 반이라면 나머지 반은 굉장한 부담감이예요. 그 ‘영향력’이란것이 (방송)콘텐츠에 <br /><br />어떤 왜곡을 불러오진 않을까, 무슨 오해라도 받지 않을까 늘 걱정되고요. 예를 들어 좀 더 세게 말하고 싶은 부분도 주저하게 <br /><br />되거든요. 그래서 내린 결론이, 감사하긴 하나 얽매이지는 말자는 거예요. 또 내년엔 밀릴 수도 있는 거잖아요. 사실 이런 식의 <br /><br />순위 매기기 자체가 굉장히 상업주의적인 거거든요.” <br /><br />손석희는 1997~99년 가족을 모두 데리고 미국으로 훌쩍 유학을 떠났다. <br /><br />마흔 넘어 과감히 현업을 떠나는 ‘대형사고’를 친 것이다. <br /><br />“1992년 파업으로 구치소에 들어가 있을 때였어요. 그 위로 비행기 길이 나 있는데, 운동시간 20분 동안 뒷마당에 나가 있으면 <br /><br />비행기가 굉장히 낮게 날아와요. 그걸 보며 생각했죠. 여기서 나가면 저 비행기를 타고 어디론가 멀리 가서 살고 싶다…. 그런 <br /><br />꿈을 계속 갖고 있다 마침내 실행에 옮긴 거죠.” <br /><br /><br /><br /><br />⑦유학 시절의 눈물 <br /><br />처음 목적은 공부도 아니었다. <br /><br />그저 모든 걸 딱 멈추고 쉬고 싶었다. <br /><br />회사에서 1년만 갔다 오라는 걸 ‘자비연수 주제에’ 굳이 2년을 고집했다. <br /><br />쉴 바에야 확실히 쉬자는 결심이었다. <br /><br />“그래놓고 결국 코피 터지며 공부만 하다 왔죠. 뒤늦게 한 국제 민간재단에서 장학금을 받게 된 것이 계기였어요.” <br /><br />하지만 그에게 강한 동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br /><br />그는 토플 공부부터 다시 시작해, 미네소타대 대학원에서 기어이 저널리즘 석사학위를 따고 말았다. <br /><br />마침 요즘 인터넷에선 그가 유학 생활을 회상하며 쓴 ‘지각 인생’이란 제목의 글이 인기를 끌고 있다. <br /><br />글 말미는 이렇다. <br /><br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무모했다. 하지만 그때 내린 결정이 내게 남겨준 것은 있다. 그 잘난 석사학위? 그것은 종이 한 장으로 <br /><br />남았을 뿐, 그보다 더 큰 것은 따로 있다. 첫 학기 첫 시험 때 시간이 모자라 답안을 완성하지 못한 뒤 연구실 구석으로 돌아와 <br /><br />억울함에 겨워 찔끔 흘렸던 눈물이 그것. 중학생이나 흘릴 법한 눈물을 나이 마흔셋에 흘렸던 것은 내가 비록 뒤늦게 선택한 <br /><br />길이었지만 그만큼 절실하게 매달려 있었다는 방증이었기에 내게는 소중하게 남아있는 기억. 혹 앞으로도 여전히 지각인생을 <br /><br />살더라도 그런 절실함이 있는 한 후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br /><br /><br /><br /><br />⑧“MBC의 자유로움은 공영방송 보루” <br /><br />요즘 그의 맘은 어둡다. <br /><br />평생을 몸담아 온 직장 MBC가 큰 어려움에 처한 때문이다. <br /><br />그는 “내가 기억하는 한 MBC가 이처럼 국민의 미움을 받은 적은 없었다”며 “MBC가 쌓아온 역사성마저 한순간에 묻혀버린 것 <br /><br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br /><br />그는 MBC의 게이트키핑 기능에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세간의 지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br /><br />“게이트키핑이라는 게 여러 층위에서 논의가 가능하거든요. PD·기자·아나운서 등 최일선에서 이루어지는 것부터 그 위의 부장, <br /><br />국장선까지. 개인 수준의 게이트키핑은 기본적으로 이루어지는거고, 그렇다면 조직 차원의 게이트키핑은 어떠냐는 건데…. <br /><br />기본적으로 MBC시스템은 개인 통제 조정하는 것 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껏 그것이 굉장한 순기능으로 작용해왔고”<br /><br />그는 “사영방송이라면 대주주, 경영진의 생각이 밑바닥까지 작용할 거다. <br /><br />하지만 공영방송은 그래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br /><br />“공영방송에서는 모든 논의가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보건 보수이건 다 담아낼 수 있어야지요. <br /><br />MBC 라디오를 쭉 들어보면 프로마다 방향과 생각이 제각각이거든요. 그런 다양성 통해 청취자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보장 <br /><br />해야지요. 그것이 공영방송의 도리라 생각합니다.” <br /><br />그는 “(MBC란) 조직내 다원화가 시청자에겐 좋은 것일 수 있다”며 “이번 ‘PD수첩’ 파문 역시 역기능의 증거가 될지 순기능적 <br /><br />측면에서 재평가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라고 밝혔다. <br /><br />하지만 그는 궁극적으로는 대중을, 네티즌을 믿는다고 했다. <br /><br /><br />“모두 사필귀정이죠. 가는 길이 바르다면 대중과 영원히 안맞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믿음 없다면 어떻게 방송 하겠어요.” <br /><br />호감도와 신뢰도가 높은 방송인인 만큼, 그에 대한 정치권의 ‘입질’이 시작된 것은 벌써 10여 년 전부터의 일이다. <br /><br />그 또한 “관심 없다”는 의견 표명을 되풀이한 지 10년이 넘었다. <br /><br />“전 지금 제가 좋아하는 일하고 있습니다. 방송이 체질에 맞고 그런 면서 참 운이 좋은 편이라 생각해요. 운 좋은 건 한 번으로 <br /><br />족하지 두 번 그럴 수는 없을 겁니다. 또 일단 그 동네로 가면 굉장히 부지런해야 하고 만나기 싫은 사람도 만나야 하잖아요. <br /><br />저랑은 영 안 맞지요.” <br /><br /><br />사실 손석희는 인간관계의 폭이 꽤나 좁은 사람이다. <br /><br />사교적이지 않은 성격 탓도 있지만, 시사프로 진행자인 만큼 객관성 공정성 견지하기 위해 불필요한 인간관계 만들지 않겠다는 <br /><br />생각 때문이다. <br /><br />술도 거의 마시지 않고 골프도 치지 않는다. 이렇다 보니 오랜 친구들과 관계마저 요즘에 와선 차츰 소원해지고 있다 했다. <br /><br />‘좋은 시사 프로 진행자’가 되기 위해 그가 지급한 것 중에는 가족과의 곰살궂은 정 나누기도 있다. <br /><br />그에게는 후배 아나운서이던 아내 신현숙씨와 고등학생, 중학생인 두 아들이 있다. <br /><br />“사람의 집중력이란 게 한계가 있나 봐요. 새벽방송에 집중하고 일주일에 며칠은 ‘100분 토론’ 준비에 바치다 보니 다른 쪽으런 <br /><br />영 신경이 안 가는 거죠. 덕분에 사적인 부분에 대한 집중도는 형편없어요.” <br /><br />뿐인가, 그는 스스로를 ‘강퍅한 인간’이라 표현했다. <br /><br />일밖에 모르기 때문이란다. <br /><br />“그러다 회사 그만두고 나면 심심해 어쩌려느냐”는 걱정을 미리 해주는 이가 적지 않단다. 그도 이미 오십 고개를 넘어 장년 <br /><br />(長年)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br /><br /><br /><br /><br />⑨“쉰 나이 받아들일 자존심은 있다” <br /><br />“새벽마다 회사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사무실로 올라가죠. 복도를 따라 걷다 커브를 돌면 엘리베이터가 나오는데, 매일 <br /><br />똑같은 생각을 해요. 이 커브를 몇 번이나 더 돌 수 있을까….” <br /><br />해서 “나이 먹는 것이 두렵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재미있는 답이 돌아왔다. <br /><br />“쉰이란 나이를 받아들일 정도의 자존심은 있다”는 것이었다. <br /><br />“마흔이고 싶고 서른이고 싶지는 않아요. 추해지는 거죠. 제가 원래 포기가 빠르다 그랬잖아요.” <br /><br />어느새 약속한 2시간이 다 지났다. <br /><br />아직 채 듣지 못한 것이 많아 적이 답답했다. <br /><br />“어, 목이 또 잠기기 시작하는데요” 하며 ‘겁’을 주는 그가 얄밉게 느껴졌다. <br /><br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어쨌거나 다 합쳐 대여섯 시간 열심히 수다 떨고 나니 첫 대면 땐 보이지 않던 그의 ‘미중년’다운 특징이 <br /><br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br /><br />그가 들으면 불쾌해할지도 모르나, 그에게는 분명 ‘품격 있는 따스함, 권위를 살짝 위반하는 귀여움, 자기만의 개성을 극단으로 <br /><br />밀어붙인 섹시함’ 같은 것이 존재한다. <br /><br />다만 그가 혼신 다해 구축하고 유지해 온 방송인으로서 삶과 이미지가 ‘자연인 손석희’의 열정적이고 감성적인 면모 효과적으로 <br /><br />제어하고 있을 뿐이었다. <br /><br /><br />10년 전, 그는 ‘나이 쉰에 나는 무엇을 보여줄까’란 글을 쓴 적이 있다. <br /><br />그 글서 손석희는 20일 남짓한 영등포구치소 생활 중 만난 ㄱ씨 이야기를 하며 ‘그가 출감할 때인 10년 후, 나는 그에게 무엇을 <br /><br />보여줄 것인가’를 자문하고 있다. <br /><br />아마도 그는 답을 찾은 듯하다. <br /><br />그는 ‘꼰대’도 되지 않았고 ‘배불뚝이’도 되지 않았다. <br /><br />대신 미소년보다 되기 어렵다는 ‘미중년’이 됐다. <br /><br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끝)<br /><br /><br /><br /><br /><br />⑩'손석희 매니아'는 왜 생기는 것일까?<br />아나운서 손석희는 군더더기가 없는 사람이다. <br /><br />그의 멘트는 목표물을 향해 공중에서 일직선으로 내리 꽂히는 매를 연상시킨다. <br /><br />그만큼 간략하고 정확하다.<br /><br />'말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 중 손석희처럼 언어의 절제미를 보여주는 사람도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br /><br />그런 연장선상서 그의 절제된 이미지와 깔끔한 진행,그가 지닌 합리성과 논리적 비판에 매료되어 그의 팬을 자처하는 '손석희 <br /><br />매니아'도 적지 않다. <br /><br />그들이 보여주는 애정의 강도는 단순한 스타와 팬의 관계를 뛰어 넘는다. <br /><br />매일 아침 출근길에 그의 방송을 즐겨 듣는다는 한 청취자의 편지는 손석희에 대한 호감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br /><br />"고교생이 된 내 아이가 '어머니, 제가 어떤 인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까?'하고 자주 묻곤 하는데 저는 주저없이'손석희씨같은 <br /><br />인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할만큼 손석희씨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그런 정도다. <br /><br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종류의 사연은 수없이 많다.<br /><br />손석희의 무엇이 자식에게 삶의 한 전범으로 제시하고 싶을만큼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일까. <br /><br />단순히 그의 곱상한 외모와 조리있는 말솜씨때문이라고 하기엔 그들이 손석희에게 보내는 각별한 의미가 너무 무겁다. <br /><br /><br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br /><br />손석희는 현재 문화방송 아나운서국 2부장으로 재직 중인 40대 후반의 방송인이다.<br /><br />텔레비전에 얼굴을 내민지 20년이 되어 가는 사람이니 이력으로만 놓고 따지면 그의 명성과 호감도를 이해못할 바도 없다. <br /><br />단순노출 효과 이론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시청자는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인물에 대해서 친근감 나타내고 그래서 그 인물은 <br /><br />텔레비전에 더 자주 나오게 된다고 한다. <br /><br />자주 보는 인물에 대해선 어느 정도 예측을 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긴장을 하지 않아도 되므로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다. <br /><br />그러니 손석희처럼 한때 하루에 5개 프로그램을 진행할 정도로 노출이 많았던 사람에게 대중들이 어느 정도의 호감을 보이는 <br /><br />건 당연하다.<br /><br />방송의 최종 전달자로서의 아나운서라는 그의 직업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br /><br />예전에는 아나운서 시험에 떨어진 사람이 '그럼 하다못해 PD라도 시켜달라'는 얘기도 있었다지만, 스타 PD라는 말이 어색하지 <br /><br />않은 요즘에는 그런 에피소드가 전설의 고향처럼 들릴 수도 있다. <br /><br />그러나 아직까지도 대중들의 인식 속에는 아나운서가 방송인 중 가장 화려하고 친근한 직종으로 각인되어 있다. <br /><br />지난해 3월 'MBC스페셜'은 대우자동차 직원 1750명의 해고사태를 공정한 시각에서 다룬 내용을 방영했다. <br /><br />그 프로그램에서 손석희는 담당 PD의 강권에 의해 나래이터 역할을 담당했는데, 어느 해고노동자는 손석희에게 편지를 보내 <br /><br />이 프로그램이 천군만마의 도움을 주었다고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단다. <br /><br />그에 대한 손석희의 말은 이렇다. <br /><br />"내가 받을 인사는 아니다. 넘치는 오락과 드라마 속에서 '반란'을 일으킨 'MBC스페셜' 제작진이 받아야 할 인사다"<br /><br />나도 손석희의 그러한 생각에 동의한다. <br /><br />손석희는 단지 1-2시간 정도만 그 프로그램에 투자했을 뿐이지만 시청자들은 손석희=프로그램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br /><br />아나운서에 대한 대중의 인식도 그와 비슷하다. <br /><br />어떤 고참 아나운서는 "언제나 시청자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는 자세"로 말하는 아나운서가 최고의 프로라고 강조한다. <br /><br />그런데 손석희의 명성과 호감도는 이런 전통적 의미의 아나운서로서의 역할을 통해 얻어진 게 아닌 듯 하다. <br /><br />손석희는 변웅전의 너털웃음식 소탈함이나 차인태의 다재다능함, 보는 사람 단번에 무장해제 시켜 편안하게 만드는 김동건의 <br /><br />천재성 등과 같은 전통적인 아나운서의 이미지와는 궤를 달리 한다는 말이다. <br /><br />그건 마치 음악성 자체를 중시하는 조용필과 음악을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를 중시하는 정태춘의 차이 같은 것이다. <br /><br />그는 후자쪽이다.<br /><br />언젠가 손석희는 '방송 핵심이 이미지라면 아나운서에게도 일정분야의 전문가적 이미지가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런 <br /><br />논리에 따른다면 손석희는 많은 시청자들에게 뉴스 전문진행자로 알려져 있다. <br /><br />그가 처음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 심어준 '1분뉴스'를 시작으로 한동안 문화방송 뉴스프로그램 진행 거의 독점하다시피 진행할<br /><br />만큼 뉴스와 손석희는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br /><br />입사 3년차부터 만 2년 동안은 아나운서로는 최초로 보도국 기자로 발령을 받아 아예 내놓고 뉴스만을 전담하기도 했다. <br /><br />손석희 자신은 그 이유를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깨끗한 이미지 풍기는 것 같아서 시청률이 올라갔기 때문일 것"이라고 웃어 <br /><br />넘기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br />나는 그 이유를 손석희가 'here & now'를 중시하는'지금 여기서의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br /><br />그것은 또한 앞서 언급한 손석희 매니아들과 관련된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br /><br />⑪'지금 그리고 여기(Here & Now)' 의 인간형<br />정신의학에서 'here & now'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br /><br />자신의 '지금 그리고 여기'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깨닫게 하는 것이 정신분석치료의 한 목표일 정도다. <br /><br />얼핏 정신치료의 궁극적 목표라는 게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here & now'를 인식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br /><br />아니다. <br /><br />예를 들어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와 느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가 있을 경우, 그녀는 자신 앞에 있는 <br /><br />남자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느끼지 못하는 셈이다. <br /><br />그녀는 자신의 'here & now'를 왜곡해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br /><br />이런 일들이 삶의 구석구석에 얼마나 많이 배어있는지 모른다. <br /><br />비단 대인관계에서 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내적 'here & now'를 인식하기기는 더 힘들다. <br /><br />지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히 아는 사람이 드문 것도 그런 이유다. <br /><br />정신치료의 역사 보더라도 프로이드 시대에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통해서 나오는 '과거'에 그 사람을 설명하는 핵심키가 담겨 <br /><br />있다고 믿었다. <br /><br />과거지향적인 치료방식이다. 그러나 현대 정신의학에서는 'here & now'를 더욱 중시한다. <br /><br />현재 그 사람의 말과 행동, 그리고 대인관계 패턴안에서 그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br /><br />그러니까 자신의 'here & now' 정확히 인식하고 그에 따라 최선 다한다는 건 심리적으로 꽤나 성숙한 사람일 때 가능한 일이라<br /><br />할 수 있다.<br /><br />그런 면에서 손석희는 'here & now'형 인간에 가깝다.<br /><br />과거를 무시한다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하고 있고, 할 수 있는 일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인지한다는 뜻이다. <br /><br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손석희 방송을 보고들을 때마다 그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느낌을 <br /><br />전달받는다.<br /><br />방송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는 느낌, 핵심 통찰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그의 말은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진정으로 알고 싶은 것, <br /><br />말하고 싶은 것들에 대한 통로가 되어 준다. <br /><br />당연히 손석희의 방송은 색깔이 뚜렷하다. <br /><br />특별히 뉴스나 시사프로그램을 많이 진행해서가 아니다. <br /><br />지난 93년 노조활동의 여파로 손석희는 9개월만에 방송에 복귀했는데 뉴스전문 진행자로 굳어있던 그가 교양프로그램을 맡자 <br /><br />일부 신문들은 '변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손석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br /><br />"프로그램의 성격에 맞춰 표현의 방법을 달리하는 것은 '변신'이 아니다. <br /><br />프로그램의 내용이나 형태의 차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송에 대한 나의 자세와 방향성이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닐까. <br /><br />나는 그것들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그게 바로 손석희의 색깔이다. <br /><br />그런 뚜렷한 색깔에도 불구하고 손석희가 비교적 편향성 시비에 시달리지 않는 건 메시지 전달자로서의 그의 일관된 태도다. <br /><br />손석희는 방송 입문후 부터 지금까지 뉴스는 객관성이 최고의 덕목인만큼 개인 퍼스낼리티는 가급적 '죽이는' 것이 좋다는 생각<br /><br />해왔다고 말한다. <br /><br />대부분의 뉴스진행자가 뉴스를 외워서 진행하려고 하는데 자신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도 뉴스에서 <br /><br />진행자 개인이 부각될 필요가 없어 보인다는 판단에서라는 것이다. <br /><br />2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앵커에 복귀하면서도 미국식 스타시스템 비판하면서 "앵커 개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건 바람직<br /><br />하지 않다고 봅니다. <br /><br /><br />예를들어 손석희라는 진행자의 말을 믿게 하기보다는 MBC를 신뢰하도록 하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요"라고 말한다. <br /><br />또한 토론 프로그램에 있어서도 사회자의 역할을 최소화해서 사회자가 아예 없는 듯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br /><br />문화방송 간판 진행자로서 입지가 확고한 사람의 배부른 소리라 삐딱하게 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러한 손석희 태도가 자기가 <br /><br />하고 있는 일의 전체적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데서 오는 절제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br /><br />그렇게 스타성이 많은 진행자이면서도 그에대해 '튄다'라는 표현이 거의 없다는 게 한 증거일 것이다.<br /><br />튀지는 않지만 인간 손석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방송인 손석희와 너무 다른 그의 이미지 때문에 놀라기는 한다고 한다. <br /><br />담백하고 진지한 이미지, 깨끗한 마스크에 차분한 분위기, 편안한 인상과 다정다감한 목소리 등이 방송인 손석희의 이미지인데 <br /><br />현실세계에서는 영 딴판이라는 것이다. <br /><br />실제로 손석희는 자신이 '절제된 형식주의'너무나 싫어하는 사람이라서 클래식 음악회 가식적 분위기 때문에 클래식 공연장에 <br /><br />가지 않으며,호사스럽게 꾸며놓은 식당이나 카페에 가면 몸에 맞지않는 옷을 입었을 때처럼 불편하고, 자신이 상소리를 잘하는 <br /><br />한 이유로 깨끗하고 정중한 언변으로 무장된 사람을 인간적으로 믿지 않는 때문이라고 말한다. <br /><br />또 그는 옷에 돈쓰는 걸 제일 큰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대학다닐 때 줄곧 한 가지 옷만 입고 다녀서 친구들이 그의 옷을 <br /><br />'교복'이라고 불렀을 정도고 방송국에 입사해서도 네 벌의 옷으로 1년을 버틴 적도 있단다. <br /><br />하지만 손석희 직접 만나본 적이 없는 일반 시청자 입장에서는지난 92년 문화방송 파업당시 손석희가 보인 격렬한 노조활동을 <br /><br />보면서 손석희의 이미지와는 전혀 딴판인 또다른 손석희를 만났을 것이다. <br /><br />노조집행부 간부였던 손석희는 불법파업주동자로 몰려 '쟁의조정법 위반 및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되어 20일 간 구치소에 수감<br /><br />되었다가 회사측의 소송취하가 있고나서야 석방되었다. <br /><br />방송초기 '아도니스형 미소년'이라고까지 불리던 손석희의 곱상한 이미지에 익숙해 있던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그 사건이 좀 <br /><br />'느닷없게' 느껴졌을 것이다. <br /><br />손석희는 지금도 당시의 일을 회상하는 걸 불편해 한다.<br /><br />그때 행동을 후회해서가 아니라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닌데 자신이 마치 민주투사나 된 듯이 생각해주는 게 부담스럽단 것이다. <br /><br />심지어는 자신이 노조활동으로 인한 가장 수혜자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br /><br />그로인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애정과 관심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br /><br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br /><br />하지만 나는 그의 노조활동 또한 손석희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데서 연유한 것이라고 믿는다. <br /><br />'공정방송' 쟁취는 깨끗한 이미지 지니고 있는 아나운서 손석희보다 우선하는,방송인 손석희 지켜내기 위한 최소한의 권리이자 <br /><br />의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br /><br />문화방송에 노동조합이 생겼을 때 '덜컥' 가입원서를 냈던 손석희는 왜 노조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br /><br />"이건 아주 단순한 문제입니다. 노조를 안 할 수 있는 명분이 없습니다.운동가까지는 못되더라도 직업으로서 최소한의 양심, <br /><br />소시민적 도덕성을 지키려만 해도 노조활동은 불가피합니다"<br /><br />하지만 노조에 얼굴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주위사람의 만류를 받을만큼 유명세가 있었던 손석희 입장에서 확실히 쉬운 결정은 <br /><br />아니었을 것이다.<br /><br />당시 쟁의투쟁위원으로 구속된 손석희 면회기 실은 10월 7일치 문화방송 노조 파업투쟁 속보의 내용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br /><br />수 있을 것이다. <br />"누가 이 연민의 정을 불러 일으킬만한 선한 인상의 미남청년을 투사로 만들었는가. 타락한 세상서 숨죽이고 조용히, 적당히 <br /><br />살았더라면 세속적 인기와 일상의 안일함 속에 두 다리 뻗고 살 수 있었을텐데...."<br /><br />⑫원래 쉬운 건 안하는 남자<br />이 대목쯤에서 손석희의 노조활동을 너무 미화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할 수도 있는 사람에겐 현재 방송에서 손석희가 전달<br /><br />하는 노사관련 멘트를 유심히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br /><br />무턱대고 노조의 편 들거나 약자의 감정적 대응을 촉발하지는 않지만 '지금은 파업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다'라는 따위의 무책임<br /><br />하고 저질스런 멘트를 남발하지도 않는다. <br /><br />아마도 손석희는 1992년 10월7일 문화방송 민주의터서 자신을 비롯한 쟁의투쟁위원들의 구인을 막기위해 수백명의 사복경찰과 <br /><br />맞서 싸운 정혜정, 김현경, 정보영, 황선숙을 비롯한 문화방송 조합원들의 피눈물나는 전투장면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br /><br />시청자의 입장에서 그가 그 사실을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환기시켜주면 된다. <br /><br />그것으로 족하다. <br /><br />정치적인 관점에서 사회자의 편향성을 문제삼는 사람들에 대한 손석희의 대답은 이렇다. <br />"저는 어떠한 정치적 당파성으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무색무취하단 것이 아니라 전방위로 비판적이란 것을 <br /><br />의미합니다"손석희는 원래 기자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br /><br />중학생 시절 아는 사람이 기자였는데 기사 잘못 썼다고 어딘가에 끌려가서 맞고 왔다는 말을 들은 직후였는데 그 이유가 희안<br /><br />하다.<br /><br />"기자가 기사를 잘못 썼다고 맞나? 누가 때리나? 불현 듯 기자가 되고 싶었어요"손석희의 방송국 후배 한 사람은 손석희가 '그 <br /><br />어려운' 김종서 노래를 즐겨 부른다면서 원래 쉬운 건 안하려는 성격이라고 말했다는데,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br /><br />손석희는 단정한 외모와 정확한 멘트, 위기 처리능력이 뛰어나 텔레비전 뉴스서 뉴스, 재난방송, 대형 특집 프로그램 등 생방송<br /><br />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을 도맡아 진행하는 사람이다.<br /><br />어렵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발휘되는 방송인 손석희의 순발력이나 순간 집중력은 당대 최고라는 평가다. <br /><br />시사평론가 유시민은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을 진행한 손석희를 보면서 감탄했다고 말한다. <br /><br /><br />손석희는 0.5초 이내에 직관적 판단을 내리고 시청자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사람들로부터 끌어냈다는 것이다. <br /><br />현재 9시 뉴스를 진행하는 김주하 앵커도 돌발뉴스에 강한 손석희의 순발력에 경탄하면서 "위급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가장 <br /><br />이성적인 멘트를 할 수 있는손석희처럼 그런 앵커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br /><br />타고난 재능이기도 하겠지만 'here & now'에 강력한 집중력을 보이는손석희의 성향을 보여 주는 한 증거일 수도 있을 것이다. <br /><br />손석희는 유난히 '좋은 방송'을 강조한다. <br /><br />그만한 유명세가 있으면서도 프리랜서 되지 않는 한 이유도 돈 더 받을 순 있어도 당장 '좋은 방송'이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니기 <br /><br />때문이란다. <br /><br />그는 '좋은 방송'을 만들기 위해선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한다.<br /><br />방송 초창기 르포형식의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을 때 그는 이따끔 카메라도 자신이 들고 다녔다고 털어 놓는다. <br /><br />방송용 카메라는 제법 무거워서 카메라맨이 그걸 하루종일 들고 다니면 힘이 빠져 좋은 그림이 안 나올 것 같아서였단다. <br /><br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좋은 방송'의 기준은 무엇일까.</span> <div><span class="text_exposed_show" style="display: inline; color: #333333; font-family: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333333969116211px; line-height: 17.98611068725586px"><br /></span></div> <div><span class="text_exposed_show" style="display: inline; color: #333333; font-family: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333333969116211px; line-height: 17.98611068725586px">출처: 페북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606066142761766&set=a.187135357988182.33187.100000751582810&type=1&theater</span></div> <div><span class="text_exposed_show" style="display: inline; color: #333333; font-family: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333333969116211px; line-height: 17.98611068725586px"><br /></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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