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hW-aeZ3VPJA" frameborder="0"></iframe><br></div> <div><br></div> <div><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zkX3reQxFJ0" frameborder="0"></iframe><br></div> <div><br></div> <div>제주 4.3사건 70주년</div> <div><br></div> <div>*1948년 4월 3일 ~ 1954년 9월 21일</div> <div>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div> <div>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div> <div><br></div> <div>과정=></div> <div><br></div> <div>*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 행했던 삼일절 기념 대회를 열음</div> <div> 3만명 이상 읍면 단위까지 포함 제주도 인구의 5분의1 이상이 모인 엄청난 인원이 모임</div> <div><br></div> <div> => 일제 강점기 당시 제주도를 군사요새화 하려는 일본인 들에게 심하게 강제노동 재산탈취등</div> <div> 심하게 착취를 당했던 생각에 나온사람</div> <div><br></div> <div> => 해방이후 3년동안 미군의 지배를 받았었는데 주민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 정책을 핌에 따른 반발</div> <div><br></div> <div> (과거부터 화산섬으로 땅이 척박하여 많은 사람들이 떠나던 땅 일제 시대의 수난은 참담했고 해방이 되자 사람들이 제주도를</div> <div> 살려보자는 목적아래 청년들이 모여들어 교육시설 치안확보등 자치활동 시작함</div> <div> </div> <div> 해방직후부터 바로 미 군정과 충돌한 다른 지역과 달리 원만하게 공존하던 하였으나 인구가 증가하고 역대급 흉년이 연타를</div> <div> 치던 와중 미군정은 공출제도를 부활시켜 척박한 중산간 마을에서 해안 마을과 똑같은 곡식을 가져가는 등</div> <div><br></div> <div> 일제강점기 때 의 독립 운동가들을 잡아 족치던 친일 경찰들을 그대로 고용하던 등의 안그래도 오랜 핍박에 힘들어하던 주민들의</div> <div> 사정을 봐주지 않는 정책을 핌에 주민들의 불만을 쌓아감)</div> <div><br></div> <div><br></div> <div> => 국민학교 선생들이 앞장 선 일이지만 3.1절 기념 행사를 하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어 3.1절을 진심으로 축하하고자 나온 사람 </div> <div><br></div> <div>*집회가 끝나갈때 쯤 한 경찰이 타고 지나가는 말에 어린 아이가 치이는 사고가 일어남 무시한 채 가버리는 경찰에게 사람들이 거세게 항의하자</div> <div> 경찰들을 시위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한다고 판단 사람들을 향해서 무차별적으로 사격을 가함</div> <div><br></div> <div> =>초등학생과 젖먹이 아이를 안고 있었던 20대 엄마를 포함해서 6명이 죽었고 8명이 크게 다침</div> <div><br></div> <div>*경찰들은 되려 시위 군중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제주도에 통행 금지령을 내리고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을 체포하기 시작</div> <div> 그리고 육지에서는 수백 명의 경찰 지원병력을 내려보냄</div> <div><br></div> <div>*경찰의 뻔뻔한 행태에 항의해서 도민들은 3월 10일 부터 중앙정부의 사과(3.1 시위 당시 경찰 발포에 대한 사과와, 책임자의 처벌,</div> <div> 유가족의 지원 등)를 요구하는 민권 합동 총파업을 열음</div> <div><br></div> <div>*미군종과 경찰들은 도민의 요구를 무시하며 파업에 참가한 사람들을 남조선 노동당에 선동된 좌익 세력으로 몰고감</div> <div> (미군은 제주도를 좌익 본거지라고 규정)</div> <div> (남조선노동당이 이 파업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활을 한 거는 맞으나 파업이 주장하는 바는 지극히 상식적)</div> <div><br></div> <div>*그 당시 파업에 경찰들을 해산시켜버리고 그 자리를 육지에서 온 서북 청년단 강경파 인물들로 채움</div> <div> </div> <div> =>서북 청년단 : 해방 정부때 활동했던 극우 청년 단체, </div> <div> 떼를 지어 몰려다니면서 빨갱이, 좌익을 잡는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맘대로 패고 죽이고 강간하던</div> <div> 사실상의 테러단체</div> <div> (이승만 정권은 서북 청년단을 내려보내며 아무런 지원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서북청년단은 제주도민들을 약탈하며 자급자족 함)</div> <div><br></div> <div>*그 와중에 신임 도지사로 유해진이라는 사람이 왔는데, 그 사람도 극우 성향의 사람으로 도민들의 의견은 안중에도 없고, 강경진압을 지지함</div> <div><br></div> <div>*1948년에 경찰에 끌려간 젊은이 3명이 연달아 고문에 의해 죽는 사건이 벌어짐</div> <div><br></div> <div>*그 사건으로 분노한 남조선 노동장 제주도당이 중앙당의 의견과 관계없이 단독으로 무장투쟁을 벌이기로 결정함</div> <div><br></div> <div>*1948년 4월 3일 남로당을 주축으로 한 300여명의 무장대가 경찰서와 우익 인사의 집을 습격하면서 봉기의 시작을 알림(무장대 총책:김달삼)</div> <div><br></div> <div>*미군정이 파견한 김익렬이라는 사람은 사태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무장대와 협상을 시도 했는데 경찰의 방해공작(메이데이 사건)으로</div> <div> 인해 평화협상에 실패하게 됨</div> <div> </div> <div> =>메이데이 사건 : 경찰이 일부러 민가에 불을 지르고 무장대가 그랬다고 거짓 증언을 하게 만든 사건</div> <div><br></div> <div>*사태가 악화되는 과정에 5.10총선거가 다가옴</div> <div><br></div> <div> **5.10총선거 (재헌 국회의원 선거) : </div> <div><br></div> <div>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치룬 선겨였고, 여기서 뽑힌 국회의원들이 초대 대통령도 뽑고, 헌법을 만들기 때문에 중요한 선거였음</div> <div> </div> <div> =>대한민국은 그당시 아직 정부가 없는 상태 였기 때문에 그래서 통일된 정부를 누가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놓고 많은 갈등을 격고 </div> <div> 있던 중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선거가 가능한 남한 지방에서 만이라도 먼저 선거를 열자고 주장</div> <div> (일단 남한만의 정부를 먼저 세우자는 것)</div> <div> </div> <div> =>그 당시에도 38선을 기준으로 남쪽에는 미군. 북쪽에는 소련군이 나누어 주둔을 하고 있었지만, 이 분단이 언제까지나 계속 될거라고</div> <div>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이승만의 이러한 주장은 이 분단을 쐐기를 박는 주장이었기 때문에 김구, 김규식 등을 포함한 </div> <div> 분단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선거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 </div> <div><br></div> <div> =>남로당 무장대도 이선거를 반대하는 세력이었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선거를 방해함</div> <div> (주민들을 산으로 보내서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거나, 투표소에 불을 지르는 행동을 벌임)</div> <div> </div> <div> =>남로당과 상관없는 많은 주민들도 민족 분단에 반대하면서 투표에 참여하지 않음 </div> <div><br></div> <div>*결국 제주도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5.10총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지역이 되었고. 이승만은 그 사실에 분노</div> <div><br></div> <div>*1948년 11월 17일 이승만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초토화 작전이라고 불리는 강경 진압을 시작함</div> <div><br></div> <div> =>토벌대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아이 노인 포함 제주도민들을 학살하며 인간으로 하기 힘든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div> <div> </div> <div> =>총살자의 가족에게 총살 당하는 사람을 보면서 만세를 부르며 박수를 치게 하고 처형 대상이 없으면 그 가족을 죽여버리는 일도 생김</div> <div><br></div> <div> =>민가를 급습하여 아들과 아버지를 대리게 만든다던지 아내를 잡아 겁탈을 하고 상해를 하는등</div> <div><br></div> <div> =>무장대인 척 슬쩍 잠입해서 주민들에게 도와달라고 하고 그 주민들이 도와주면 바로 죽여버리는 함정 토벌.</div> <div><br></div> <div> =>주민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학살해버리는 관광 총살도 많이 일어남</div> <div><br></div> <div> =>심지어는 토벌대가 심심풀이로 주민들을 상대로 사살 연습까지 벌였다고 함</div> <div><br></div> <div> =>남로당 무장대도 주민들을 학살하는 데 한 축중 하나였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주민들이 토벌대에 의해서 희생됨</div> <div><br></div> <div> =>방화로 중간산 마을의 95&가 사라지고 이렇게 죽은 희생자들은 3만명~8만명 그 중 어린이와 노인의 비율이 12%에 이른다고 함 (생지옥)</div> <div> 한국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큰 사건임</div> <div><br></div> <div>*1948년에 시작된 4.3사건은 6.25전쟁을 거처 1954년이 되어서야 겨우 수그러들음 그러나 그 후에도 제주도민들은 빨갱이라는 </div> <div> 누명을 쓰고 힘든 시간을 보냄</div> <div><br></div> <div>*2000년에 이르서야 4.3사건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2003년에는 공식 보고서가 채택됨 </div> <div>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회생자와 유가족들에게 공식으로 정부 차원의 사과를 함</div> <div> 2008년에는 평화공원이 세워졌고 2014년에는 4.3이 국가 추념일도 지정됨</div> <div><br></div> <div>*그러나 아직까지 피해배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고 국정교과서로 인해 교육이 잘 이루어 지지 않았기 때문에 4.3사건을 아는 사람이 적고, </div> <div> 여전히 4.3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단순하게 치부하는 사람도 많음</div> <div><br></div> <div>*올해 제주 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가 결성되어서 4.3의 추가 진상 조사와 피해자와 유가족, 공동체의 피해 회복,4.3의 제 이름 찾기 등등</div> <div> 여러 과제와 목표를 설정해서 활동한다고 함</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 <div style="text-align:left;"><im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804/15227516777a099532ee9d44f7b42c5e794689b934__mn760540__w617__h541__f68866__Ym201804.jpg" width="617" height="541" alt="01.jpg" style="border:none;" filesize="68866"></div> <div style="text-align:left;"> <div style="text-align:left;"><im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804/15227516944cd0e66285e24f13a9b01fa10ea50117__mn760540__w628__h725__f105517__Ym201804.jpg" width="628" height="725" alt="02.jpg" style="border:none;" filesize="105517"></div><br></div><br></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