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0000ff" size="4"></font> <div style="text-align:left;"><img width="0" height="0" alt="83-2.jp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712/1514445368ff1e73c386d841b1aa91b6d623e8e477__mn463027__w170__h249__f9133__Ym201712.jpg" filesize="9133"></div> <div>[언론권력] 나치부역 언론인엔 '관용'이 없었다</div> <div> </div> <div><font color="#0000ff" size="4">(중략)</font></div> <div>1940년 히틀러 군대에 점령당한 지 4년 만인 44년 8월 파리가 해방되자 프랑스는 즉각 `정의의 법정'을 세우고 나치 부역자 단죄에 나섰다. “나라가 애국자에게는 상을 주고 반역자에게는 벌을 주어야 비로소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다”는 것이 망명정부 `자유 프랑스'를 이끌었던 샤를 드골 장군의 신념이었다. 프랑스 전역에서 부역자 색출작업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99만여명의 나치협력자가 투옥되고 이 중 6700여명에게 사형, 2700명에게 종신강제노동형, 1만여명에게 유기 강제노동형, 2만2800여명에게 징역형이 선고됐다. 또 9만5천여명에게는 부영죄형을 선고하고 7만여명의 공민권을 박탈했다. </div> <div><font size="6">눈여겨 볼 것은 이렇게 단죄받은 나치부역자 가운데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엄중하게 `정의의 심판'을 받은 사람들이 지식인, 특히 언론인이었다는 사실이다.</font> </div> <div><font size="6">프랑스의 법정은 언론인 중에서도 애초부터 `히틀러의 나팔수'를 자임했던 파시스트보다 독일의 지배가 확립되자 뒤늦게 나치 선전원으로 돌아선 `매춘 언론인'을 더 가혹하게 처벌했다. </font></div> <div><font size="6">“<font>언론인은 도덕의 상징이기 때문에 첫 심판대에 올려 가차없이 처단해야 한다</font>”는 것이 드골이 밝힌 `최우선 가중처벌'의 이유였다.</font> </div> <div><strong><font size="6"></font></strong> </div> <div><strong><font size="6">일간 <오늘>의 정치부장 조르주 쉬아레즈는 “프랑스를 지켜주는 나라는 독일뿐”이라고 한 기사와 히틀러의 관대함을 찬양한 기사를 쓴 대가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총살형에 처해졌다.</font></strong> </div> <div> </div> <div><font size="6"><strong>일간 <누보 탕>의 발행인 장 뤼세르는 신문협회 회장을 지내면서 반민족 언론인들의 사상적 지도자 노릇을 했다는 혐의로 사형 및 재산몰수형을 받았다. </strong></font></div><strong> </strong> <div><strong> </strong></div><strong> </strong> <div><font size="6"><strong>독일에 `간과 쓸개'를 내놓았던 <르 마탱>의 편집국장 스테판 로잔은 20년 징역형을 받았다. </strong></font></div><strong> </strong> <div><strong> </strong></div><strong> </strong> <div><font size="6"><strong>그 밖에 독일방송의 선전문을 작성했던 폴 페드로네, 독일 점령 기간중 <라디오 파리> 해설가로 이름을 날린 장 헤롤드-파퀴, 36살의 작가 겸 언론인 로베르 브라지야크 등이 민족반역자로 사형대에 올랐다. </strong></font></div><strong> </strong> <div><strong> </strong></div><strong> </strong> <div><font size="6"><strong>이와 함께 나치 찬양에 적극적·소극적으로 나섰던 언론사도 모두 문을 닫아야 했다. </strong></font></div><strong> </strong> <div><strong> </strong></div><strong> </strong> <div><font size="6"><strong>독일 점령 기간중 15일 이상 발행한 신문은 모두 나치에 협력한 것으로 간주해 폐간시키고 언론사 재산을 국유화했다. </strong></font></div><strong> </strong> <div><strong> </strong></div><strong> </strong> <div><font size="6"><strong>그리하여 900여개의 신문·잡지 가운데 649곳이 폐간되거나 재산을 전부 혹은 일부 나라에 빼앗겼다. </strong></font></div> <div> </div> <div><font size="6">일간지 가운데 처벌을 면한 것은 <르 피가로> 등 3곳뿐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나치점령기 동안 자진휴간함으로써 민족의 양심을 지킨 신문들이었다. </font></div> <div> </div> <div>프랑스의 친나치 언론 단죄와 관련해 <프랑스의 대숙청>을 쓴 언론인 주섭일씨는 “드골의 언론계 대숙청으로 해방 후 오늘날까지 프랑스 언론은 각계 각층 국민의 의사를 공정하게 대변하는 공공성을 확보하게 됐고, <르 몽드> 같은 세계가 존경하는 신문도 언론개혁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또 <font size="6">“프랑스의 언론인 숙청은 단순히 반민족세력의 처단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거듭하는 <font>부도덕한 인간들이 언론을 주도해서는 안 된다</font>는 뜻도 담고 있다”</font>고 강조한다. </div> <div> </div> <div><div style="text-align:left;"><img width="599" height="605" alt="i12491609701.jp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712/1514445489e59282a5ad874617aeca79348a306c76__mn463027__w599__h605__f44210__Ym201712.jpg"></div></div> <div> </div><br><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