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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readers_36534
    작성자 : 15번지
    추천 : 1
    조회수 : 397
    IP : 59.25.***.105
    댓글 : 0개
    등록시간 : 2021/12/10 11:4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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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왕의 목을 벤 다음날 - 3.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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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궁전

     

     

     

    역시 어젯밤 일은 진짜였어! 봤어, 난 봤다고! 유성우가 쏟아지는 걸 봤어! 맞아, 맞아, 어제의 그 불기둥은 분명 테누아스님의 흔적이야! ! 우리 마을에서 그 전설의 용사가 탄생하다니! 산골 마을에 용사라니!”

     

    조용한 산골 마을 벨드리안의 아침을 열어젖힌 소리는 군인들의 군홧발 소리가 아니었다. 동네 미치광이가 아리안의 집 앞에 늘어선 군인들을 보고 지른 소리가 신호탄이었다. 평소에도 닭의 울음소리 대신 미치광이의 노랫소리를 기상나팔로 삼았던 마을주민들은 하나, , 현관을 열고 나와 아리안의 집 앞으로 모여들었다.

     

    닥쳐, 이 미치광이야! 어디 그런 이야길 사냥곰 앞에서도 해보시지!”

     

    사냥곰은 마을 사람들이 아리안을 부르는 별명이었다. 실제 곰만큼이나 덩치가 좋고,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센 장사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따라붙은 별명이었다.

     

    사냥곰? , 아기의 아비라면 지금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하오. 어서들 그를 돌봐주시구려. 그리고 지금처럼 용사가 어쨌다거나, 전설이 어쨌다거나 하는 소리가 들린다면, 여기 마을부터 소각할 거요. 그러니 모두 함구해야 서로가 좋다는 걸 잊지 말아 주시오.”

     

    모여든 마을주민들을 향해 검은 머리의 하후현이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활짝 웃어 보였다. 그의 눈썹 위 흉터가 묘하게 일그러지며 지어진 미소는 주민들의 마음에 공포를 심어주기에 딱 알맞았다.

     

    그런 숨이 막히는 상황 속에서도 자유로웠던 건 오직 미치광이 한 명뿐이었다. 하후현과 그의 부하들이 테오나 왕국의 궁전에 닿기도 전에 다이아라 반도의 남동쪽 일대는 전설의 용사가 탄생했다는 소문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성해지는 소문 속에서 벨드리안의 사냥곰, 아리안은 가슴의 상처를 치료하고 아내의 장례를 치렀다.

     

    상처가 아무는 대로 궁궐의 담벼락을 넘겠소.”

     

    그가 아내의 관을 덮으며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다. 그의 나지막한 다짐을 장례식에 참여한 모두가 들었지만, 감히 누구 하나 나서서 말리지는 못했다. 성난 사냥곰의 앞발은 분명하게 테오나 왕국의 수도로 향해 있었다.

     

    테오나 왕국의 수도, ‘테누오빈은 다이아라 반도의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본래 테오나 왕국의 수도는 동쪽의 해변과 인접한 곳으로, 수도의 이름 역시 테누아스 신이 내려와 쉬는 곳이라는 뜻의 테누오빈이 아니라, 선원들이 뭍에서 취하고 즐긴다는 뜻의 베로데포라는 항구 도시였다. 왕국의 수도를 내륙의 중앙으로 이전하여 새로운 대도시를 건설한 건 초대 황제의 강력한 의지였다.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다이아라 반도를 통일한 이후에 가장 처음으로 내린 결정으로, 절대권력자의 위엄을 만천하에 내세움과 동시에 드넓은 반도를 효율적으로 통치하려는 방편이었다.

    그 결과 다이아라 반도 역사상 그 어떤 통치자들도 감히 이루어내질 못할 업적들을 살아 있는 동안에 성취할 수 있었다. 반도의 패권 장악과 수도 이전, 관료의 재정비, 율법과 세제 정비 등 테오나 왕국의 모든 사업 기반은 초대 황제에 의해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절대권력. 오늘보다 내일이 더 굳건해질 수 있는 국가의 바탕. 그건 황제의 초인적인 능력이나 흡수된 국가들의 헌신 같은 게 아니었다. 기념비적인 모든 업적은 테누아스 교단이 처음부터 황제와 함께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립된 반도에 뿌리 깊게 박힌 신앙이라는 건 절대적인 권력이자 모든 것의 기준이었다.

     

    유성우가 내리는 날에 원인불명의 불기둥이 솟았다?”

     

    초대 황제가 승하하고 일백여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그간 왕권은 대를 이어 세습되었고, 황제들과 함께 권세를 누렸던 교황들도 순서만 달랐을 뿐, 차례로 숨을 거두어 교단 내에서도 몇 번의 즉위식이 있었다.

    하후현이 띄운 전서구를 직접 전달받은 건 교황 라투에르였다. 라투에르는 초대 황제 승하 이후, 네 번째로 교황 자리에 즉위한 인물로 이미 깊게 팬 주름을 온몸에 두른 백발노인이었다.

     

    라투에르는 주변을 모두 물리고 한동안 밀실에 머물렀다. 의자에 앉은 채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몇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그가 수족처럼 다루는 여러 장기 말 중 하후현은 각별한 존재였다. 다른 부하들에 비해 처리 방법은 다소 투박한 편이었지만, 명령에 관한 이해력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원인불명의 불기둥이 솟았다라고 직접 보고를 했다는 건 드디어 오랜 시간 지켜보며 염려하던 일이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는 걸 말했다.

     

    라투에르는 선대와 선대, 그리고 그 선대의 선대 교황 때부터 비밀리에 전해 내려온 이야기를 빠짐없이 떠올리기 위해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긴 시간 동안 라투에르의 시선이 머문 곳이라고는 검은 윤기가 흐르는 책상과 책상 위에 놓인 촛불, 그리고 좁은 창틈으로 드나드는 비둘기와 그 비둘기의 발에 묶인 전서구가 전부였다.

     

    문제의 아기 확보 완료. 분대 단위 병력과 함께 테누오빈으로 복귀 중.’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가고, 다시 목이 검은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왔다.

     

    벨드리안 마을 인근에서부터 남부 방면으로 용사 탄생의 소문이 퍼지는 중.’

     

    라투에르는 그제야 좁고 어두운 밀실에서 빠져나왔다.

     

    가마를 내어 와라. 당장 황제를 알현해야겠다.”

     

    한편, 평소 집무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테오나의 황제 레오폴드는 따스한 햇볕 아래에서 한가롭게 게이트볼을 즐기고 있었다. 아직 새치조차 나지 않은 젊은 나이임에도 무거운 장신구들을 몸에서 떼어내고 싶지 않았던 황제는 정적인 운동에 열을 올렸다.

     

    내가 만약 오늘 경기에서 진다면, 오늘 밤은 후궁들을 들이지 않고 혼자 잠들겠소.”

     

    진지한 황제의 얼굴과는 달리 감히 절대권력자에게 내기를 걸 만큼 배짱 좋은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주변의 눈치를 보며 스틱을 아슬아슬하게 비껴치고 있었지만, 실제 황제의 게이트볼 실력은 그런 그들보다 훨씬 못난 편이었다.

     

    이런! 또 빗나갔군!”

     

    레오폴드 황제의 두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스틱을 손에 쥔 신하들의 손도 따라서 덜덜 떨렸다.

     

    폐하, 아무래도 경기장의 흙이 고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흙을 고르고 바닥을 다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내실로 드셔서 시원한 음료와 함께 광대들의 공연을 감상해 보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레오폴드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아무런 미련 없이 스틱을 내던졌다. 붉게 타오르던 뺨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질리던 참이었다. 오늘 마무리 짓지 못한 경기는 내일 다시 하도록 하지. 승부를 지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누가 이겨도 명예롭지 못하지 않은가?”

     

    권력자만이 내뱉을 수 있는 뻔뻔한 말이었다. 따르던 신하들은 그저 당장 불안한 긴장감을 털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뛸 듯이 기뻤지만, 누구도 겉으로 내색하지는 못했다.

     

    폐하, 교황께서 뵙기를 청하옵니다.”

     

    교황께서? 지금 어디에 계신가?”

     

    레오폴드 황제에게 라투에르 교황은 결코 편한 상대는 아니었다. 오히려 굉장히 피곤한 존재였다. 황제의 의지에 유일하게 반대 의견을 자유롭게 제시할 수 있는 존재가 라투에르 교황이었다.

    평소 라투에르의 정책적인 방향 제시 등은 결과적으로 레오폴드 황제에게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었지만, 레오폴드의 의지에 반하는 의견들을 직접 제시하여 얻은 결과들이라서 황제는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레오폴드 황제에겐 구겨진 체면이 그 이상으로 값졌다.

    매번 라투에르 교황에게 지고 있다는 생각, 그가 교묘하게 자신을 따돌리고 우위에 서려고 한다는 생각이 레오폴드 황제의 정상적인 판단력을 흐려놓았다.

     

    교황께서는 오늘도 보랏빛 비로드 휘장을 두르셨던가?”

     

    덕분에 교황이 직접 찾아올 만큼의 일이라는 것이 얼마만큼 중요한 일인가에 대한 감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그보다는 자신도 아껴서 쓰는 보랏빛 염료를 교황이 늘 두르고 다닌다는 사실에 더 예민해져 있었다.

     

    교황 라투에르 드 폴리에, 황제 폐화를 알현합니다.”

     

    황제의 집무실은 두 사람과 시종들만 있기엔 터무니없이 넓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에게 말이 닿기 위해선 목소리를 높여야만 할 정도였다.

     

    폐하, 주변을 모두 물려주셨으면 합니다.”

     

    레오폴드 황제는 손짓 한 번으로 주변을 물린 후 직접 라투에르 교황에게 다가와 바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 우리 사이에 사소한 규범 따위야 문제가 아니죠. 직접 찾아오셔서 시종들마저 다 내보내달라는 건 뭔가 보통 일은 아닌가 보군요.”

     

    황제의 말과 행동과 달리 레오폴드 황제는 여전히 긴장감이 없었다. 분명 라투에르 교황이 곁에 있어야만 유지되는 권력이었지만, 세습을 통해 황제가 된 레오폴드는 교황이란 자리, 그 무게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라투에르가 목에 두른 보랏빛 휘장에 머물러 있었다. 레오폴드가 직접 라투에르에게 다가온 것도 교황이 노골적으로 골칫거리가 생겼다고 보낸 신호를 제대로 알아봐서가 아니라 그저 목소리를 크게 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레오폴드보다 훨씬 기민하고 영리한 라투에르가 그런 분위기를 못 읽었을 리가 없었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한숨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당장 황제는 황제였다. 라투에르는 호흡을 가다듬고 조카에게 한없이 다정한 삼촌처럼 그들의 앞에 놓인 상황에 대해 하나씩 떠먹여 주기로 했다.

     

    최근 밤하늘에 유성우가 떨어졌던 날이 있었습니다. 그건 알고 계시죠?”

     

    그제야 레오폴드의 미간이 구겨졌다.

     

    알고 있습니다만, 그 문제는 지난 세월 동안 교황께서 잘 처리해 주셔서 솔직히 크게 염려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 그러셔야죠. 그런 일은 저의 몫이죠. 폐하께서는 민중들을 위한 고민으로도 바쁘시니까요. 그런데 이번에는 저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라서 찾아뵈었습니다.

    폐하, 유성우와 함께 원인불명의 불기둥이 솟아올랐습니다.”

     

    레오폴드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의 시선이 교황이 아닌 그보다 더 먼 곳을 향했다. 마치 허공 안에 운명이 걸려있기라도 하듯이.

     

    어렵게 잠이 든 갈라반이 눈을 떴을 땐 이미 하후현이 아리안에게서 아기를 갈취한 뒤였다.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갈라반은 후속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무작정 대기만 해야 했다.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고도 밤낮을 바꾼 채 무작정 말만 달렸던 갈라반의 피로는 생각보다 상당한 것이라서 그런 대기 상태가 오히려 갈라반에겐 꿀 같은 휴식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물론, 그 휴식은 그리 길지 않았다. 부대장이 직접 찾아와 갈라반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었다.

     

    갈라반, 대대장님께서 직접 명령하셨다. 오늘부터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개인 신체 단련에만 힘쓰도록 한다. 알겠나? 자네는 앞으로 다른 병사들과는 다른 일과를 보내는 거다. 대대장님의 특별지시인 만큼 신체 단련은 내가 직접 관리 감독하겠다.”

     

    저는 그럼, 다른 부대로 가는 겁니까? 소속이 변경되는 겁니까?”

     

    언제부터 직속상관의 명령에 의문을 품었나? 모든 명령은 신의 뜻을 수행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소속이 바뀐다 해도 결국 너는 성기사단 안에 속해 있는 신의 아이들 중 하나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갈라반은 막사 안의 개인용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부대를 떠나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정확히 언제, 어떤 모양새로 그 일이 다가올지는 감이 오지 않았지만, 어쨌든 지금의 막사를 벗어나 전혀 다른 곳으로 가게 되리란 예감은 아주 강렬한 것이라서 마치 갈라반 스스로 염원하는 충동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갈라반의 짐은 생각보다 꽤 부피가 있었다. 십여 년의 세월 동안 한 공간에 머물러 있다 보니 자연스레 짐이 늘어나 있었던 탓이다. 갈라반은 소지품들마다 묻어있는 자신의 과거를 잠시 떠올려 보고 싶었지만, 시간은 조금도 너그럽지 않았다.

    감회에 젖을 사이도 없이 정리를 끝내자마자 곧장 훈련이 이어졌다.

     

    넌 이제 파발꾼이 아니다. 파발꾼은 덩치가 작아야 유리하지만, 일반 보병은 덩치가 커야 유리하다. 키가 자라 골격이 달라졌다고 해도 지금 네 상태로는 중장비를 장착하고 다섯 걸음을 내딛기도 힘들다.

    무게를 더 늘려라. 횟수를 더 늘려라. 그래야 테누아스님이 기뻐하신다.”

     

    지금까지의 기초 체력 단련과는 급이 다른 신체 단련이었다. 갈라반의 근육은 하루가 다르게 굵어졌고, 완력도 급격히 증가하여 훈련용으로 만든 굵은 참나무 몽둥이를 한 손으로 이쑤시개처럼 휘두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당장 며칠 만에 이룬 변화였지만, 부대장은 만족을 몰랐다. 갈라반을 더욱 극한으로 내모는 강도 높은 체력 훈련을 이어갔다.

     

    네 육체는 정점을 향해 피어나는 중이다. 이 정도의 훈련은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도 곧 회복된다. 배급도 네놈에겐 특별히 전투병들이 먹는 닭고기와 돼지고기가 지급될 것이다. 그러니 해가 떠 있는 동안은 이빨을 꽉 깨물고 훈련에 임해라.”

     

    그렇게 부드러웠던 갈라반의 눈빛이 날카로운 매의 눈빛이 되었을 무렵, 새로운 명령이 하달되었다.

     

    갈라반, 그간 고생 많았다. 지금 당장 군장을 싣고 말을 몰아 테누오빈을 향해서 달려라. 대대장님이 거기서 기다리고 계신다.”

     

    갈라반이 말 위에 올라 부대를 떠나는 뒷모습은 이미 완연한 기사의 자태가 되어 있었다.

     

    하후현이 갈라반의 극단적 신체 단련을 명령했던 건 그가 벨드리안 마을에서 아기를 데리고 떠난 직후였다. 교황에게 전서구를 보낸 다음, 바로 연이어 갈라반의 신체 단련을 지시한 전서구를 부대장에게 보냈던 것이다.

    그만큼 하후현에게 갈라반이란 제법 쓸만한 병사, 그 이상의 존재였다. 앞으로 갈라반이 이끄는 대로 잘 따라와 주기만 한다면, 부대장이나 보좌관보다 더 빠른 승진을 약속할 정도였다. 하후현의 이런 믿음은 갈라반의 신앙심이 다른 부대원들보다 확고하면서도 얼마간의 유연함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기사단의 소년병들은 의무적으로 교리를 담은 경전을 외우며 그에 따른 교육을 받아야 했다. 갈라반은 다른 소년병들처럼 단순히 의무감에 경전을 반복하여 외우기만 한 게 아니었다. 진심으로 교리를 이해하려 했고, 나름의 기준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질문을 먼저 하기도 했다.

    군인은 기본적으로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는 존재다. 뭐든 군말 없이 명령에 충실하고, 명령대로 결과를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게 군인이다. 명령이야말로 그들의 존재 이유다. 그러니 명령권자를 의심한다거나 명령에 대한 의문을 보인다는 건 반역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예외가 있다. 명령보다 자의적 판단이 우선할 수 있는 군인. 정확히는 명령 수행과정에서 내린 자의적 판단이 결과적으로 명령을 내린 사람에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는 소수의 능력자. 그런 능력을 갖춘 군인들은 단독으로 은밀히 임무를 수행하거나 직접 전쟁터에서 대군을 지휘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무조건 명령만 잘 따르는 군인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돌발적인 상황에서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감각이 발달해 있고, 명령에 대한 이해력이 굉장히 높아서 명령을 내린 사람의 의도를 정확히 꿰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절대적 명령에 완벽히 길든 군인은 가질 수 없는 능력이다. 스스로 사고하여 명령의 본질을 이해하고, 변칙적으로 부대를 운영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군인은 그러니 별종에 가까운 것이다. 하후현이 라투에르 교황으로부터 신임을 얻고 있는 건 바로 그런 별종이라서다. 반도 출신이 아닌 바다 건너 동양에서 우연히 떠밀려온 그가 당당하게 출세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갈라반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 잘 키우면 군단장도 가능한 재목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둘 수는 없다. 내가 군에 몸을 담고 있는 동안은 내 발아래에 있어야 하니까. 역량 이상의 임무를 끊임없이 부여해 다른 생각할 틈을 주지 말아야 해. 다행히 아직 녀석은 햇병아리라서 야망이 없다. 지금부터 잘 관리해야 한다.’

     

    하후현은 재목을 발굴하는 탁월한 안목과 함께 그의 출세를 위해 그 재목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온 자답게, 그에겐 세상 대부분이 그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라투에르 교황의 충실한 도구가 되어줬으면 하는 황제, 그리고 레오폴드 황제를 위해 충실한 도구로 머물러 줘야 할 교황.

    이들의 팽팽한 긴장 관계는 눈앞에 들이닥친 문제로 인해 뜻밖의 결속력을 보이며, 다이아라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협력 관계로 거듭나고 있었다.

     

    솔직히 좀 당황스럽군요. 케케묵은 전설이 세상에 두 발로 걸어 나오려고 한다고요?”

     

    선대 황제 폐하들과 교황들 모두 마왕의 부활을 염려하셨습니다. 실제로 테오나 왕국을 건국한 초대 황제께서는 통일 이후에도 곧바로 종전을 선언하지 않으시고 곧장 쎄라누이 산맥으로 달려가 마왕의 봉인부터 확인하셨지요. 전설에 대한 믿음이나 검증은 이미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나 역시 케케묵은 전설로만 치부하고 그칠 일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런 생각으로 있었다면, 그게 더 우스운 꼴이죠. 전혀 믿지도 않는 일 따위를 위해 그간 꾸준하게 국력을 낭비해온 거나 다름없으니까.

    난 지금 단순하게 정보 출처의 신뢰성을 묻고 있는 게 아닙니다. 교황께서 제게 직접 찾아오실 정도라면, 우리가 이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거기에 대해서도 모든 고민을 끝내셨을 테니까요. 나는 다음을 위한 선택들에 관해 묻는 겁니다.”

     

    항상 그렇듯이 폐하를 위해, 다이아라 반도의 안녕을 위해, 최선의 대책을 마련하였습니다.”

     

    레오폴드 황제의 얼굴은 다시 느긋하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변했다. 라투에르는 그런 황제의 표정 변화를 목격하였지만, 모른 척하며 허리를 숙여 예의를 차렸다.

     

    그렇다면, 우선 마왕은요? 마왕의 부활이 실제로 확인된 적 있습니까? 대륙의 마왕군과는 지난 일백 년 동안 변방에서 소규모 교전만 치른 게 전부입니다. 그들은 늘 소규모의 어설픈 공작 활동만을 펼쳤고, 매번 우리에게 간파당하여 실패했죠. 우리와 전면전을 치른 적조차 없습니다. 늘 그림자만 보여주고 달아나는 수상한 녀석들에 불과하죠. 전설에는 부활한 마왕의 목을 베는 용사가 태어난다고 했는데, 솔직히 마왕에 관해서는 어떤 새로운 정보도 없는 상태가 아닙니까?”

     

    말씀대로입니다. 용사 탄생의 전설은 여러 문헌에 남아 있지만, 마왕 부활의 표식과 관련해서는 어떤 문헌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가장 빠른 방법은 쎄라누이 산맥으로 달려가서 마왕을 봉인한 봉인석이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인지 확인해 보는 것일 겁니다. 그렇지만, 그 방법 역시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부활한 마왕이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상태니까요. 어쩌면, 용사처럼 북쪽 대륙 어딘가에서 갓난아기로 태어났을지도 모릅니다. 아님, 이미 어딘가에서 태어나 성장 중이거나 지금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마물들의 지배자가 전설의 마왕일지도 모르고요. 지금까지 애써 수상쩍은 공작 활동만 펼쳤던 건 다른 꿍꿍이를 감추기 위한 위장일지도 모릅니다.”

     

    레오폴드 황제는 몸을 의자에 깊숙이 파묻었다. 미지의 적을 대하는 일국의 통수권자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긴장감 없는 권태로운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그 마왕이라는 놈, 그냥, 제 숙제가 아닐 수도 있겠군요. 다음 순간 정말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그때도 내 숙제가 아닐 수 있겠고.

    마왕이란 건 실체 없는 유령 따위나 다름없는데, 일국의 황제가 유령과 씨름할 수는 없지.”

     

    라투에르 교황은 황제의 말에 주름진 얼굴을 더욱 깊게 구겨가며 껄껄껄 웃어 보였다.

     

    정확하십니다. 마왕은 폐하의 숙제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용사가 될 아이의 숙제죠. 마왕이란 존재와 전설의 용사는 어디까지나 테오나 왕국을 위한 기회의 카드입니다.”

     

    기회의 카드?”

     

    라투에르 교황은 눈가에 미소를 띤 채 레오폴드 황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왕국의 권력을 더욱 단단하게 해줄 기회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선대의 황제들께서 힘써주신 덕분에 황제께서는 다이아라 반도 전체를 손에 넣으셨습니다. 이제 남은 건 쎄라누이 산맥을 넘어 마왕군들을 휩쓸고 대륙 전체를 손에 넣으시는 것만 남았습니다.”

     

    잠깐, 나보고 전쟁을 하란 말이오? 그것도 정복 전쟁? 굳이? 나보단 교황이 더 잘 아시지 않소? 우린 아직 준비가 덜 되었습니다. 이제 겨우 변방 흡수 통일이 완료되는 중이고, 내정이 뿌리내리려는 중입니다. 당장 병력을 새로 징집하기에는 좋아 보이는 숫자이지만, 자칫 북쪽 원정이 길어지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숫자가 되겠죠. 내가 궁에서만 나고 자랐지만,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들의 아버지까지 겪으신 모든 전쟁 기록을 보고 자랐습니다.

    어설프게 준비하고 먼저 덤빈다면, 분명 그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먼저 덤비지 않고 기다린다면, 지금의 평화는 얼마든지 더 길어지겠죠. 그런데 굳이 이 시점에서 정복 전쟁을 하라고요?”

     

    레오폴드 황제의 얼굴이 한순간에 굳어버렸다. 비록 옹졸한 면이 있다고는 하지만, 레오폴드 황제는 분명 다이아라 반도의 최고 권력자였다. 그는 위치에 걸맞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라투에르 교황은 황제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남은 숙제가 그렇다는 것이지 그걸 꼭 지금 당장 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러기 위한 준비작업을 지금부터 할 때가 되었다고 알려드리는 겁니다. ‘전설의 용사라는 카드는 바로 그러기 위해서 존재하는 카드입니다.”

     

    레오폴드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럼, 그 카드라는 건 결국 내정을 더 단단하게 해주는 카드라는 겁니까?”

     

    , 왕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줄 카드입니다. 정치에서 결국 중요한 건 대의명분이고, 가장 필요한 건 민중들을 결집할 수 있을 정도의 흥미롭고 자극적인 이야기입니다. 전설의 용사와 마왕이라는 소재는 여기에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것 중 하나입니다.

    어차피 마왕군은, 그리고 우리 군은, 누구도 먼저 선제공격하기가 힘듭니다. 어느 쪽이든 중장비 철갑을 두르고 쎄라누이 산맥을 넘는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한쪽이 운이 좋아서 선제공격이 성공하더라도 이어서 연이은 공격이 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지난 시간 동안 우리가 변방 흡수 통일에 공을 들일 때, 마왕군이 단순 방해 공작만을 할 게 아니라 전면전을 불사했겠죠. 그러니 어느 쪽이든 어지간히 모은 힘으로는 전쟁, 그것도 선제공격 같은 건 그저 한낱 꿈에 불과하죠.

    그래서 힘을 비축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상상보다 많은 물자가 필요할 테고, 공급이 끊이지 않기 위한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서는 또 제법 비용이 소모될 겁니다. 문제는 왕국의 신하들 모두가 여기에 쉽게 동의할 것인가 하는 거죠.”

     

    레오폴드 황제의 눈이 커졌다. 권태와 옹졸함으로 가득했던 그의 얼굴에서 광기에 가까운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말은 누가 감히 황제의 의지에 반대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아뢰옵기 황공하지만, 인간은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존재입니다. 그들이 폐하에게 지금 충성하고 있는 건 그들의 손에 나눠준 권력과 재산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륙 원정을 위해 그 자산을 조금이라도 회수하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반발할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런 마음이 있어도 서로 눈치만 보겠죠. 그러다 누가 감히 나서주거나 그럴싸한 명분만 나타난다면, 바로 이빨을 드러낼 겁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폐하가 원정을 준비하지 않아도 시간의 문제일 뿐, 반드시 찾아올 문제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설의 용사라는 소재는 어디까지나 내부의 적들을 소탕하고 모두의 관심사를 외부의 강력한 존재, 마왕에게로 향하게끔 만들기 위한 카드에 불과합니다.

    폐하, 선대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하고 태평성대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결코 안심하셔서는 안 됩니다. 태평성대 다음에 찾아올 일은 불을 보듯 뻔한 겁니다. 나라가 평정되어서 필요가 없어진 칼들이 그 칼의 칼날을 어디로 두겠습니까? 운이 좋아 칼이 칼집으로 들어가 쉰다고 하더라도 뒤이어 지방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다 어지러워진 민심을 이용한 반란이 득세하겠죠. 인간들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 이상, 시간의 문제일 뿐, 그런 일들은 차례로 일어날 겁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더 과한 세금을 거두거나 궁으로 보내오는 공물의 양을 조금씩 속이는 자가 있을 겁니다. 심지어 과거 패망한 나라들처럼 관직을 사고파는 행위를 하는 자들이 나타날지도 모를 일입니다. 모든 것은 다 시간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러니 테오나 왕국이 앞으로도 영원히 번창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긴장감을 상기시켜줄 마왕이라는 외부의 적, 미지의 적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나이를 먹어 중간중간 음색이 갈라지고 가래가 끓어오르기도 했지만, 라투에르 교황은 긴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도 결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백발의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눈에서는 빛이 났고, 말에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반면, 레오폴드 황제는 당황하는 모습을 감추질 못했다.

     

    그렇다면 교황께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누가 반란을 일으켜도 이상할 게 없다는 말씀인 거요? 그리고 내가 모를 뿐, 지금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내 재산을 가로채는 무뢰배가 있다는 거고?”

     

    정확히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외면하신다고, 모르신다고, 진실이 사라지거나 감추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기지 않으신다면, 당장 충성스러운 소수의 신하를 비밀리에 선별하여 전국에 암행을 보내보십시오. 분명 믿었던 이름 중 몇몇이 기대와 전혀 달랐다는 전갈로 되돌아올 겁니다.”

     

    그 말을 지금 있는 그대로 믿으라는 거요? 그럼, 매달 내게 올라오는 공문들은 다 뭐라는 말이오?”

     

    죄송하지만, 황제께서 매번 창고에 직접 가셔서 재산을 확인하지 않는 이상에야 누구든 숫자를 바꿔 적을 수 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세금이 징수되어 왕궁의 창고에 쌓이기까지 누구든 금화 한 닢씩 챙길 수가 있고, 누구든 비단과 향신료를 빼돌릴 수가 있습니다. 전 오히려 그 정도면 정말 다행이고, 아직은 왕국이 안전한 거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렇지만, 왕국의 기운이 이보다 조금이라도 더 기울면, 그 손들이 왕국의 목을 직접 조르게 될 거라는 말이고요.”

     

    이런, 빌어먹을! 그토록 잘 알고 계신다면, 그것들을 모조리 찾아내 참수에 처해야 마땅한 거 아니오!”

     

    레오폴드 황제는 붉게 달아올라 그 화를 감추지 않았다. 순식간에 공기가 찢어질 것처럼 팽창되었지만, 라투에르 교황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폐하, 이 일은 결코 감정적으로 처리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드렸지만, 그건 인간이란 생물이 원래 그렇게 생겨 먹어서 생기는 일입니다. 모조리 참수해버리면, 오히려 빌미만 제공하는 꼴이 됩니다.

    그보다는 지금처럼 태평성대가 이어져 그들 손에도 돌아가는 게 있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모두의 칼날이 정확히 북쪽으로 향한 채로 있어야 합니다. 다행히 우리에겐 용사와 마왕이라는 카드가 들어왔습니다. 시기적절하게 들어와서 참 다행입니다.”

     

    겨우 화를 가라앉힌 레오폴드 황제가 굳은 얼굴로 진지하게 경청하기 시작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교황이 자신보다 여러모로 책략에 비상한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가장 먼저 소문을 내야겠죠. 용사가 탄생했다고요. 이미 소문이 남부 전역으로 퍼지는 중이라고는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긴장감을 줘야 합니다. 용사가 탄생했으니 마왕도 침략을 준비 중이라는 이야길 함께 알려야 할 겁니다. 그 과정에서 마왕에 관한 이야기에 살을 보태는 거죠. 이미 과거에도 그 잔혹함이 굉장했습니다만,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민중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한 이야기들을 더 만들어서 함께 퍼트리는 겁니다.

    그렇게 민중들 사이에 공포심이 자리잡혀 가는 동안 신하들을 설득시키는 겁니다.”

     

    아니, 그게 말처럼 쉬울까요? 존재 확인조차 되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를 대비하자는 건데? 교황께서 하신 말씀대로라면, 나의 신하라는 자들, 이 나라의 귀족이라는 자들은 하나같이 교활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쉽게 수긍이나 하겠소?”

     

    라투에르 교황은 다시 선하게 미소 지으며 껄껄 웃었다.

     

    제가 할 일이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이미 다 생각해둔 바가 있습니다. 저는 신을 섬기는 자이기 전에, 폐하의 신하입니다. 폐하가 근심하시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게 저의 소명이옵니다.

    신하들을 설득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간단할 거로 생각됩니다. 우리에겐 전설의 용사로 태어난 갓난아기가 있으니까요.

    이 부분은 그냥 저를 믿고 의지해 주셨으면 합니다.”

     

    전혀 의중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의 황제를 향해 라투에르 교황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어갔다.

     

    공포심이 묻은 소문은 확실히 자리를 잡을 겁니다. 신하들도 지금 손에 쥔 걸 외부세력에게 뺏기기 싫어서라도 폐하께 다시 나누어줄 것입니다. 그건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반드시 해놓겠습니다.

    사실 그것보다 어려운 건 갓난아기를 진짜 전설의 용사로 키우는 것입니다. 뜨거워지는 소문으로부터 적당히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전설의 용사라지만, 당장 현실적으로 걸음마도 떼지 않은 젖먹이가 어떻게 마왕을 벨 수 있겠습니까? 성장하기 위해선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할 텐데, 그 시간 동안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극단적으로 우리의 바람과는 전혀 달리 전설과는 완전히 무관한 아기일 수도 있고, 검을 잡기보다는 노래하고 춤추는 집시 광대가 천성일지도 모를 노릇이죠.

    물론, 그런 부분까지 계산을 다 해두긴 했습니다. 마왕이나 용사나 다 실존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실과 다르더라도 민중과 신하들이 믿을 수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전설이 정말 실현되는 것처럼 보이게 해야죠. 문제의 아기를 통제 상황 속에서 키워 훈련 시키고, 모험을 떠나게 할 겁니다. 그러는 동안 민중은 용사가 그들 곁에 있다고 믿고 안심할 것이고, 왕국의 칼들은 마왕과의 일전을 앞두고 있다는 생각에 숨을 고르겠죠. 훈련과 모험 속에서 성장한 아이는 진짜 본인이 용사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완벽하게 믿게 될 겁니다. 마침 아이의 아비가 대단한 사냥꾼이라고 하니 기본적으로 골격도 좋을 거고, 힘을 쓰는 요령도 좋겠죠. 그건 정말 다행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바람과 다른 형태로 성장할 가능성은 여전히 있겠죠. 그래서 성기사단, 신의 아이들을 이용할 겁니다. 때가 되면 비슷한 또래, 비슷한 외모, 훨씬 더 훈련이 잘된 아이로 용사를 바꿔치기할 겁니다. 제가 할 일은 그렇게 전설과 소문을 진짜처럼 만들어서 바꿔 버리는 거죠.”

     

    레오폴드 황제는 이제야 라투에르 교황이 말한 기회의 카드라는 말을 얼마간 이해할 수 있었다. 교황은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를 뜬구름 같은 이야기를 이용해 왕국 사람들의 삶을 마음대로 주무르자는 이야길 담담하게 내뱉고 있었다. 교황에겐 모든 게 체스판 위의 장기 말과 다름이 없었고, 왕국의 미래는 그의 생각대로 쓰이는 연극 한 편에 불과했다.

     

    그건 좀 지나칩니다. 그러다 정말 용사용사 대리라는 녀석이 검의 달인이 된다거나 뜻밖의 위용을 과시하며 여러 업적을 쌓게 되면 어쩌고요? 인기 많은 영웅은 위험합니다. 그거야말로 반란을 꿈꾸는 자들에겐 더없이 좋은 도구로 쓰일 수 있는 거 아니겠소?”

     

    그 부분도 물론 염두에 두었습니다. 그때쯤이 되면 정말 용사인지 아닌지 확인을 해봐야겠단 핑계로 용사를 궁으로 소환해서 시련을 줄 겁니다.”

     

    시련?”

     

    , 군대 단위로 도와주는 이들이 없다면, 십중팔구 죽음을 면치 못할 거대한 시련. 그런 시련을 준비해 둘 생각입니다. 만에 하나로, 정말, 전설대로 그가 운명의 용사라서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용사가 신의 도움 아래 있어서 정말 기적처럼 살아서 돌아온다면, 그보다 좋은 게 없습니다. 그때쯤이면 정복 전쟁을 위한 준비가 무르익었을 때입니다. 용사를 앞세워 그대로 마왕군을 향해 진격하면 그만입니다. 죽음도 피해갈 운명이라 시련에서 살아남았으니 그를 최전방에 세우면 따르는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겁니다. 그렇게 하면, 황제께서는 북쪽 대륙을 전부 정복하진 못하더라도 최초로 북벌을 실행한 황제로 역사에 기억될 것이고, 그 어느 때보다 광활한 영토를 소유한 황제가 되시는 겁니다.”

     

    교황의 이야길 듣고 있던 레오폴드 황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대체 라투에르라는 인간은 어디까지 생각해둔 것일까?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럼, 그때까지도 용사나 용사 대리가 계속 살아있다면? 전쟁 속에서 계속 무운을 쌓아간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때가 되면, 시련을 극복하고 돌아온 용사의 곁에는 제 직속 성기사단이 항상 함께할 것입니다. 신의 아이들은 신의 부름이라면, 잠자는 용사의 목도 의심 없이 베어올 것입니다.”

     

    그럼, 용사의 교육과 훈련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벌써 아기의 신병은 확보하셨겠죠? 여기 수도에서, 궁이나 신전에서 가르칠 겁니까?”

     

    하하하, 폐하, 농담이 과하십니다. 어찌 될지도 모를 아이를 데려와서 키우다니요. 그런 유지비 안 나오는 일에 황궁의 자금을 떼어 쓸 수는 없죠. 제 직속 부하가 아기를 데리고 오는 중이지만, 도착하는 대로 다시 집으로 돌려보낼 생각입니다.

    원래 아기의 교육은 그 아비와 어미가 해야 마땅한 것 아니겠습니까? 대신 아이가 두 발로 넘어지지 않고 달릴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성기사단에서 인원을 차출하여 가정교사로 붙여줄 생각입니다.”

     

    신을 등에 업고 인간의 운명을 결정 지으려는 자와 그런 자의 힘을 빌려 권력을 유지하려는 자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출처 http://novel.naver.com/challenge/detail?novelId=1032652&volumeNo=4
    15번지의 꼬릿말입니다
    13월을 살고 싶습니다

    이 게시물을 추천한 분들의 목록입니다.
    [1] 2021/12/10 17:06:24  112.171.***.130  윤인석  72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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