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내가 처음 그 상점에 발을 들인 것은 한달 쯤 전이었다.</div> <div><br></div> <div>뭔가 살 게 있었던 건 아니고 단지 퇴근길마다 마주치는 이 상점이 무엇을 파는 곳이고 무슨 용도로 이곳에 있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div> <div><br></div> <div>출입구는 철재 프레임에 유리가 4분의 3을 차지하는 미닫이로 되어 있었는데 고정된 게 양옆에 두 개 여닫는 것이 중앙에 두개 놓여 있었다.</div> <div><br></div> <div>네개의 창문은 어두운 갈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병아리 솜털처럼 아주 밝은 노란색으로 '지봉상회'라는 글자가 문짝마다 한 글자씩 쓰여 있었다.</div> <div><br></div> <div>처음 방문했을 때 손님 다섯 명이 넓은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서 튀긴 과자와 베이컨, 계란말이 등의 안주에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행색은 평범했고 분위기는 적당히 흥겨웠다.</div> <div><br></div> <div>그 중엔 언젠가 마주친 적이 있었는지 낯이 익어 보이는 사람도 있었으나 언제 어디서 봤는지는 정확히 기억 나지 않았다.</div> <div><br></div> <div>상점에 들어섰을 때 정면으로 보이는 카운터 너머로 주인인 듯 한 사람이 앉아서 무슨 장부같은 것을 보고 있었는데 손님이 드나드는 데는 크게 관심이 없는 듯 했다.</div> <div><br></div> <div>쳐다도 안 보고 인사도 없기에 나도 무시하기로 했다.</div> <div><br></div> <div>내부의 벽면에는 제품용 선반과 냉장고, 냉동고가 있고 뭐 그저 그런 물품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세제, 물티슈, 일회용 컵이나 설탕, 콜라, 맥주, 냉동만두, 냉동핏자, 과자 등등의 것들.</div> <div><br></div> <div>동네 조그만 슈퍼나 편의점과 크게 다를 바는 없었지만 편의점처럼 인테리어가 밝고 세련된 대신 약간 어둡고 소박했다. 파는 물품들 외에 그림이나 사진, 장식품 등이 걸려 있어서 이 곳이 물건을 파는 곳인지 식당 혹은 술집인지 명확한 구분이 어려웠다.</div> <div><br></div> <div>오래된 느낌이 나는 흑백 사진 중엔 ‘Halik’이라는 글자와 파이프를 물고 있는 중년 여자의 사진이 있었고 그 옆엔 레몬 모양 안에 CAN Vitmin C, I’m so green 이라고 적힌 광고판도 보였다. 깡통에 든 비타민C를 먹고 자연에 가까워 진다는 의미일까?</div> <div><br></div> <div>주인에게 비타민C가 어디 있냐고 물었지만 그런 건 없다고 하길래 그냥 별로 필요치도 않은 물건 몇 개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div> <div><br></div> <div>‘그런 곳이었구나’ 하고 호기심이 해소된 사실에 흡족해 하던 중 묘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됐다.</div> <div><br></div> <div>상점에 들어섰을 때 왼쪽 벽에 아주 오래 되서 불어도 소리가 날것 같지 않은 색소폰 장식이 있었는데 그 아래서 넥타이를 했지만 셔츠 단추가 세 개까지 풀어져 있는 남자의 시신을 봤던 것이다.</div> <div><br></div> <div>시신이라니?</div> <div><br></div> <div>주인과 손님들이 아무 일 없는 듯 행동했기 때문에 시신을 알아채지 못 했던 것일까? 아니면 어두운 조명 때문에 시신이 아닌 것을 시신으로 착각한 것일까?</div> <div><br></div> <div>만약 그것이 시신이 맞다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div> <div><br></div> <div>상점에 시신이 놓여 있는 건 그런가 보다 할 일이 아닐텐데 왜 다들 무신경하게 받아 들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과연 평범한 일상 속에 융화될 수 있는 장면인가?</div> <div><br></div> <div>밤 늦게까지 고민하다가 내일 다시 가서 시신을 확인하기로 하고 잠을 청했다.</div> <div><br></div> <div>꿈 속에선 버스에 타고 있었는데 맞은 편 차선의 운전자가 나에게 손짓을 하며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마치 음소거를 한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얘기가 무엇에 대한 건지 알수 없었지만 그 사람의 표정을 볼 때 꽤나 흥미롭고 신기한 이야기였음에는 틀림이 없었다.</div> <div><br></div> <div>다음 날 직장이 파하는 대로 다시 그 상점을 찾았다.</div> <div><br></div> <div>문을 열고 곧바로 왼편을 봤는데 역시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셔츠 단추가 세개까지 풀어진 남성의 시신이 놓여져 있었다. 구두도 곱게 신켜 진채로.</div> <div><br></div> <div>주인에게 시신에 대해 말 하는 게 옳을까? 주인은 오늘도 어제만큼이나 무관심 했고 그 알 수 없는 장부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마치 '이 장부를 보는 것 말고는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 이 장부를 열심히 봐야겠다' 하는 표정이었다.</div> <div><br></div> <div>주인의 표정은 어제와 다를 바 없었고 별로 중요치 않은 잡담을 주고 받는 손님들도 넓은 테이블을 그대로 차지하고 있었다.</div> <div><br></div> <div>하루 전 내가 이 상점을 떠난 후부터 지금까지 그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인원 수나 앉은 자리의 배치 또한 어제와 동일했다.</div> <div><br></div> <div>문득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이 났는데 시장에서 과일을 판매하는 가게의 주인이었다. 가끔 과일을 좀 많이 산다 싶으면 조그만 과일 몇개를 덤으로 주곤 하는 사람이었다.</div> <div><br></div> <div>반가운 척 해도 이상하지 않을 사이라고 생각하고 말을 걸까 하는데 먼저 나에게 손짓을 했다.</div> <div><br></div> <div>나도 손인사를 건내고 시신에 대해 물어 볼까 하다가 그냥 물건 몇 개를 사들고 나와 버렸다.</div> <div><br></div> <div>또 필요치 않은 물건을 구매하게 된 나는 평소 우주적 질서에 크게 문란함을 야기하지 않았던 내 살림이 예상치 못 한 사건때문에 혼란스러워짐을 느끼게 됐다.</div> <div><br></div> <div>나는 필요 없는 물품이 쌓여가는 게 마땅치 않아서 한동안 그 상점을 방문하지 않았다.</div> <div><br></div> <div>하지만 상점의 시체만은 신경이 쓰였고 잠이 들면 항상 맞은 편 차선의 운전자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뭔가를 설명하는 꿈을 반복해서 꾸었기에 이 이상한 문제를 해결해서 성가신 운전자를 빨리 보내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div> <div><br></div> <div>일주일만에 상점을 다시 방문했을 때 그 망할 장부에서 아직까지 눈을 떼고 있지 않는 주인과 자리를 지키고 있는 테이블의 손님 녀석들에게 오늘은 꼭 시신에 대한 답을 얻으리라고 비장한 결의를 품은 상태였다.</div> <div><br></div> <div>그런데 막상 상점에 들어서자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서 코끝만 긁적이고 있었다.</div> <div><br></div> <div>더군다나 과일 가게 주인이 동석을 권하고 맥주 한잔을 건내는 바람에 다른 손님들과 통성명을 하고 뭔가 쌉싸름하면서 달콤한 맛이 나는 맥주를 여러 잔 들이키게 되었는데 그것이 수제맥주라고 했다.</div> <div><br></div> <div>가게 이름을 따서 ‘지봉맥주’라고 불렀는데 지봉상회에서만 맛 볼 수 있는 맥주였다. 말 없고 무뚝뚝한 주인의 손맛은 준수했다. 맥주도 안주도 심지어 베이컨도 고소함이 탁월했다. 소스는 매콤달콤한데다 점도가 높아 농밀한 맛이 입안에 강하게 맴돌았다.</div> <div><br></div> <div>그날 많이 떠들었던 것 같다. 모두 유쾌해졌고 시끌벅적해 졌는데 그런 분위기때문인지 아니면 지봉맥주의 도수가 의외로 높았던 탓인지 꽤나 취기가 많이 오른 상태에서 상점을 나서게 됐다.</div> <div><br></div> <div>문을 나설때 얼핏 본 시신은 지금까지 봐왔던 자세 그대로 였고 상태도 변한게 없었다.</div> <div><br></div> <div>이 시신만 아니면 뭐 특별히 혼란할 것은 없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 남성의 시신이 나만 자꾸 신경 쓰이는 걸까? 내가 유별나게 행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div> <div><br></div> <div>지봉맥주를 만들어낸 주인과 평범하고 모난 것 없는 손님들 중 아무도 나처럼 이 시신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div> <div><br></div> <div>나는 이 상황이 평범할 수도 있고 오히려 내가 좀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묘한 느낌에 동화되고 있었다.</div> <div><br></div> <div>그 이후로도 가끔 퇴근길에 그 상점에 들러 이제 정체를 알게된 손님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주인과도 친근한 눈인사를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div> <div><br></div> <div>여전히 시신은 그 자리에 놓여진 채로…</div> <div><br></div> <div>그렇게 되버리고 나서는</div> <div><br></div> <div>지봉상회의 시신이 그리 불편하지도 않고 신경 쓰이지도 않았으며 꿈에서 자꾸 나에게 뭔가를 떠들던 남성은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div> <div><br></div> <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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