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전에-
말따옴표도 없고, 줄간격도 그리 넓지 않은 불친절한 글입니다. 글솜씨가 부족해 한 번 쭉 훑고는 잘 이해하지 못 하실 수도 있습니다.
천천히, 마음으로 또박또박 읽다보면 읽기도 편하고, 이입도 더 잘 될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추수가 한창인 평화로운 마을에서 사내의 가게는 이질적이다. 푸른 하늘 밑으로 끝없이 펼쳐진 황금빛 들판을 걷다 보면, 누구든 우뚝 솟아있는 낡은 건물 하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낡았지만, 그것은 새것이다. 색도 칠해지지 않은 양회 덩어리와 곳곳에 놓인 먼지 덮인 자재는 단지 공사가 도중에 멈췄음을 말해주고 있다. 수술대 위에 덩그러니 놓인 낙태아처럼, 생이 깃들기도 전에 죽어버린 건물은 차갑게 굳은 고깃덩이만을 세상에 남겼다. 누가 지은 건지, 용도는 무엇이었는지, 완성된 건물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사람들은 그리 관심 두지 않았다. 그들의 눈엔 잿빛 시신뿐이다. 마을 주민 몇몇이 저마다의 궁금증을 갖고 찾아왔지만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구청에선 서류상의 주인이 있고 철거 계획은 없다는 답변만 돌아온다.
건물 지하에 사내의 가게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 역시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지난 십오 년 동안 장사를 계속해왔다. 사내에게는 단골손님이 몇 있었고 그들 개개인의 재산이 마을 전체보다 많은 덕분이었다(라고 사내는 추측한다.)
사내는 시계를 봤다. 열두시 삼십 분. 이미 시간을 넘긴 지 오래였지만 손님이 있는 방문은 여전히 굳게 잠겨있었다. 문 옆에 선 경호 로봇은 맡은 임무에 집중할 뿐 사내의 적막함을 달래주지는 못했다. 사내는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온갖 기계에 둘러싸여 머리와 가슴 쪽에 갖가지 탐침을 꽂은 채 앉아있는 손님의 모습이 보였다. 거친 숨을 내쉬며 허공을 응시하는 것 외에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그였지만, 사내는 그가 단순히 앉아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영감, 아직 팔팔하군. 사내는 중얼거렸다. 잠시 후, 머리가 반쯤 벗어진 노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이 땀범벅이다. 오늘 최고였어. 한 번도 안 쉬고 다섯 번이나 했지 뭐야. 이것 참, 주책이군.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훤히 드러난 이마를 닦아냈다. 아직 정정하시네요. 삼십 분 초과했습니다. 추가 요금은 원금의 절반입니다. 노인은 예상치 못한 금액에 놀란 눈치였다. 절반이라고? 네, 기본금 삼천에 추가금 천 오백. 모두 사천 오백입니다. 노인은 나지막이 욕을 뱉었다. 사내는 못 들은 척했다. 그래, 뭐. 비싸긴 해도 여기만 한 곳이 없지. 이 구역에서 가상현실 가게는 이곳밖에 없으니까. 노인은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숨을 크게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나쁘다는 건 아닌데, 가상현실이 좋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실제보단 못한 것 같아. 물론 하는 동안은 좋아. 암, 최고지. 이 정도 돈으로 그렇게 많은 연예인을 보는 게 실제로는 불가능하니까. 근데 끝날 때가 되면 컴퓨터 전원 꺼지듯 한순간에 전부 사라지잖아? 꿈같다고나 할까. 참 허무하지. 사내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꿈 같이 느껴지는 편이 나을 걸요? 자칫해서 현실감이라도 잃어버리면 어떡해요. 그 순간 ‘나’를 잃어버리는 거잖아요. 어디까지가 가상이고 현실인지를 구분할 수 없게 되는 거죠. 이 일 하면서 그렇게 된 사람 꽤 많이 봤어요. 노인은 이마를 찌푸렸다. 나도 그렇게 되는 건가? 아뇨. 사장님께선 방금 말씀하셨듯이 정말 불가능한 일들만 체험하시잖아요.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하긴, 그렇겠군. 그래도 찝찝하단 말이야. 역시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실제를 따라올 수는 없는 건가....... 노인은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대놓고 추가금은 안 내겠다는 소리다. 순간 가게 안에 정적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사내였다. 예, 알겠습니다. 저희 가게를 한두 번 이용해주신 것도 아니고. 이번 추가 요금은 무료로 해드리죠. 그제야 노인의 얼굴이 밝아진다. 그래, 내가 여길 다닌 게 몇 년인데. 이 친구가 장사할 줄 아네. 노인은 사내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아 그래. 이거 받아. 노인이 건넨 전자 종이에는 앳된 얼굴을 한 소녀가 있었다. 사내가 종이를 누르자 소녀는 아직은 어색함이 묻어나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얘, 작년에 데뷔한 애 아닌가요? 맞아. 지금까지 모르다가 어제서야 처음 봤는데, 아주 예쁘더라고. 다음번엔 그 아이로 부탁하네. 미성년자잖아요. 어차피 이 일 자체가 불법인데 그런 거 따질 필요가 있나? 게다가 증거도 안 남는다면서. 사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긴 하죠. 네, 알겠습니다. 두 달 후에 오시면 됩니다.
노인이 나간 뒤, 사내는 그가 있던 방으로 들어갔다. 바닥에는 노인이 흘리고 간 흔적이 보였다. 사내는 휴지 몇 칸을 뽑아 그것을 닦아냈다. 뒤처리는 스스로 하라는 뜻으로 갖다 놓은 휴지였는데, 일이 끝난 뒤엔 도망치듯 방을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긴, 떳떳한 사람이면 이런 곳엔 안 오지. 사내는 생각했다. 고객들의 의뢰는 제각각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에겐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현실에선 이루어지지 못할 법한 일을 원한다는 점이다. 평소 동경하던 연예인이나, 말도 걸지 못했던 짝사랑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가상현실에선 감각도 가상에 불과하다. 오감을 제공하던 기기가 연결을 중단하면 여태껏 느꼈던 모든 감각이 수도꼭지 잠그듯 뚝 끊겨버린다. 남는 건 다듬지 못한 어색한 여운뿐이다. 현실의 감각이 파도처럼 몰려드는 바로 그 시점에서, 잠에서 깬 뒤 아무리 생각해도 꿈이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고객은 어떤 노력을 해도 그때의 느낌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결국 그들은 감각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다시 가게를 찾는데, 이것이 사내가 적은 손님만으로도 많은 돈을 버는 방법이었다.
청소를 마친 사내는 기기 앞에 앉아 작업을 시작했다. 노인으로부터 받은 사진을 토대로 대상을 자료화한다.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직접 창조해야 하는 성가신 작업이다. 하지만 정작 힘든 일은 따로 있었다. 간혹 기억을 구현해달라는 손님이 있는데, 후회되는 과거를 가상현실 속의 기억으로 대체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상황이 자신의 기억과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사내는 직접 기억 속 장소를 찾아가 길게는 일주일까지 머물며 ‘현장 조사’를 해야 한다. 물론 이때는 추가비용이 청구된다. 그렇게 일정 반경 이내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나면 다시 일주일 동안 자료화하는 작업을 한다. 그러면 비로소 손님을 받을 준비가 끝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