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첫 눈이 내리던 그날, 희철은 지영에게 사정₁했다.</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희철은 지영의 오랜 연인이다. </div> <div> </div> <div>3천일 이상이 지나가자 더 이상 숫자를 하나하나 나열해가는게 무의미할 지경이었고 </div> <div> </div> <div>연애를 막 시작했을 무렵의 소소한 기념일 하나하나를 챙겨나가던 풋풋한 내음은 오래 전에 종말을 고한 뒤였다.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물론 그네들에게도 하루가 멀다하고 껌딱지같던 진득한 사랑놀음과 운우지정을 나누던 시절도 있었다. </div> <div> </div> <div>오래전 언젠가 취업을 준비하던 시절 없는 돈을 끌어모아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서 </div> <div> </div> <div>자욱한 아침 안개처럼 한 가득 피어있던 난지도 억새풀밭에서 속삭이며 고백하던 때도 있었다. </div> <div> </div> <div>"벌써 그대와 함께 한 지도 1년이 되어갑니다. 작년 이맘때 처음 만나 수줍게 얼굴을 붉히던 그 때를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워요. </div> <div> </div> <div>지난 1년여간 하루에 한 개씩, 사랑과 인연이라는 벽돌을 쌓아왔지요. 이제 몇 일 뒤면 365개의 벽돌을 쌓을테구요. </div> <div> </div> <div>그 벽돌 하나하나가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추억만이 담겨져 있지는 않았지만 </div> <div> </div> <div>적어도 심하게 싸우거나 화를 내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서로에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div> <div> </div> <div>앞으로 500개, 1000개, 수천개, 수만개의 벽돌을 함께 쌓아올려나가면서 </div> <div> </div> <div>처음 당신에게 고백했던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않고 되새기고 되새기며 벽돌로 지은 우리들의 집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노력하고 노력할께요." </div> <div> </div> <div>그렇게 희철은 자신의 마음을 담아 바람에 흩날리던 억새풀밭 한 가운데서 지영에게 고백했다. 가난했지만 풋풋하기만 했던 과거 어느 날의 일이었다.</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이제 희철과 지영은 더 이상 돈 몇 푼 때문에 고민하거나 크게 마음먹고서 8천원 짜리 경양식 세트를 먹지 않아도 될 만큼 반듯한 직장인이 되어있다. </div> <div> </div> <div>매주 금요일 퇴근길에 만나 전망 좋은 호텔 레스토랑의 창가 자리나 오마카세₂로만 받는 고급 스시야₃에서 초밥을 먹는다. </div> <div> </div> <div>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희철이 사는 아파트에 가서 지극히 의무적이고 이성적인 공방을 치루는 것이 그들만의 의례적인 데이트 방식이 되어버렸다. </div> <div> </div> <div>3년 가까이 변변한 직장도 없던 취업 준비생 시절 아침에 일어나면 부모님의 눈칫밥을 먹으며 하루를 시작했고 </div> <div> </div> <div>서로가 만나 데이트를 하게 되면 오래 전에 거미줄을 친 서로의 지갑을 탈탈 털어내 분식집에서 가벼운 식사를 하거나 </div> <div> </div> <div>서로의 집이 비어있을때 들어가서 한 없이 부끄러워하며 격렬하게 운우지정을 나누던 시절도 있었기에 </div> <div> </div> <div>지금의 모습은 격세지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div> <div> </div> <div>그렇게 10년을 넘게 연인관계로 이어온 그네들에게 연애 초반의 풋풋함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희철과 지영이 10년이 넘게 사귀는 것을 보면서 양가의 가족들과 친구들은 대단하게 여기면서도 </div> <div> </div> <div>아직까지 결혼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품었고 수없이 그들에게 결혼 의사를 묻곤 하였다. </div> <div> </div> <div>그럴 때마다 희철과 지영은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로 돌리면서 대답을 회피하곤 하였다. </div> <div> </div> <div>서로가 결혼에 대해서 단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div> <div> </div> <div>서로를 사랑하게 된지 7년쯤 되었을 무렵, 오랜 취업 준비끝에 희철과 지영은 높은 경쟁률을 뚫고서 누구나 알고있는 대기업에 보란듯이 입사하였다. </div> <div> </div> <div>그러고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들은 결혼을 생각하였고 양가 부모님의 상견례 후 일사천리로 약혼식까지 치루어냈다. </div> <div> </div> <div>하지만 그 이후로 엄청나게 쏟아져 내려오는 일거리와 월화수목금금일을 아우르는 야근의 연속성은 결혼을 쉽사리 준비하지 못하게 했고 </div> <div> </div> <div>그렇게 차일피일 미루고 미루다 지금에 이르렀다.</div> <div> </div> <div> </div> <div>첫 눈이 내리던 11월의 마지막 금요일, 미국에서는 온가족이 함께 모여 추수감사절 식사시간을 보내고 연휴를 즐기고 있을 날이었다.</div> <div> </div> <div>여느때와 같이 희철과 지영은 퇴근길에 만나 함께 단골 호텔 레스토랑으로 올라가 여유롭게 주문을 마치고서 </div> <div> </div> <div>보관해둔 와인을 꺼내받아 글라스에 신의 물방울을 채웠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같았으리라. </div> <div> </div> <div>하지만 오늘은 여느날의 금요일과는 많이 다른 양상을 띄고 있는 듯 하다. </div> <div> </div> <div>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던 그들은 갑자기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고, 어느새 울상이 된 희철은 지영이 앉아있는 의자 앞으로 다가가 </div> <div> </div> <div>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격렬하게 두 손을 지문이 닳도록 빌어대며 지영에게 사정하기 시작했다.</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₁사정[<span class="cha">事情] : 어떤 일의 형편이나 까닭을 남에게 말하고 무엇을 간청함.</span></div> <div><span class="cha">₂오마카세[お任(まか)せ] : 주방장특선, 보통 고급 일식집이나 초밥전문점에서 쉐프의 임의대로 요리를 만들어 고객에게 내놓는 주문방식. </span></div> <div><span class="cha"> 일반적으로 전채, 장국, 초밥, 튀김, 조림, 사시미, 후식 순으로 순서를 짜서 내어줌.</span></div> <div><span class="cha">₃스시야[すしや] : 초밥 전문점.</span></div> <div> </div> <div> </div>
Ecce ego vobiscum sum usque in sempiternum. te amo. An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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