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font face="바탕"></font> </div> <div>오월의 햇살은 아직 남아있던 겨울의 발자취를 지우는 듯, 따사롭게 비추기 시작했다. </div> <div>서울 어딘가의 마천루부터, 서울 어딘가의 달동네까지, 오월의 햇살은 봄을 불러온다.</div> <div> </div> <div>서울 어딘가의 어두운 방, 김은 오전 늦게 침대에서 일어난다. 오월의 해살은 눈 부시게 뜨겁건만 김의 방에는 소름끼치도록 어두운 정적 뿐이었다.</div> <div>방에는 쌓인 빨래더미, 술병들이 어질러져 있을 뿐이다.</div> <div>김은 서서히 일어났다. 침대에 멍하니 앉는다. 오늘은 무엇을 할까 생각한다. </div> <div>계속 집에만 있으려 했으나, 벌써 일주일동안 밖에 나가보질 않았다. 김은 일어나서 창가로 간다. 창문을 여니 오월의 햇살이 내려쬔다.</div> <div>김은 문득 이 조그마한 사치를 누려보고 싶었다. 그는 무작정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div> <div> </div> <div>그는 욕실로 향했다. 김은 비록 젊은이었으나, 거울에 비친 남자의 모습은 자신보다 스무 살은 늙어보이는 것이었다.</div> <div>벌써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을 깎아 볼까. 그렇게 생각한다. 일회용 면도기는 벌써 다 써 버렸다. </div> <div>그는 천천히 머리 옆의 선반을 손을 쓸기 시작했다. </div> <div>아프다. 손가락에 찌릿한 느낌이 온다.</div> <div>김은 손가락을 들어 본다. 손가락에서는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그는 선반 그 위치에 면도날이 있음을 깨닫는다. </div> <div>피가 묻은 면도날을 보며, 김은 어떠한 감상에 빠져든다. 그것은 오월의 햇살에 대비되는, 아직 김의 집을 감싸고 도는 겨울의 추위다.</div> <div>김은 면도날을 살짝 인중,턱,목에 대본다. 그리고 이내 굳이 자기가 단정하더라 하더라도, 알아줄 사람이 없기에, 수염 정리를 포기한다.</div> <div>뼛속까지 시린 찬물로 샤워한 다음, 그는 옷걸이에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옷을 입는다. 목 부분에 누렇게 때가 탄 흰 와이셔츠, 검은 양복바지.</div> <div>이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비록 그는 편한 티셔츠, 청바지가 있었으나, 오늘은 그러지 않기로 한다.</div> <div> </div> <div>뒤축이 눌린 구두를 신고 현관문을 열자, 문득 두려운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div> <div>김은 아직 오월의 햇살을 받아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의 집의 겨울이 그를 아직 놓아줄리가 없다.</div> <div>김은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천천히 걸어서, 거리의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다.</div> <div> </div> <div>버스 정류장, 녹이 슬은 이정표를 김은 훑어본다.</div> <div>일산 행, 좋은 도시이긴 하지만 김은 내키지 않았다.</div> <div>강남 행, 김은 '여기로 갈까'하는 생각을 하다, 이내 마음을 접는다.</div> <div>광화문 행, 김은 어쩔수 없이 광화문 행 버스에 몸을 싣었다.</div> <div> </div> <div>버스 한 구석 창가자리에 앉은 김은 밖을 응시한다. 버스는 덜컹거리며 서울 시내로 향한다.</div> <div>밖에는 오월의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나들이 나온 가족, 사랑을 속삭이며 걸어가는 연인들...</div> <div>그렇게 한참을 창밖을 보고서, 김은 아직도 광화문은 여러 정거장 남았다는 것을 깨닫는다.</div> <div>김은 친구가 별로 업었다.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그럭저럭한 대학을 나왔지만, 남들 다 해본다는 연애도 못해본 것이 그의 대학생활이다.</div> <div>한동안 가족과 같이 살았던 김은, 취직이나,여자 관계에 대해 캐묻는 가족을 피해 도망나온지 벌써 몇 달이 되어간다.</div> <div> </div> <div>그렇게 어떠한 생각을 하면서, 버스는 광화문에 도착했다.</div> <div>김은 버스에서 내렸으나, 이제 어떻게 해야 될까에 대한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div> <div>그는 광장 한가운데 있는 벤치에 앉는다. 앉아서 햇볕을 쬘 작정이다.</div> <div>그렇게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김은 갑자기 사람들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div> <div>수많은 행인들, 줄 잡힌 양복을 입은 비즈니스 맨들 사이에서, 김은 헤진 와이셔츠 뿐이었다. </div> <div> </div> <div>김은 벤치에서 일어나, 청계천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는 청계천 구석에 앉아 개천 바닥에 발을 적신다.</div> <div>김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왜 흐르지 못하고 침전 하고 있느냐..?</div> <div>어느 친구들은 좋은 대학을 나와 벌써 여우같은 부인에 토끼같은 자식들을 가진 사람도 있다.</div> <div>하지만 김은 어느 것도 없었다. 직장은 번번히 고배를 마실 뿐이고, 여자는 말할 것도 없다. </div> <div>햇살에 데워져 따뜻했던 냇물은, 김은 갑자기 차갑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div> <div> </div> <div>김은 다시 일어나, 교보문고를 기웃거려 보기도 하고, 광장 지하의 전시관 또한 기웃거리기를 오래, 해는 이미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div> <div>이대로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하던 김은, 문득 술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div> <div>그렇게 마음이 이끄는대로 술집으로 가던 그 골목에서, </div> <div>김은 나를 만났던 것이다.</div> <div> </div> <div>나는 김을 오랫동안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만나기에는 껄그러워지는 상대였다.</div> <div>그 동안 김을 몇번 만났지만, 요즈음에는 "바빠서.."라는 핑계로 이리저리 만남을 피하는 중이었다.</div> <div>그러던 중, 그 곳에서 나는 그를 만났다.</div> <div> </div> <div>나는 어떠한 불안감도 들었고, 또한 어떠한 반가움도 느꼈다. </div> <div>김은 나에게 "시간 있으면 한잔 하지." 라고 무뚝뚝 하게 말했다. </div> <div>나는 피해 갈 수 없음을 알았기에, 가장 가까운 술집으로 들어갔다. </div> <div>술을 별로 못 마시기에, 나는 소주 몇 잔을 받고 잔을 물렸고, 김은 나와 반대였기 때문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나를 앞에 두고</div> <div>소주병을 하나 하나씩 비우기 시작한 것이다.</div> <div> </div> <div>김이 소주병 두 병을 비우기 시작했을 즈음, 안절부절 못하던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div> <div>"요즘 어떻게 지내?", 김은 술잔을 비우다 말고 어떠한 흔들리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div> <div>"그냥, 직장 알아보면서, 이렇게 지내고 있다." 그리고서는 김은 술잔을 비웠다.</div> <div> </div> <div>"요즘은 경기가 안 좋잖아, 우리 회사에서도 구조조정이 들어갔다구, 우리 매니저는 어제 잘렸어, 힘들게 공부하고, 대학 나와서, 일을 잡으면 뭐하나, </div> <div>결국에는 이렇게 파리 목숨처럼 뎅겅뎅겅 잘리는데."</div> <div>나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김은,</div> <div>"그래도 일을 한다는게 좋은게 아닌가? 나같은 사람들도 여럿 있다구." 라며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div> <div>"그래, 가끔은 나도 네가 부러워, 자네처럼 아무 것에도 묶여있지 않고 떠다니고 싶다구. 하지만 그러기에는 말뚝을 너무 깊게 박았지."</div> <div>"너는 말뚝이라 생각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건 너의 이정표다. 너는 이정표가 있지만 나는 아무것도 없어. 이런 떠다니는 것이 기쁜 것인가?"</div> <div>나는 더이상 말을 할수 없었다. 그리고서는 그 이후부터는 김의 말을 듣는 체 마는 체 하면서 이 만남이 어서 끝나기를 바랬다.</div> <div> </div> <div>소주를 다섯 병째 비우던 순간, 김이 말했다.</div> <div>"그만 일어나지."</div> <div>그리고 카운터로 계산서를 들고 걸어가던 김을, 내가 가로막았다.</div> <div>"이 사람아, 내가 쏘는거야, 나중에 취직하면 거하게 쏘라구."</div> <div>라며 계산서를 빼앗아 가던 나를, 김은 무언가 중요한 것을 빼앗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가게를 나왔다.</div> <div> </div> <div>가게를 나와 얼마쯤 걸었을까, 두갈래길이 나왔다.</div> <div>"다음에 또 보자, 연락하고." 나는 그런 다음 가로등이 이어진 길을 무언가에 쫒기듯이 걸어갔다.</div> <div>김은, 그 반대편에, 고장나버린 가로등 하나 있는 골목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div> <div> </div> <div>김은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다.</div> <div>겨울의 추위가 다시 그를 덮쳐 온다. 방 안은 끔찍할정도로 고요하다.</div> <div>바닥에 쌓어 있는 은 전공 서적들, 영어 책을 사이에, 김은 색이 바랜 시집 하나를 찾는다.</div> <div>아무 페이지나 찾아서 읽어 본다.</div> <div> </div> <div>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div> <div> 내 호올로 어델 가라는 슬픈 신호냐 </div> <div> </div> <div>다른 쪽을 펼쳐 본다. </div> <div> </div> <div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2;">-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div> <div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2;">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div> <div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2;">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div> <div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2;">것이다</div> <div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2;">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div> <div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2;">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과</div> <div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2;">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div> <div> </div> <div>김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시집을 책 더미 사이에 쑤셔 넣고, </div> <div>색 바랜 와이셔츠를 벗고, 다시 욕실로 들어간다.</div> <div>피가 엉겨붙어 있는 면도칼이 아직 있다. 손가락도 아직 쑤시다.</div> <div> </div> <div>거울 건너편의 면도칼을 든 남자에게서, 어떠한 신념이 보인다.</div> <div>김은 면도칼을 점점 얼굴에 가까이 가져다 댄다.</div> <div> </div> <div>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div> <div> </div> <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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