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미국 동부 어느 대학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div> <div><br></div> <div>때는 겨울이었다. 밤새 흄의 인성론을 읽고 아침에 피곤한 몸으로 교실로 향했다. </div> <div>맑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하얀 눈길을 걸으니 정신도 맑아지는 느낌이었다.</div> <div><br></div> <div>철학과 건물에 들어서서 교실로 올라가는데 문간에서 신발을 탁탁 터는 교수님이 보였다.</div> <div>그 교수는 학생들이 질문할 때마다 한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에 답변을 했다. </div> <div>늘 본받아야 할만한 신중함과 생각의 정밀성을 보여주었다. </div> <div>그가 쓴 글들은 과감하고 상식을 벗어난 주장들을 내세웠지만, 반박치 못할 정교한 논증으로 받쳐 주었다.</div> <div><br></div> <div>수업이 시작되자 그 교수는 인성론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면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내용에 다다르게 되었다.* </div> <div>읽으면서 빨리 지나친 내용이지만 교수님은 역시 이해하기 쉽게 그 내용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천천히 설명한다: </div><blockquote style="margin:0px 0px 0px 40px;border:none;padding:0px;"> <div><span style="font-size:9pt;"><br></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분석해야 하는가? </span><span style="font-size:9pt;">즉, 산타클라우스가 존재한다는 생각과,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span><span style="font-size:9pt;">두 생각 다 산타클라우스에 대한 생각이다. 그렇다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존재한다는 생각과 어떤 면에서 다른가? </span><span style="font-size:9pt;">흄은 이런 제안을 한다: </span><span style="font-size:9pt;">산타클라우스가 <u>존재하지 않는다</u>는 생각은 바로 산타클라우스가 <u>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제외되었다</u>는 생각인 것이다."</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br></span></div></blockquote><span style="font-size:9pt;">누가 교수님이 문장을 끝마치기도 전에 손을 들고 끼어들었다:</span> <div><br></div> <div><blockquote style="margin:0px 0px 0px 40px;border:none;padding:0px;"> <div>"흄은 틀렸습니다. 그의 제안은 모순이나 순환을 도출하기 때문이죠."</div> <div><br></div></blockquote>교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그 학생이 예전부터 뛰어난 두각을 나타낸 학생이 아니거니와, 순식간에 어떻게 이런 딜레마를 도출해내는 사고를 했겠는가.</div> <div><br></div> <div>교수님은 의아해하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div> <div><br></div><blockquote style="margin:0px 0px 0px 40px;border:none;padding:0px;"> <div>교수: 그래, 어떻게?</div> <div>학생: 우리는 어느 특정 시간이나 장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div> <div>교수: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오즈의 나라나 엘도라도같이, 존재하지 않는 곳을 생각할 수 있다는 거지?</div> <div>학생: 네, 우주 밖의 공간이나, 빅뱅 이전의 시간, 둘 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죠.</div> <div>교수: 그렇다면 모순은?</div> <div>학생: <u>어느 특정</u> 시간이나 장소가 <u>모든</u> 시간이나 장소에서 제외된다는 것이 모순입니다."</div> <div>교수: 그럼 순환은?</div> <div>학생: 모순을 피하려면 "어느 특정 시간이나 장소가<u> 존재하지 않는다</u>라는 생각 = 그 특정 시간이나 장소가 <u>존재하는</u>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제외되었다는 생각"이라고 수정해야 되죠. 그러나 이렇게 수정하면 "존재"라는 단어가 정의되는 문구와 정의하는 문구에 동시에 포함되어 순환적인 정의가 되는거죠. </div></blockquote> <div><blockquote style="margin:0px 0px 0px 40px;border:none;padding:0px;"> <div><span style="font-size:9pt;"><br></span></div></blockquote><span style="font-size:9pt;">대학원생 중 의자를 뒤로 젖히고 앉아있던 고참 선배는 놀라 자빠질 뻔했다. </span><br><blockquote style="margin:0px 0px 0px 40px;border:none;padding:0px;"> <div><br></div></blockquote>철학논쟁에도 일종의 체크메이트 같은게 있다. </div> <div><span style="font-size:9pt;">상대방의 입장에서 모순이나 악순환, 무한후퇴가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면 되는 것이다. </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br></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그렇다면 과연 흄은 틀리고 흄의 정의에서 모순과 순환을 이끌어낸 학생은 맞는 것인가?</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br></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존재성/비존재성의 문제는 복잡하다고 본다. </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흄의 정의는 시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개별적인 사물들에게는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이 정의는 시공간 자체에 적용할 수는 없다.</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플라톤의 보편자나 집합론의 집합들과 같은 시공간을 초월한 추상적인 존재들이 있다면, 이러한 추상적인 존재들에게도 적용할 수 없다. </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정신이나 마음 또한 공간에서 존재하지 않는 비물질적인 것이라고 보면, 시간적인 측면에서는 흄의 정의를 적용할 수 있겠지만, 공간적인 측면에서는 적용할 수 없다. </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br></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즉, 존재란 것은 일원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존재하는 대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존재성은 근원적인 무언가에 기반한다.</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br></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좀 더 체계적으로 말하자면,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이 있다 (1차적 존재성). </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은 이 근원적인 존재에 의존한다 (2차적 존재성). </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그 의존관계를 완전히 파악하여 서술하면 그 다른 모든 것들의 "존재성"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을 다 한 것이다. </span></div> <div> <div><br></div> <div>존재론적인 문제에 더 깊이 파고들고 싶다면, 콰인(Quine)의 존재론, 그리고 카르납의 내적/외적 존재론적 질문에서 시작하길 권한다. </div> <div>콰인의 존재론은 일원적이고, 카르납의 존재론은 다원적이다. 나 자신의 입장은 이 둘 사이에서 중간 입장이라 할 수 있겠다. </div> <div><br></div> <div>-----</div> <div><br></div> <div>*인성론 1.1.5, "...no two ideas are in themselves contrary ,except those of existence and nonexistence, which are plainly resembling, as implying both of them the idea of the object; though the latter excludes the object from all times and places, in which it is supposed to not exist."</div></div>
댓글 분란 또는 분쟁 때문에 전체 댓글이 블라인드 처리되었습니다.